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노동운동사] 종교는 역사적이다
페이지 정보

본문
왕의조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스파르타쿠스
스파르타쿠스의 노예해방운동은 로마제국의 중심부를 위협했다. 이 투쟁은 기원전 73년에 74명의 검투사들이 검투장을 탈출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7만 명의 노예들이 이 전쟁에 참여하며 로마를 위협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는 해적들의 배신으로 인해 결정적인 전투에서 패배하고 죽임을 당한다. 이후 6천 명의 노예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로마의 작가들은 이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10만 명의 노예가 살해당했다고 기록했다. 스파르타쿠스의 투쟁은 이후 인류 역사의 수많은 사회운동가들에게 영감을 줬다. 칼 맑스는 가장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로 스파르타쿠스를 꼽았고,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끈 독일의 혁명가들은 자신들의 집단을 스파르타쿠스단이라고 불렀다.
기독교의 모순
스파르타쿠스의 투쟁을 분기점으로 로마제국은 서서히 몰락해갔는데, 그 와중에도 한 가지는 살아남았다. 바로 기독교였다. 물론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로 출발한 종교는 아니었다. 기독교를 창시했다는 예수에 관해서는 성경을 제외하곤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이를테면 예수가 신화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 인물이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신약성서는 예수가 로마의 속주였던 유다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예수의 가족이 아우구스투스 재위 때 실시한 인구조사에 응하기 위해서 그곳에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태어날 무렵에는 인구조사를 실시한 적이 없다. 신약성서는 예수가 헤로데 왕 재위기에 태어났다고 말하지만 헤로데 왕은 기원전 4년에 죽었다.
신약성서의 복음에는 모순이 많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 이렇게 말했던 예수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로마인들에게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말한다. 유대교의 율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복종을 요구하는가 하면 위반을 촉구한다. 어째서일까?
모순의 정체
예수가 활동했던 예루살렘은 로마의 중요한 무역도시였다. 예루살렘은 로마에 공물을 바치고 로마 총독들의 직접적인 지배로 인한 세금압박에 시달렸다. 자연스럽게 로마에 협력하는 유대인들이 생겨났고, 유대인 사이에도 부익부빈익빈이 벌어졌다. 예루살렘에서는 봉기나 시위가 끊이질 않았으며 이들은 종교적인 색채를 띄기도 했다.
헤로데 왕의 아들은 이와 같은 봉기들을 진압하면서 유대인 3천 명을 죽이고 2천 명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 모든 충돌 과정에서 유대인 상층 계급에 대한 유대인 빈민들의 계급적 분노는 로마 점령군을 향한 증오와 결합했다. 이러한 계급적 갈등은 유대교에 대한 다른 해석들로 표현되었고, 자연스럽게 종교적인 노선 또한 갈라지게 되었다.
이처럼 예수가 본격적인 활동을 벌인 시기의 예루살렘은 로마의 지배에 대한 다양한 계급적 증오가 분출되는 ‘종교의 각축장’이었다. 곧 종교 내부의 노선갈등은 예루살렘의 정치·경제적인 갈등이었다.
기독교의 전략
그 많은 유대교 종파들 가운데 하필 기독교만이 번영해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다만 기독교는 당시 번성하고 있던 다른 종교들의 감성적 요소들을 빌려와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신이 죽고 부활함으로써 세속의 죄를 씻는다’는 생각은 당시의 대중적 종교들에서 이미 발견할 수 있는 내용이었으며, ‘성모 마리아’ 또한 이집트의 여신인 이시스와 비슷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미 수많은 믿음을 확보하기 시작한 유대교의 매력적인 요소를 채택하되, 사람들을 겁먹게 하는 엄격한 율법을 버렸으며, 신비스러운 종교들에서 인기있는 주제들을 따왔다. 물론 이들이 어떤 이해타산에 따라 성경을 조작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제국의 억압과 차별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감각하고 있었으며, 인민들의 고통에 역사적인 혹은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해야만 하는 소명을 감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의 설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위안을 줬고. 동시에 부자들에게는 자신의 부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공했다.
종교와 인류
오늘날 세계인구는 80억에 달하는데 이 중 26억 명이 기독교인이다. 무슬림은 20억 명이니, 무려 세계인구의 50% 이상이 유일신의 세계관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종교인들은 경전을 신과의 계약으로 이해한다. 세계사의 질서 또한 인민들을 동원한 전쟁으로 말미암은 계약으로 형성되었다. 종교가 반드시 세계를 해명해야하는 것은 아니며, 종교가 초자연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종교가 ‘신(혹은 섭리)에 대한 생각’이나 ‘숭배 자체’의 의미였다고 한다. 이처럼 인류가 등장하기 시작한 즈음부터 매장의식 등의 흔적으로 볼 때 종교는 인류의 주요한 삶의 방식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박해와 갈등으로 구성되었으나, 4세기에 이르러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정책으로 인해 로마제국의 국교로 정해지며 극적인 전환을 맞았으며 이후 가톨릭, 개신교 등 주요 분파를 형성하며 그 영향력을 점차 키워나갔다.
기독교의 탄생과 초기 발전 과정은 단순한 종교적 현상이 아니라 당대의 정치경제적 맥락에서 발생한 사회운동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초기 기독교인들은 당시의 사회 구조에 도전하며 평등과 정의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사회운동적 성격을 띄었고, 단순한 종교적 운동을 넘어 사회 정치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주요한 역할을 했다.
종교는 역사의 어떤 국면에서는 절대다수의 빈민을 구제하는 역할을 맡는가 하면, 또 어떤 국면에서는 자본이나 부패한 정치권력과 연합해 인민에 대한 억압과 탄압을 합리화하는 데 기여했다. 어느 쪽이건 종교는 그 사회의 욕망을 성실히 표현해왔다. 인류는 무엇을 위해 기도할 것인가?
나는 내 이웃을 위하여 괴로워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별들을 바라보지 않았으니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
- 서울의 예수 中, 정호승
[그림] 스파르타쿠스의 죽음, 1882, 헤르만 포겔
[참고 및 인용] 민중의 세계사, 크리스 하먼
- 이전글[노동운동사건] 노동자 생존권 위협하는 블랙리스트 24.05.28
- 다음글[역사로 보는 오늘] 68년의 세계, 그리고 한국 24.05.1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