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노동운동] 1991년 ‘일 더 하기’에 죽어간 권미경 열사
페이지 정보

본문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
이황미 (노동자역사 한내 기획국장)
노동자 권미경이 회사 옥상에서 떨어졌다.
1991년 12월 6일 오후 4시 10분경, 부산에 있는 신발 제조업체인 ㈜대봉 생산직 노동자 권미경이 이 회사 3층 옥상 30m 높이에서 지하식당 앞 공터로 떨어져 숨진 채 발견됐다.
권미경은 곧바로 고신의료원으로 옮겨졌으나 응급실에 도착한 오후 4시 24분경에는 이미 숨진 상태였다. 사체 검안 결과가 나오며, 타살 혐의 없다는 결론이 났다.
권미경 열사의 시신 왼쪽 팔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나를 이 차가운 억압의 땅에 묻지 말고
그대들 가슴 깊은 곳에 묻어주오.
그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으리.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더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마라.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기업들의 ‘10% 더하기 운동’
1991년 노동시간을 늘리기 위한 자본의 공세가 노골적으로 전개됐다. 바로 ‘5대 더 하기 운동’이다. 11월 22일 대한상공회의소,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협동중앙회,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5개 경제단체가 ‘기업체 10% 더 하기 운동(5대 더하기 운동)’ 추진요령을 발표했다.
핵심 기조는 “급변하는 대내외 여건하에서 기업 경영상의 어려움이 가중됐고, 1991년의 경제 상황 역시 개선될 조짐이 없는 상태에서 경제 분위기 재건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경제위기를 발전적으로 극복한다”는 것이다. 목표는 “10% 절약 더 하기, 10% 저축 더 하기, 10% 생산성 더 제고하기, 10% 수출 더 증대하기, 자발적으로 일 더 하기”였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실천적 과제로 △10% 소비 절약 △10% 저축 △10% 생산성 향상 △10% 수출 더하기 △자발적으로 일 더 하기(10분 전 출근, 20분 후 퇴근)가 제시됐다.
‘5대 더하기 운동’은 11월 경제단체가 추진하면서 본격화됐지만, 사실 이전부터 준비된 것이다. 1991년 8월 말부터 정부와 관변단체들이 “이제는 소비를 자제할 때”라며 ‘과소비 추방 운동’을 벌였다. 10월 7일부터는 2단계로 ‘새 생활 새 질서 운동’을 추진했고, 11월 22일에 5개 경제단체와 상공부가 ‘5대 더하기 운동 전진대회’를 연 것이다.
이날 대한상공회의소 김상하 회장은 “우리 주변을 살펴볼 때 분수에 넘치는 과소비 행태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산현장에서도 가능하면 일을 적게 하고 또 적당히 하려는 풍조가 만연된 실정”이라며 “우리의 자세를 다시 한번 새롭게 가다듬고 산업계에 근검절약하고 제대로 일하는 풍토를 뿌리내리게 해 명실상부한 국민적 실천운동으로 정착시키자”고 했다. 서울시는 공무원이 앞장서서 이 운동을 확산하자며 이날부터 퇴근 시간을 30분 늦추고, 아예 퇴근 차량을 30분 늦게 출발하도록 지시했다. 12월 11일에는 서울 구로동 한국수출산업공단 연수원 강당에서 박용도 상공부 차관과 최종호 공단 이사장이 참석해 ‘기업체 5대 더하기 운동 전진대회’를 열었다.
