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슬러보면] 비루했던 ‘사회적 합의주의’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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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98년 2월 6일 오전 노사정 합의문 타결 발표 후의 노사정위원들. 왼쪽부터 한광옥 위원장, 김창성 경총 회장, 박인상 한국노총 위원장,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 배석범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 정세균 상임위원.
이황미(노동자역사 한내 기획국장)
민주노총이 9월 3일 중앙위원회에서 ‘국회 사회적 대화’ 참여를 결정했다. 민주노총은 보도자료에서 “1999년 외환위기 당시 노사정위원회에서 탈퇴한 이후 처음”이라고 했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권 시기에도 형식만 달랐을 뿐 사회적 합의 구도에 참여해 왔다.
정리해고·근로자파견제 합의
1996년 김영삼 정권 시기 민주노총은 노사정 합의 기구인 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 참가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이 철폐를 요구해 온 △복수노조 금지 △제3자개입 금지 △공무원·교사 단결금지 △공익사업 직권중재 등 악법 조항들은 자본과 정권이 시도해 온 △정리해고 요건 완화 △변형근로시간제 도입 △휴업수당 하향 조정 △생리휴가 무급화 △근로자파견법 도입 등과 맞바꿀 대상으로 전락했다. 노개위 논의를 거친 정권은 1996년 12월에 노동법 개악을 날치기로 처리했다. 민주노총이 역사적 총파업으로 노동법 재개정을 끌어냈지만, 정치권이 주도하며 날치기법의 악법 조항은 대부분 유지됐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상황에서 자본과 정권은 ‘경제살리기’를 추진하며 노사정 3자 합의를 제시했고, 민주노총도 호응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은 노사정위원회를 활용해 IMF와 초국적 자본과 국내 재벌의 요구를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 구조조정과 노동시장유연화를 신속하게 밀어붙였다. 1998년 2월 6일 민주노총 등 노동계도 참여한 노사정위원회는 정리해고제 시행과 근로자파견제 도입에 합의했다. 그해 곧바로 현대자동차와 만도기계를 시작으로 노동 현장에 전방위적인 정리해고가 몰아닥쳤다.
노동시간 단축 결과는 여성·중소·영세사업장 노동조건 저하
20세기 한국은 압도적인 장시간 노동 국가로 오명을 떨쳤다. 2000년 1월 민주노총은 “2000년엔 연 노동시간 2000시간으로”를 구호로 ‘40시간제(주5일제) 쟁취’ 투쟁을 결정했다.
‘2000년부터 노동시간 단축’을 논의하기로 한 노사정위원회 합의를 마냥 무시할 수 없었던 김대중 정권은 ‘노동시간 단축’을 자본이 요구하는 ‘임금삭감·노동시간유연화’와 맞바꾸는 사회적 협상 구도를 들고나왔다.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노동시간 단축 투쟁’은 ‘노동조건 개악 저지 투쟁’이 돼버렸다. 2002년 9월 정권은 △주휴·생리휴가 무급화 △초과근로시간 상한선 3년간 4시간 연장 △탄력근로시간 시행 단위 1개월에서 3개월 확대 등 자본의 의견을 대폭 수용한 정부안을 발표했다.
2003년 노무현 정권이 출범하자 민주노총은 ‘노동조건 개악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했다. 4월 16일부터 국회 환노위에서 노사정 3자 협상을 시작했으나 사용자단체가 정부안보다 더 개악된 안을 주장해 6월 2일 최종 결렬됐다. 이 과정에서 정권은 노사 간의 합의를 주장할 뿐 김대중 정부가 국회에 올렸던 개악안을 개선할 의지는 없었다. 결국 8월 21일 환노위는 기존 정부안에서 실시 시기를 1년씩 순연시킨 안을 의결했고 본회의까지 통과했다. 노동자들이 끈질기게 이어온 노동시간 단축 투쟁의 결과는 노사정 3자 협상 구도에서 여성·중소·영세사업장 노동조건 저하와 노동시간 유연화로 끝났다.
