[문학이 목격한 사회] 현대의 전락(轉落), 김승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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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조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신자유주의, 징후를 포착하는 문학
작가는 가장 먼저 울기 시작해서 가장 늦게까지 우는 존재라고 했다. 이는 문학이 현상을 가장 오랫동안 응시하는 매체라는 뜻이기도 하다. 문학이란 하나의 ‘눈’이자 관점이다. 그런 면에서 문학은 한 사회가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전환기에 있을 때 이것을 가장 정밀하게 포착하는 ‘미시사회학’에 가깝다고 할 수있다.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단숨에 세계를 지배하는 사상적 조류로 자리매김했다. 경제적 자유가 정치와 문화의 자유를 견인한다는 생각이었다. 1970년대까지는 서구의 주요국가들도 국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일종의 ‘중앙집중적 복지국가’를 지향했지만, 1980년대 미국과 영국을 필두로 한 ‘자유시장’의 이데올로기는 세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반면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호명이 보편화하기 시작한 것은 IMF 이후 21세기에 진입하면서였지만. 박정희가 집권하고 있던 1970년대에도 ‘한국적 신자유주의’의 고민은 태동하고 있었다.
자유경쟁원리의 전면적부정과 중앙집권적관료통제경제에서 출발하는 계획경제와 ‘신자유주의’라는 양극단은 우리의 선택범위 밖에 있으며 신고전파통합과 서구형혼합체제에서 경제체질에 적합한 선택을 하여야할것이다. 이때 핵심을 이루는 것은 자유경쟁이냐 계획화 통제냐하는 택일적인 것이 아니고 양자를 병존시키되 그 절충의 정도와 형태가 문제될 것이다.
- 1971.10.5. 매일경제 칼럼 中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국가수준의 경제나 사회적 불평등, 노동의 소외와 빈곤화 등 거시적인 영역을 넘어 인민들의 사회적 의식 저변에까지 침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생활문화적 징후였다.
요컨대 1970년대 한국사회의 경제적 징후(도시빈민,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포착한 것이 조세희였다면, 생활문화적 징후를 문학의 가시권으로 급격하게 끌어올린 작가는 김승옥이었다. 특히 김승옥이 1964년 「사상계」에 발표한 <무진기행>과 1977년 초대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서울의 달빛 0장>은 이미 21세기적(포스트모던)이라고 할 정도로 미래적이고 파격적인 인간관(사회관)을 한국사회에 소개했다.
김승옥의 현대(現代)
““행복하시죠? 돈이 많고 예쁜 부인이 있고 귀여운 아이들이 있고 그러면…” “앞으로 오빠라고 부를 테니까 절 서울에 데려가 주시겠어요?” “서울에 가고 싶으신가요?” “네.” “무진이 싫으신가요?” “미칠 것 같아요. 금방 미칠 것 같아요. 서울엔 제 대학 동창들도 많고…아이, 서울로 가고 싶어 죽겠어요” “그렇지만 이젠 어딜 가도 대학 시절과는 다를 걸요. 인숙은 여자니까 아마 가정으로나 숨어 버리기 전에는 어느 곳에 가든지 미칠 것 같을 걸요.” “내 경험으로서는 서울에서의 생활이 반드시 좋지도 않더군요. 책임, 책임 뿐입니다.”” (‘무진기행’ 中)
“몇 개의 마을을 지나치는 동안 배치가 다르고 가꿈이 다르고 규모가 다를 뿐 결국 모든 곳이 집과 길과 숲과 냇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되듯 그 마을의 생활 속으로 들어갈 수 없고 또 뻔해서 들어가기도 싫은 여행자에게는 여행의 시작에 느꼈던 기대와 흥분도 이내 잃어버리고 지저분하나마 익숙한 고향 거리에 대한 향수만 짙어 갈 뿐이었다.” (‘서울의 달빛 0장’ 中)
김승옥은 ‘무진’이라는 시골에서 자란 사내가 상경하여 기업가의 딸인 아내를 만나 세속적 성공을 거두고는 다시 고향에 내려와 일탈을 꿈꾸는 이야기를 통해 현대인의 무기력과 허영을 섬세하게 파헤치거나, ‘서울의 달빛 0장’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여배우(현대적 관능)와 결혼하게 된 ‘나’의 욕망이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현대적 삶이 거느리고 있는 이미지의 밑바닥을 집요하게 탐색한다.
