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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시의 독서] 노동자들이 깨버린 것에 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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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92회 작성일 26-02-24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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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소희 지음, <파치 : 쓰다 버려지는 삶을 거부한 아사히 비정규직지회를 쓰다>, 이매진, 2025



노동자들이 깨버린 것에 관한 기록


양돌규(노동자역사 한내 운영위원)

 

거리에서 싸운 9


이번에 함께 읽을 책은 아사히비정규직지회의 9년에 걸친 투쟁을 다룬 책 <파치>. 이 책 표지에는 파치() : 깨어지거나 흠이 나서 못 쓰게 된 물건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쓰다 버려지는 삶을 거부한 아사히비정규직지회를 쓰다라는 부제가 적혀 있다.

저자도 이야기하듯이 아사히글라스아사히맥주아사히신문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은 잘 모른다. 아니, ‘아사히글라스자체도 잘 모른다. 아사히글라스는 TV, 노트북, 휴대폰 등에 들어가는 액정 표시 장치용 유리기판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일본 기업으로 2차 대전 때 전범 기업이기도 한 미쓰비시 그룹 계열사다. 그 역사가 100년이 넘은 세계 최대 유리 생산 기업이다.

경상북도 구미에 있는 아사히글라스 공장 하청업체 지티에스(GTS)는 유리기판 생산 공정 중 콜드 공정과 굿 공정 하도급 계약을 맺은 사내하청업체다. 20154, 지티에스에서 콜드 공정 주간 근무 상근직 16명이 권고사직 통보를 받은 것에서부터 지난한 투쟁은 시작되었다. 권고사직을 받아들이지 않은 노동자 12명이 회사와 싸웠고 전환 배치를 거쳐 결국 네 사람이 남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작은 승리였다.

  

그러나 지티에스는 일주일 후 싸움을 주도했던 차헌호, 백은호를 엉뚱한 회사로 발령내고 끝내 해고했다. 차헌호는 한국합섬, 금강화섬에서 노동조합 경험을 했고 특히 금강화섬 투쟁을 마무리하면서 구속된 이력이 있는 노동자였다. 차헌호는 아사히글라스에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6년을 노력했지만 잘 안 되었다. 그런데 이 전환 배치를 계기로 노조 결성 계획을 본격화했다.

초동 주체들이 옥계동 무보까 국밥집’, ‘케이이씨(KEC) 신사에 드나들면서 간담회를 이어나갔다. 공장 안에는 노조 결성에 관한 소문이 파다하게 번져나갔다. 차헌호는 공장으로 들어가는 차 트렁크에 몸을 숨기고 현장으로 들어갔고 2015529, 50여 명이 모여 있던 현장 휴게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노동조합을 설립합니다.” 노조가입서가 사람들 사이에 돌았고 그다음 날, 또 그다음 날로 이어져 2주 만에 지티에스 노동자 178명 중 138명이 노조에 가입했다. 설립신고증이 나왔다. 노동자들은 회사 앞에서 교대 근무를 마치고 퇴근할 때마다 약식 집회를 이어나갔고 노동조합 만들어서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외쳤다. 조합원들은 자신감을 얻었고 그 힘으로 생산 물량을 통제하기도 했고, ‘단결투쟁이라고 적힌 머리띠를 묶고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똑같은 작업복을 입고 일할 때는 남이었거든요. 하지만 머리띠를 매자 더는 남이 아니었어요.”(101, 안진석)

  

노조 결성 한 달 후, 노동자들이 모처럼 쉬는 날을 맞아 조합원 단합대회를 열기로 한 날, 지티에스 178명의 노동자에게 집단 해고 통보 문자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다음날부터 경찰과 용역깡패가 공장 문 앞을 가로막았고 노동자들은 농성 천막을 쳤다. 회사는 희망퇴직을 받았다. 마냥 싸울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노동자들이 공장을 떠났다. 희망퇴직 신청서를 작성하지 않고 위로금도 받지 않겠다고 버틴 노동자들은 2015831일자로 해고됐다. 공장 앞 천막 농성장에는 48명이 남았다. 그 뒤 2차 희망퇴직을 신청한 사람들이 떠났고 23명이 남았다. 지티에스는 9월에 폐업 신고를 했다. 9년 투쟁의 시작이었다. 노동자들이 외치는 구호도 바뀌었다. “민주노조 사수하고 현장으로 돌아가자” 2차 희망퇴직 후 139명의 조합원 중 23명이 남았다.