3자 구도에서 3:1로 몰려 비정규법 개악
2004년 민주노동당이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위한 노동4법 개정안’을 발의한 가운데 비정규법 개정 투쟁이 확산했다. 노무현 정권은 자본의 주장을 수용해 파견 업종과 기간 확대, 기간제 사용기간 확대 등 비정규법 개악을 추진했다. 민주노총은 9월 대의원대회에서 만장일치로 총파업을 결의했지만, 11월 2일 국무회의에서 비정규법 개악안이 의결됐다.
2005년 들어 3차례의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거듭 노사정위원회 참가가 무산되자, 이수호 집행부는 3월에 중집 결정으로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비정규법을 협상하기로 했다. 그러나 비정규법 개악안이 이미 국회에 상정됐으므로 자본과 정권으로서는 노사정 3자 기구에서 협상할 필요가 없었다. 두 노총은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비정규법 논의를 요구하고, 정부·여당은 대화를 거부하는 모양새가 되자 노무현은 3월 24일 국무회의에서 노사정 타협을 주문했다. 3월 30일 환노위원장은 비정규법 관련한 국회 노사정대표자 대화는 하되, 합의 여부와 관계없이 4월 국회에서 정부안을 처리한다고 발표했다.
노사정 논의를 거쳤다는 절차적 요건을 확보하자 정권은 신속하게 비정규법 국회 처리를 시작했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이 법안 처리를 막아서며 노정 간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민주노총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이 배임수재 혐의로 긴급 체포됨으로써 이수호 집행부가 총사퇴했다. 민주노총이 불참한 가운데 국회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열렸고, 11월 30일 한국노총은 기간제 사용기간 제한과 불법파견 고용의제 조항 포기에 동의했다. 노사정 3자 기구에서 재연된 한국노총의 배신으로 민주노총은 2:1 구도에서 3:1 구도로 몰렸다. 2006년에도 법안이 공전하자 국회는 11월 30일 본회의에서 의장 직권 상정으로 찬반 토론을 생략한 채 비정규직 관련 3개 악법을 통과시켜버렸다.
노사정대표자회의 들락거리다 노동3권 후퇴
정부는 2003년 노사정위원회에 그동안 자본이 주장해 온 ‘사용자 대항권’ 내용을 담은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노사관계 로드맵)을 보고했다. 2004년 비정규법 문제로 노정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2005년 7월 한국노총까지 노사정위원회에서 탈퇴함으로써 노사관계 로드맵 문제는 2006년으로 넘어갔다.
2006년 5월, 정부는 노사관계 로드맵을 6월 말까지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논의해 9월 정기국회에서 입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민주노총은 노사정 3자 기구에 다시 들어갔다. 노사정 간 견해가 팽팽하게 대립하며 논의시한이 늘어난 가운데 9월 1일 경제 5단체회의와 한국노총이 합의하자 9월 5일 민주노총은 합의안을 거부하고 노사정대표자회의 불참을 선언했으나 다음 날 산별대표자회의에서 다시 참가를 결정했다. 민주노총의 8대 요구를 쟁점화하기 위해 노사정대표자회의 참가 전술을 활용한다는 취지였으나 투쟁은 힘을 잃었고 노사정대표자회의 참가에 관한 지리한 공방만 오갔다. 9월 11일 노사정대표자회의를 앞두고 한국노총은 ‘협상 결렬 시 위원장 단식투쟁과 총파업 돌입’을 선포하며 타결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노·경총 야합 악법 조항 관철이 예견되는 노사정대표자회의 하루 전날 민주노총 위원장은 한미FTA 협상 저지를 이유로 미국으로 떠났다.
결국 9월 11일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노조 전임자임금 지급금지, 복수노조 허용 2009년 12월 말까지 3년 유예 △부당해고 판정 시 복직 대신 금전 보상 허용 △부당해고 벌칙조항 삭제 △노동위원회의 구제명령 불이행 시 처벌 완화 △경영상 해고 시 사전 통보 기간 30∼60일로 축소 △필수공익사업 직권중재 폐지하되 필수업무유지제 도입과 대체근로 허용 등에 합의했다. 손배·가압류 금지를 비롯한 민주노총의 8대 핵심 요구는 포함되지 않았다.