1987년 이전으로 노동조건 되돌리려는 술수
기업들의 전진대회가 열리던 시각, 이에 맞서 공단본부 정문 앞에는 구로공단 노조협의회, 금속노련 서울본부,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구로지구 등의 대표자들이 모여 “경제난국 책임 전가 전시행정 중단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항의·침묵시위를 벌였다.(사진) 나우정밀노조의 한 간부는 “국민 전체를 경제위기의 주범인 양 몰아붙이는 이데올로기 공세며 더 나아가 노동자의 생존권 투쟁 그 자체가 경제위기를 조성하는 것으로 몰아붙여 국민과 노동자의 투쟁을 이간질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우자동차노조 간부는 “1987년 여름 노동자 대투쟁 이전으로 노동조건을 되돌리려는 노동 통제 정책”이라고 거세게 비난하며 “1987년 이전에나 가능했던 이야기인데, 노조가 없거나 어용노조가 있는 사업장은 최근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타고 30분 일 더 하기 운동을 강행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노동자들의 대응이 본격화되자 정부와 자본은 언론을 동원한 이데올로기 공세를 대대적으로 퍼부었다. ‘5대 더하기 운동’은 노동자들에게 강제작업, 노동조건 약화, 노조 활동 위축 등으로 작용했다. 화장실에 몇 번 가는지, 작업장을 이탈한 시간이 얼마인지를 관리자가 일일이 기록하는 사업장도 있었고 ‘바코드 제도’를 도입해 통제하려다 노조의 반대로 보류한 사업장도 있었다. 노동자에 대한 강제노동과 감시가 가장 심했던 부산지역의 신발업계 공장들에서도 이 운동은 노조의 적극적인 지지와 결합 속에 진행했다.
그러나 정부와 자본의 공세 속에서도 노동자들의 투쟁은 계속됐다. 1991년 11월 4일부터 ‘시간외 노동’에 대한 수당 지급 등을 요구하며 정시 출퇴근투쟁 등 업무시간 정상화 운동을 전개해 온 은행들이 투쟁을 이어가 1991년 11월 25일에는 시중은행, 12월 5일에는 국책은행에서 ‘시간 외 수당 지급’을 쟁취하기도 했다.
㈜대봉의 ‘30분 일 더하기 운동’
정권과 자본의 산업구조조정 정책이 실패하면서 1991년 하반기부터 부산지역의 많은 신발 제조업체가 도산하거나 도산 위기에 놓였다. 신발업계의 경영위기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막대한 이윤을 챙긴 기업주들이 기술이나 신제품 개발 등에는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사업주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하기 위해 이른바 ‘애사운동’을 전개했다. ㈜삼화의 ‘10분 일 더 하기 운동’, ㈜진양의 ‘불황극복 50일 작전’, 대신교역㈜의 ‘3무 운동(무불량·무이탈·무미달)’, ㈜세신의 ‘무임금 1시간 일 더 하기 운동’ 등으로 이름만 바꾼 노동 착취가 극에 달했다.
㈜대봉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봉은 아디다스 등의 신발을 만들어 수출과 내수를 겸하고 있는, 전체 사원 3,500명 규모의 대규모 수출 업체였다. 이 회사는 작업 강도를 높이기 위해 ‘30분 일 더 하기 운동’을 따라 했다. 1991년 11월 1일부터 노동조합의 협조하에 전체 사원이 ‘원가절감, 결근 방지’라는 깃을 달고 작업했다. 목표량 달성을 위해 노동자들의 작업 강도는 점점 거세졌다.
12월 들어서 목표량 달성을 촉구하는 관리자들의 독촉이 더욱 심해졌다. 현장에서 관리자들이 초시계를 들고 다니면서 윽박질렀다.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훈시와 교육 등으로 통근버스를 타지 못했고, 강제 연장근로도 다반사였다.
“이곳이 바로 지옥 아니냐”
권미경 열사가 사망하기 이틀 전인 12월 4일에는 권미경이 소속된 1계 3조의 노동자들이 목표량을 채우지 못해 작업종료 후 20분 동안 계장의 훈시를 받는 바람에 저녁밥을 먹지 못했다. 이에 한 노동자가 가지고 있던 밀감과 빵을 먹으려다 관리자로부터 “작업시간 중에 이렇게 하니 물량이 나오지 않는 것”이라는 질책을 당했다. 사건 당일인 12월 6일 오전에도 외국 바이어가 권미경이 일하던 라인에 방문해 “불량이 많다”고 조장을 질책했다. 화가 난 조장은 산업체 야간 학교에 다니던 여성 노동자를 심하게 나무랐다. 이를 본 권미경은 주위 동료들에게 “지옥이 따로 있냐, 이곳이 바로 지옥이 아니냐”고 울먹였다.