   

9년 동안 노동자들은 공장 앞, 구미시청 앞, 검찰청 앞에 농성 천막을 치고 싸웠다. 김앤장 법률사무소와도 싸웠다. 서울 광화문 앞 광고탑에도 올랐다. 투쟁사업장 동지들과 함께 전국 순회 연대도 다녔다. 영동 유성기업,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투쟁 현장, 부산 만덕동 재개발 지역, 부산교육청, 부산 생탁 노조 투쟁 현장, 금속노조 창원 한국산연지회, 대구 경북대병원 청소 경비 시설 노동자들 투쟁 현장, 충남 아산 갑을오토텍지회 그리고 성수 사드 반대투쟁 현장, 김용균 열사가 목숨을 잃은 태안화력 등 연대가 필요한 곳들을 찾았다.

20212월과 3, 아사히글라스 측이 만남을 요청했다. 투쟁을 시작한 지 6년 만이었다. 서울에서 아사히글라스 회사 측 변호사와 아사히글라스 구미 공장 대표 김재근 이사 등이 나와 제안했다. 투쟁하고 있는 지회 조합원들을 모두 정규직으로 고용하고 1인당 9,200만 원을 지급하겠으며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에 발전 기금을 내겠다는 것이었다. , 차헌호 지회장은 고용이 어려우며 대신 위로금으로 34천만 원을 주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전원 복직이 아니면 회사 안을 받을 수 없다고 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어요.”(179)

  

아사히지회 투쟁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 중 하나였다. 함께 회의하고 논의해서 거부를 결정했다. 누구도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생계의 벽 앞에서 아사히 노동자들은 동지를 선택했고 기꺼이 노동자의 자존심을 선택한 것이다.

결국 노동자들은 3,321일을 거리에서 투쟁한 끝에 승리했다. 2024711일 대법원 근로자 지위 확인, 파견법 위반 소송에서 승소한 것이다. 아사히글라스 전 대표는 국내 최초 불법파견죄로 징역형이 선고됐다. 22명의 노동자는 아사히글라스에 정규직으로 고용됐다. 이제 비정규직을 떼어내고 금속노조 아사히글라스지회가 된 이 소수 노조는 750여 명의 아사히글라스 노동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받고 있다. 비록 회사 내에는 400여 명 규모의 어용노조가 있지만 말이다. 750여 명의 회사 안에서 22명의 단련된 인간들의 등장이 어떤 파열구를 낼 수 있을지 자못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인간이 태어나는 길은 교육과 운동밖에 없는데, 바로 그 시간을 오롯이 보낸 이들이 바로 이 아사히 노동자들이기 때문이다.

   

아사히 투쟁의 연대는 우리가 다른 사업장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사실 우리 자신을 단련시키고 변화시키는 하나의 중요한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255, 차헌호)

 

파치, 노동자 투쟁을 기록하는 하나의 방법

 

처음엔 이 책에 대한 본격 독후감을 써보려 했지만 정말 모범적인 독후감 한 편을 읽고서 그 의지가 한풀 꺾였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에서 매달 펴내는 소식지 <질라라비> 202512월호에 실린 글인데 최효 공공운수노조 쿠팡물류센터지회 사무장이 썼다. 그는 투쟁하는 노동조합 간부인 만큼 쿠팡에서의 노조 조직, 투쟁 경험을 반추하면서 아사히지회의 10년 투쟁 기록을 읽는 독법이 돋보였다. 최효 사무장이 아사히지회를 보면서 역시 노조는 기세다라는 생각을 했다는데 이 기세의 기원을 궁금해하면서 역시 기세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사히비정규직지회 투쟁의 생생한 회고를 마치 노조 투쟁의 안내서처럼 읽어낸다. 그래서 본격 독후감은 최효 사무장의 글에 양보한다.

