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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오늘] 노동자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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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153회 작성일 25-08-19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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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원 (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

 

 

80년 전 노동자의 꿈

 

플랫폼에 나와서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이 많았어요. 나는 태극기라는 것을 해방이 될 때까지도 몰랐는데, 일장기를 파란 페인트로 반만 칠하고 팔괘는 그리지도 않은 채 흔들어댔던 겁니다. 며칠씩 역에 마중 나와서 내 아들 군대 갔다가, 징용 갔다가 오느냐 안 오느냐 하면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철도노동자 이순복의 구술 _ 한길사, 8.15의 기억242)

 

80년 전 한반도 인민에게 해방은 헤어졌던 가족을 만나 따뜻한 밥을 지어 먹으며 억압 없이 살 수 있는 시절이 왔다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일본, 중국, 러시아로 옮겨가 살던 이들을 실어나르는 철도노동자는 종일 삽으로 석탄을 퍼부으면서도 고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인 관리자가 떠난 공장에서 일본인 어깨 너머 배운 실력으로 밤새 기계를 만지고 기름칠을 하면서도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미군이 들어와 북위 38도 이남의 점령지역에서 조선 인민과 그 통치에 적용하는 법률로부터 조선 인민에게 차별 및 압박을 가하는 모든 정책과 주의를 소멸하고 조선 인민에게 정의의 정치와 법률상 균등을 회복케 하기 위하여일제가 만든 법률과 법률의 효력을 가진 조령(條令명령을 폐지한다(1945.10.9.) 했을 때는 희망이 더 커졌을 것이다. 노동자에게도 희망의 시절이 오는가 싶었다.

 

 

조선 노동자의 좌경 위험성제거

 

하지만 한국 노동자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한국은 전후 세계 질서 재편의 복판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부터 미군이 한국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곱지 않았다. 미군은 조선인이 처한 좌경 위험성이 높은 사회경제적 상황에 주목했고, 194594일 하지는 조선이 미국의 적이며 이에 따라 항복 조례와 규정의 적용을 받는다고 했다. 이 관점은 미군정 3년을 관통했다.

일본 제국을 떠받치던 정치범처벌법, 예비검속법, 치안유지법, 출판법, 신사법, 경찰의 사법권 등은 폐지되었지만 곧 노동자를 억압하는 조치들이 발표된다. 1031일 미군정은 법령 19호 제2조에서 노동쟁의에 관해 미군정이 설치한 중재소를 통해 해결하도록 규정했고 128일 노동조정위원회를 설립했다. ‘노동의 보호를 내세운 법령이었다. 19465월에는 미군정청의 허가가 없는 일체 집합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함으로써 사실상 노동조합의 단결·단체 행동을 제한했다.

19466월을 기점으로 미군정은 본격적으로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1945.11.5.설립한 노동조합 전국조직)을 불법화하고, 노동조합으로서 권리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 기조는 7월 미군정청 법령 97호 노동문제에 관한 정책에 고스란히 담겼는데, ‘민주주의적인 노동조합의 조직과 활동을 장려하고 이러한 노동조합을 통해 평화적 교섭을 장려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이면에는 노동조합의 체제 내화 목적이 있었다. 철도노조와 전평의 9월 총파업을 겪으며 미군정은 사전 통고 없는 파업은 불법이라고 규정하고 파업을 주도한 전평 간부를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전평은 점차 지하활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우익세력을 중심으로 결성된 대한노총만 유일한 합법적 노동조합으로 지원, 인정받았다.

 

 

미군정이 이식한 민주주의적 노동조합

 

2차 세계대전 전후, 세계 노동운동 진영의 저항이 폭발적으로 늘자, 국가권력은 각종 억압기구를 만들고 자본은 세계적으로 단결하여 대응했다. 이때 미국 노동조합운동은 미국 주도의 세계 구상(국제통화기금_IMF, 국제부흥개발은행_IBRD,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_GATT, 미국 중심의 통상자유화 추구_브레턴우즈 체제 구축)에 동의하며 무파업 선언과 협력으로 미국 정부의 정책을 지지했다. 이에 미국은 자본주의 체제를 주도하기 위한 새판 짜기에 성공할 수 있었고 더 나가 군산복합체 구조를 만들며 패권국의 길을 걸었다.

