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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내레터

[그때 그사람들] 사회운동을 통일하려고 했던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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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239회 작성일 25-09-02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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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세연과 양명



나영선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1927116일 사직공원

 

사직공원은 조선의 주요국가 시설이었던 사직단을 일제가 1924년에 공원으로 조성한 곳이다. 사직단은 소위 종묘사직의 사직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토지를 관장하는 신을 뜻하는 와 곡식을 담당하는 신인 을 부르는 용어이다. 조선에서 임금은 종묘에 제사는 거르는 한이 있어도 사직단에 제사는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즉 국가의 물적 기반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에서 이토록 중요한 시설인 사직단은 전국에 걸쳐 조성되었는데 일제에 강점된 이듬해인 19112월에 경성을 시작으로 폐지가 결정되었다. 폐지 결정 이후 사직단에 봉안된 위패는 태웠으며, 3월에는 사직단에 있는 건물들을 분해하여 공매하였다. 이렇게 훼손된 사직단은 해방이 된 이후에도 복원되지 않았고 오히려 부지는 축소되어 옛 흔적은 온전히 찾기 힘들게 되었다. 지금 남아있는 사직단은 그 일부만 남아있고, 일부 복원을 계획하고 있는 형편이다.

1927116일 이 사직공원에 산책을 나와 한담을 나누는 것처럼 보이는 두 사내가 만났다. 그들은 양명과 김세연이었다. 이 둘은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긴급한 현안을 가지고 만났다. 그 현안이란 다름 아닌 중앙지도부의 조직과 관련한 것이었다.

 

양명은 1924년 북경에서 조직된 혁명사를 이끈 주요 이론가로서 명성을 높였다. 그는 19258월 귀국하여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고, 기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19263월 사회운동의 통일을 목표로 한 레닌주의 동맹의 (LL- Leninist League) 결성에 북경의 혁명사, 동경의 일월회, 서울신파와 함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당내에서는 선전부 부원, 고려공청의 책임비서, 레닌주의 동맹의 중앙을 맡다가, 192711월 안광천에게 당무를 인수한 김준연으로부터 후계당 조직권한을 위임받은 이였다. 이런 임무를 맡은 그가 만난 김세연은 후계당을 조직하여야 하는 임무를 맡겨야 하는 사람이었다. 김세연은 1920년 일본 유학이후 1925년 일본에서 결성된 일월회의 주요조직가 가운데 한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19266월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검거 이후 8개월간 구금상태에 있었으며 취조과정의 고문으로 인하여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 중이었지만 조직의 요청을 받아 19279월 당의 조직부원으로 활동 중이었다.

 

지난해인 1926126일 제2차 당 대회를 엄혹한 조건에서 성공리에 성사시킨 조선공산당은 안광천 책임비서 시기에 은 눈부신 성과들을 내고 있었다. 강달영 책임비서 시절부터 모색해오던 사회주의자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의 통일전선 기관의 위상을 가진 신간회와 근우회를 당이 전력을 다해서 건설하였고, 조선노농총동맹을 해산하고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별 정립하여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차이 속에서 발전할 수 있도록 조직정비를 갖추었다. 서울파의 내부 비밀결사인 고려공산동맹의 표면단체인 전진회가 제기한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상설, 비상설 논쟁에서도 당의 입장인 비상설을 대중적으로 관철했다. 이때를 가리켜 한 사회주의자는 당이 대중 속에서 활동하던 때라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성공의 배경에는 앞선 시기에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을 양분하였다고 평가받는 화요파의 위축과 서울파의 조직적 입당이 있었다.

 

화요파는 19254월 조선공산당 창당의 주축세력이었다. 이들은 192512월 검거사건과 19266.10만세 투쟁의 결과로 다수의 조직원이 체포되고 일부는 망명하면서 심각한 조직력의 훼손은 맞게 되어 당내 소수파의 지위로 전락하였다.

 

한편,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을 양분하였던 고려공산동맹의 위축에는 1926년 상반기 조선공산당에 대한 코민테른의 승인과 8월 조선공산당의 고려공산청년회와 서울파의 공청조직인 고려공산청년동맹의 전격적 통합을 시작으로 192611월과 19273월에 기존 서울파로 분류되던 사회주의 그룹이 대거 당에 입당이 결정적이었다. 이는 분열에서 통일로!’를 내세운 안광천 중앙의 정치적 노력이 가장 주효하였다. 이 영향은 과거 자신이 어느 정파에 소속되었는가를 가리지 않고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본다면 멀리 모스크바에 소재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재학중인 과거 화요파에 소속된 보스토코프’ (동방노력자 대학 재학생은 대부분 가명을 사용한다.)는 레닌주의 동맹의 적극적인 지지자이며 과거 조선 혁명운동에 적극적 참여자라는 동방노령자대학 측의 평가가 있다. (러시아 문서보관소 자료집 1. 한울 114) 분파주의의 문제는 30년대에 들어서 당 운동을 평가한 당사자들마저도 20년대 사회주의 운동의 여러 약점 중 하나를 분파주의로 지목하기를 저어하지 않았다. 이는 정파를 가리지 않고 지적되는 사항이었다. 따라서 2차 당 대회를 통해 당의 주도권을 장악했던 ‘LL의 이런 구호는 강한 호소력을 가졌다.