이 글에서는 이 책을 읽으면서 좀 독특했던 점들을 요약하는 것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파치>의 독특한 점 중 하나는 책이 장과 절로 조직되지 않고 20개의 꼭지, 그리고 앞뒤로 들어가는 글나가는 글이 붙어 총 22개의 꼭지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대체로 시간순을 따르기는 하지만 그 9년의 세월을 비슷한 길이로 묶어내 국면을 나누고 기승전결 식으로 이어지도록 조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비슷한 시기, 비슷한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뭉뚱그리는 방식을 택했다. 어찌 보면 9년 투쟁은 이 책 분량으로 묶어내기에는 지난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 모든 집회, 농성, 회의, 기자회견, 사건, 일정을 모두 일목요연하게 담기에 이 책의 갈피는 부족하다. 그래서 저자는 신문 기사 같은 사실을 쫓기보다는 22명 주체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데 주력한다. ‘사실의 역사보다는 그 사실 앞에 선 주체들의 감정, 생각, 의지, 회의, 의심, 확신, 슬픔의 역사를 담아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문단마다 이어지는 주체의 목소리는 따옴표 안에 갇히지 않고 꽤 울림 있게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파치>는 저자가 글의 배면에 있지 않고 글 안에 노동자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저자는 책의 초입부터 들어가는 글을 통해 옥수수 두 자루를 들고 아사히비정규직지회와 연을 맺었던 당시를 회고한다. 그리고 어떤 마음과 과정을 통해 이들과 엮였는지, 그리고서 아사히 동지들이 직접 쓴 글을 모아 2017년에 <들꽃, 공단에 피다>라는 책을 펴내게 됐는지를 밝힌다. 그리고 중간중간에도 자신이 만난 아사히 노동자들에 관한 느낌을 말한다. 또 책의 말미에서는 아사히 노동자들을 다룬 영상을 만들어보겠다는 개인적 다짐이 덧붙여지기도 한다. 굳이 말하자면 전지적 시점이 아니라 ‘1인칭 시점인 셈인데 그런 점에서는 에세이를 닮아 있다. 바로 이같은 강점이 독자로 하여금 아사히 노동자들에게 더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해준다.

아사히 조합원들과 오랜 시간 함께한 저자의 시간이 허투루 보낸 시간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책 곳곳에서 배어 나온다. 조합원들에 대한 저자의 애정은 조합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헌사를 바친 오수일 사무국장의 말과 닮아 있다.

   

우리 관계는 가벼운 관계가 아니다, 그리고 굉장히 잘해야 하는 관계다 싶더라고요.” (165, 오수일)

  

오랜 시간 곁에서 아사히 노동자들을 지켜본 이가 썼기 때문에 더 내밀한 마음이 잘 담겨지지 않았을까 싶다. 거센 언어, 거친 구호 뒤에 숨겨진 투쟁의 속살, 그러니까 우리 안의 나약함, 고민, 주저하거나 타협하고픈 심정, 믿음보다 앞선 의심, 미움, 포기하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 말이다. 저자가 옮긴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유리처럼 투명하고 그래서 더욱 사실적이다.

아사히 노동자가 겪었던 일들은 유성기업, 스타케미칼, 발레오전장, 쌍용차, 세종호텔수많은 노동자도 겪었던 일들이기도 하다. 거리 농성, 폭력 경찰과의 실랑이, 고공 농성, 교섭 자리에 나오지 않는 사측, 손 놓고 있는 노동부, 시간을 끌다가 불기소 처분으로 자본에 면죄부를 주는 검찰, 다시 기소하기까지 하냥저냥 시간만 끄는 검찰과 이상무시한 정신의 소유자인 판사 집단. 저마다 겪었지만 똑같이 닮아 있는 공통 경험이다.

   

그렇다. 노동자들의 경험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밤 깊은 농성장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나직하게 읊조리는 노랫소리라든가 집집마다 벌어지는 갈등과 눈물, 사랑과 위로, 믿음과 응원들. 그리고 또 전국 팔도에서 만나는 연대의 손길과 노동자들끼리의 굳센 단결력, 무슨 일이 있다 치면 손발 걷어붙이고 달려오는 동지들. 그 닮아 있는 경험은 너의 경험이 내 것이 되고 내 경험이 네 것이 되는 집단적 얽힘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 시간을 거쳐 새로운 인간이 태어난다. 자본은 이들을 쓰다 버릴 파치로 보았겠지만, 정작 9년의 세월 동안 이들은 다른 것을 파, 깨나갔다. 자본에 종속된 굴종감, 보아도 보지 못한 척 외면해 버리는 비겁함, 시키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노예 의식 같은 것들 말이다. 우리 운동이 만들어낸 새로운 인간들은 오늘도 체제를 깨나가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파치>는 그 운동의 또 하나의 안내서로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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