노동운동 진영의 협력을 바탕으로 미국은 19476월 태프트-하틀리 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노동조합의 권리를 대폭 제한하는 법이었다. 클로즈드숍을 금지하고 유니온숍을 제한하며 노동조합에도 부당노동행위를 적용해 노조의 계약 파기나 불법파업 또는 보이콧에 대해 회사가 노조를 고소할 수 있도록 했다. 노조 인정 투쟁으로 파업 또는 보이콧을 할 수 없도록 했다. 대통령은 국민의 건강과 안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파업의 조정 기간을 80일로 연장하도록 법원의 명령을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공무원의 파업은 금지되었다. 노동조합 간부는 공산당원이 아니며 정부 전복을 위한 단체 지지자가 아니라는 선서를 자본가가 요구하면 이에 응해야 했다. 노동조합은 연방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를 위해 헌금할 수 없었다.

이 법의 테두리 안에 머무는 노동조합이 민주주의적 노동조합이었다. 이 기조로 미국은 전후 점령지역에서 순수한노동조합을 양성하는 노동정책을 시행했다. 한국에서도 미군정 노동정책의 핵심은 미국식 노동조합운동을 뿌리내리는 것이었다.

 

 

노동운동의 방향성

 

해방공간 한국 노동운동 진영의 과제는 통일국가 건설, 자립 경제 수립, 노동자 권리 확보였다. 그러나 미군정의 폭력과 협력 협박, 한국전쟁을 겪으며 노동운동 진영은 그 과제와 방향성을 박탈당했다.

후과는 컸다. 한국 정부 수립 이후 노동조합은 이승만을 찬양하고 협력하며 살아남았다. 박정희 군부를 찬양하기 위한 노동자대회에는 4만 명이 넘는 노동자를 동원하면서도 정작 노동자의 요구를 제기하는 데는 성명서 한 장 달랑 발표하는 기구가 되었다. 그러는 사이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존재를 잊어버렸고, 전태일은 대항 조직의 부재 속에 죽음을 택해야 했으며 민주를 외치는 노조는 사고지부가 되었다. 40여 년 세월이 흘러 전평을 잇는 민주노조를 복원해냈지만, 이를 위해 수많은 노동자가 구속·수배·해고되고 목숨까지 건 대가였다.

 

 

해방의 꿈

 

전후 80, 노동운동 진영은 여전히 격랑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경제성장률 둔화, 인플레이션 위험, 무역 긴장, 에너지 문제, 반도체·인공지능 등 첨단 기술 패권 경쟁 등 자본의 위기는 더 강화되고 있다.

자본의 위기는 노동계급과 인민의 위기로 전가된다. 인공지능과 기술발전에 기반한 제조업의 변화는 일자리를 줄일 것이고, 전 세계의 자원과 상품이 오가던 지구 바다는 이음새 없는 플랫폼으로 작동하게 될 것이다. 세계를 연결하던 고리가 끊어진다면 나라별 부의 편중이 더 심화될 수도 있고 국가 간 갈등도 심화될 위험이 크다. 부의 불평등은 더 깊어질 것이고 노동자 계급 내부의 분화도 예견된다.

지난 역사에서 노동운동의 역할은 노동자계급의 실질적인 삶을 개선하는 것에 역점을 두어왔지만, 언제나 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80년 전 해방의 꿈처럼 노동자 계급이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력을 재생산하는 것이었다. 노동운동의 위기는 계급 전선의 진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과 전망의 부재(不在)에서 온다. 노동자 계급에는 여전히 해방의 꿈이 필요하다.



[사진] 1945년 7월 5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결성식, 노동자역사 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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