김승옥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필부들이다. 이들은 전형적인 서사의 주인공들처럼 개인적 명예나 사회적 이상을 추구하지 않고, 세속적 욕망에 무기력하게 복속되어 있다. 이들은 현실을 극복하려고 시도하지도 않고, 이상적 인식을 추구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절망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어떤 면으로는 현실을 더 적확하게 수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인이란 대부분 영웅이 아니고 보편의 삶 언저리에서 버둥거리는 보통의 인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그의 소설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앙상한 욕망을 팔아먹거나 설파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김승옥은 그 외에도 여러 편의 단편과 중편을 썼다. 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한 사회가 타락하거나 전환하는 시기의 현대적 일상을 포착하고 있다. 그것은 대부분 쓸쓸하거나 파괴적이고, 반면 아름답기까지 하다. 아마도 그것은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찬사를 받는 김승옥의 소설이 인간과 사회의 반대편에서 반복적으로 길어 올리는 ‘인간적 수치’ 때문일 것이다.
김승옥의 작품들은 수치스럽기에 아름답다. 김승옥의 인물들이 전통적 가치나 믿음이 타락하는 한가운데에 서 있으면서도 담담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인물들이 일종의 ‘사회적 수치’를 감각하고 있는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승옥 소설 속의 수치란 인간의 증명이자,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수치의 무덤 위에서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 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무진기행’ 中)
김승옥이 그린 ‘무진’의 공간이란 진실과 탈윤리의 공간이다. 무진은 현실에 개입하지 못하지만, 동시에 무의식의 안개처럼 현실에 관여한다. 가끔씩 인민의 삶에 들이치고 나서며 환기하는 것이다. 물론 역사의 대전환을 감각하는 길은 다양하다. 거기에는 대역병이나 기근이 발생한다거나, 전쟁이 발발하고, 기후재난이 인류를 덮치는 것처럼 거대한 격동이 이는 식도 있지만, 반대로 찰리 채플린이 대공장의 기계 앞에서 춤을 춘다거나, 사북의 인민들이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광산을 점거한다거나, 또 아니면 알파고의 한 수가 인류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전복시키는 장면처럼 일상적인 파격의 풍경도 있다.
한 세대가 저문다는 것은 그토록 슬프고 당혹스럽고 어딘가 우스꽝스럽기도 한 혁명의 연속이다. 그런 면에서 벌거벗은 윤석열이 흰색 빤쓰를 입고 감옥에서 춤을 추는 광경도, 그를 잡아 넣기로 한 배역들이 어쩔 줄 모르는 척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도, 새로운 시대의 징후일 수 있다. 인민들은 거기서 절망스럽고 또 그만큼 수치스럽다. 인간과 문명이라는 것은 그렇게 수치의 무덤을 밟고 서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인민들은 오늘날까지 온갖 지혜를 쥐어짜 문명을 일으켜 왔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웅덩이에 우글거리는 소금쟁이와 다를 바 없는 허망한 존재라는 사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물이 다 말라버리거나 커다란 행성이 떨어지면, 기온이 오르거나 내려가면, 바이러스에 감염되거나 천적에게 먹히면, 그대로 끝나 버리는 너무도 연약한 생명. 그런 데다가 소위 전쟁이라는, 파시즘이라는, 그 연약한 생명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어리석은 행위가 끊이지 않는다. 지적 생명체라는 게 이 꼴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생물이 버젓이 번성하고 있다.
[그림] 윤석열의 대관식, 2024, 김승민, 제주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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