 

하지만 이러한 성취의 뒤로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밖으로는 일경의 집요한 추적이 있었고 안으로는 당규율과 노선을 두고 견해차가 심화하기 시작하였다.

일경은 192612월 당 대회의 존재를 최소한 1927년 하반기까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일경은 존재할 수도 있는 후계당과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10월 소련에 있던 김영만이 귀국하여 체포되었고 당의 중앙집행위원인 권태석 등이 검거되었다. 이 사건은 다행히 더 퍼지지 않았지만 긴장하기에 충분하였다. 더구나 12월 소련에서 잠입한 박응칠을 체포하여 일경은 후계당의 존재를 인식하고 집요한 추적을 시작했다.

 

조선공산당 내부의 문제는 조금 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당 전체로서는 소수파이지만 당권을 쥐고 있는 당 중앙집행위원회의 다수파를 점하고 있는 LL당과 나머지 중앙집행위원 간의 갈등이었다. 갈등의 초점은 두 가지였다. 당시 운동 사회에서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두 가지 즉, 지방열로 표현되는 지역주의 조장과 당내 분파구성의 문제가 그것이었다. 당중앙집행위원회의 다수파인 레닌주의동맹은 이 두 가지 모두 강력한 비판을 받게 된다.

 

영남친목회 사건으로 알려진 지방열 문제는 당의 책임비서였던 안광천이 그에 깊숙이 관여되었다는게 확인이 되었고 심지어 영남친목회는 친일파와 사회운동 인사들이 뒤섞인 그 성격이 모호한 단체였다. 이 문제는 단순히 당내에 국한된 문제만이 아니라 당시 대표적 대중조직단체인 조선청년총동맹, 조선농민총동맹, 조선노동총동맹에서 대중적 비판이 터져나왔다.

 

영남친목회보다 더 심각했던 것은 당내당의 존재 역할을 하는 LL당이 존재였다. 이것은 명백한 분파행위였다. 이 문제는 당시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지휘하는 코민테른에서도 강력하게 금지하고 있는 사항이었다. 원래 혁명 러시아에서 분파의 존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1921년 소련공산당의 10차 당 대회에서 결정한 사항이었다. 당시의 결정은 이 문제는 내전에 승리하며 전시공산주의 체제를 수습하며, 소련공산당 내부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일시적 방편에 가까운 것이었다. 당시 소련공산당은 분파금지의 대안으로 민주집중제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위기 속에서 안광천 지도부는 진퇴를 결정하여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당 중앙집행위원회 중지를 모은게 아니라 자신들의 그룹인 레닌주의 동맹의 내부 결정에 따라 대처하였다. , 책임비서의 교체가 그것이었다. 안광천은 19279월경 당시 선전부 책임자였던 김준연에게 책임비서직을 인계한다. 김준연은 책임비서직을 불과 2개월도 채 수행하지 않고 일경이 당의 인적구성을 알고 있다라며 중앙집행위의 총사퇴를 제안하고 사후 새로운 중앙의 구성을 양명에게 위임하였다.

 

이러한 사정이 116일 사직공원에서 양명과 김세연의 만남의 배경이었다.

 

고문의 여독에서 회복되지 않은 김세연은 자신이 소속된 레닌주의 동맹의 결정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양명과 논의하여 새로운 중앙을 구성하였다. 5인으로 구성된 중앙은 책임비서 김세연, 양명, 김영식, 최창익, 최익한이었다. 이는 기존 김철수 책임비서가 제2차 당 대회 이후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할 때 당 내부의 다양한 세력분포를 살핀 안배와는 전혀 다른 레닌주의 동맹 일색의 구성이었다. 이 결정은 당내 분열을 가속하는 결정이었다. 분립에서 통일을 이루려고 했던 그들의 결의와 다른 행보를 하고 있었다.



 

[참고자료 및 논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front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aver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https://nl.go.kr/newspaper/

김영진: 1927년 하반기 식민지 정치운동 논쟁역사연구 42

박종린: 1920년대 통일조선공산당의 결성과정한국사연구 102,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과 일월회한국근현대사연구 제40

윤덕영: 조선중앙사회단체협의회 논쟁과 합법운동론역사와 현실 118

윤효정: 신간회의 창립 과정 연구 조선공산당의 활동을 중심으로민족문화연구 75

이준식: 조선공산당 성립과 활동한국독립운동의역사 43

임경석: 1927년 조선공산당의 분열과 그 성격사림 제61, 1927년 영남친목회 반대운동 연구인문과학 제68,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상설 비상설 논쟁역사비평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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