노사관계 로드맵 중 3년 유예된 노조 전임자임금과 기업 단위 복수노조 문제는 이명박 정권 시기인 2009년 10월부터 국회 노사정대표자회의 논의를 시작했다. 민주노총은 다시 참가해 한국노총과 연대 총파업 배수진을 치고 대응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한국노총의 입장 선회로 12월 4일 민주노총을 제외한 노사정 3자가 △복수노조 2년 6개월 유예 △2010년 7월부터 타임오프제 적용에 합의했다. ‘교섭창구 강제적 단일화’까지 포함한 수정안(추미애법)이 2010년 1월 1일 새벽 본회의를 통과함에 따라 이때부터 ‘노조파괴’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노사정 협약 강행으로 조직 분열과 지도력 약화
촛불정부를 자임한 문재인 정권도 ‘사회적 대화’를 제안했다. 민주노총 김명환 집행부가 참가를 결정, 2018년 1월 31일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 재편 논의를 위한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출범했다. 6월 12일 제정된 경제사회노동위원회법으로 민주노총의 대표성이 약화하자 민주노총은 불참했다.
11월 22일 출범한 경사노위는 첫 회의에서 노동시간제도개선위원회를 신설해 탄력근로제를 다루기로 했다. 2019년 1월 문재인 대통령이 양대노총 위원장과 면담하며 경사노위 적극 참여를 당부했다. 여당인 민주당은 1월 말까지 경사노위에서 합의하지 못하면 2월 임시국회에서 강행 처리하겠다고 협박했다. 1월 29일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에 다시 경사노위 참가 건을 부쳤으나 부결됐다.
2020년 3월 6일 경사노위가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선언’을 발표했다. 3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이 두 노총 위원장, 문성현 경사노위 위원장이 참여한 오찬 회동에서 사회적 대화를 요청했다. 4월 17일 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이 코로나19 위기 극복과 취약계층 노동자를 위한 ‘원 포인트’ 사회적 대화를 제안했다. 논의를 이어가 7월 1일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노사정 대표자 협약식’을 몇 시간 앞둔 오전 7시 민주노총 중집에서 참석자들은 △근로단축·휴업·휴직 시 노동계 협력 △휴업수당 감액신청 신속 승인제도 등 4대 독소조항을 근거로 반대했고, 민주노총 불참 통보로 조인식은 연기됐다. 7월 2일 김명환 위원장이 직권으로 소집한 온라인 임시대의원대회에서도 노사정 합의안은 부결됐다. 다음 날 민주노총 지도부는 사퇴했고, 7월 28일 경사노위는 노사정 협약식을 했다.
노사정 사회적 합의주의 역사의 교훈
민주노총은 출범과 함께 정리해고·파견근로 반대, 노동시간 단축, 비정규직 철폐, 노동3권 쟁취 등 노동자계급의 주요한 제도개선 투쟁을 전개해 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1996년부터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노사정 사회적 합의 구도의 수렁에 빠져 관련 법안들이 개악돼온 게 현실이다.
역대 민주당 정권은 선거에서 공약한 노동 개혁을 파기할 때 ‘노사정 합의 실패’를 핑계로 삼았다. 자본을 위한 노동개악을 관철할 때는 노사정 3자 구도에서 자본과 손잡고 밀어붙였다. 민주당 정권에서 노사정 3자 구도는 일종의 ‘꽃놀이패’였다. 바로 그 3자 구도에서 정리해고제, 파견제, 대체근로, 무노동무임금, 전임자임금,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등 주요한 노동 의제에 자본과 정권의 의도가 관철됐다. 노사정 사회적 합의 구도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현하는 유력한 수단으로 활용됐을 뿐이다.
당 대표 시절 “민주당은 원래 중도·보수정당”이라고 토설했던 이재명 정부에서 민주노총 집행부가 참가하기로 한 ‘사회적 대화’가 민주노총의 표현대로 “노동권 확대를 열어가기 위한 출발점”이 될지 ‘수렁’이 될지, 역사를 돌이켜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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