이날 오후 4시, 10분의 휴식시간 중 권미경이 옥상 베란다에 있는 것을 발견한 회사 안전관리요원 이동근이 “내려오라”고 하며 위로 올라가려 하자 권미경은 곧바로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권미경은 자본과 정권의 살인적인 노동 통제 정책으로 죽음에 이른 것이다.
권미경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공장에 취업해 10년간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도 야간중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계속했다. 가족은 완구공장에 다니시는 홀어머니 박영애(46세)와 노동자인 오빠(26세), 회사원(20세)과 학생(17세)인 동생들, 1남 3녀 중 장녀였다. 어머니는 “당일 아침에도 평일과 다름없이 밝은 모습으로 출근했다”라며 “절대로 자살할 아이가 아니다”라고 호소, 경찰의 자살 추정에 강하게 반발했다. 권미경은 죽기 전날인 12월 5일 일기에도 “바로 내 직장 동료들과 함께하고자 할 때만이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기지 않고 찾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썼다.
노동-자본 간 끝나지 않을 대립 속에 희생
부산지역 11개 민주단체는 즉각 ‘고무노동자 권미경 열사의 진상조사와 사인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대책위)를 구성했다. 대책위는 권 열사의 죽음을 “회사측의 노동강도 강화정책에 맞서 죽음으로 저항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투쟁을 전개했다. ㈜대봉의 원가절감 운동이 경제위기의 원인을 노동자에게 전가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30분 일 더 하기 운동’과 맥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책위는 권미경의 죽음을 전국의 일천만 노동자와 전체 국민에게 알리고, 정권과 자본의 허구적인 ‘일 더 하기 운동’과 함께 이와 맥을 같이 하는 ‘총액임금제·시간제근로 등의 노동법 개악 기도’에 맞서 투쟁했다. 대책위는 12월 7일 낮 12시 ㈜대봉을 항의방문하고 오후 5시에는 고신의료원에서 1차 규탄 집회를 했다. 12월 8일 오후 7시에도 2차 규탄집회를 열고 12월 9일에는 대시민 선전전을 전개했다.
대책위는 정부에 △30분 일 더 하기 운동 식의 노동강도 강화정책 철폐 △총액임금제·시간제근로 등 노동법 개악 음모 중단 △㈜대봉을 비롯한 신발사업장 자본가들은 여성 노동자에 대한 무자비한 노동 착취 중단 △노동부는 일 더 하기 운동을 빙자해 근로기준법 등 노동관계법을 위반한 사업주 엄벌 등을 요구했다.
권미경 열사의 장례는 대책위원회 중심으로 구성된 장례위원회 주도하에 1991년 12월 22일 엄수됐다.
노동자는 생활임금 쟁취, 노동시간 단축을 내걸고 ‘인간다운 생활’을 위해 투쟁해왔다. 해방 직후 전평이 하루 8시간 노동제 쟁취를 내걸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8시간 노동제를 위한 해태제과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 전노협의 주 40시간 쟁취 투쟁, 민주노총의 주5일제 쟁취 투쟁으로 노동자들은 결국 2000년대 법 개정을 이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현장에서 노동시간을 둘러싼 노사 대립은 끊이지 않는다. 최저임금 인상분을 지급하지 않기 위해 자본이 노동시간을 가지고 꼼수를 부리기도 한다. 자본이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는 이상 노동시간을 둘러싼 노동과 자본의 대립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노동과 자본이 대립 속에 희생당한 권미경 열사를 생각한다.
권미경 열사 약력
1969년 전북 장수에서 1남 3녀 중 장녀로 출생
1971년 부산으로 이사
1982년 부산 아미초등학교 졸업
1985년 동주여중(야간) 졸업
1985년 3월~ 대일산업 미싱공
1987년 10월~ ㈜청산(핸드백 제조업)
1989년 1월~ ㈜세원 미싱공
1990년 6월~ ㈜대봉 재봉과
1991년 12월 6일 ㈜대봉에서 의문의 추락으로 사망
[참고자료] 전국노동조합협의회백서발간위원회, 전노협백서 4권 『죽음으로 사수한다! 전노협(1991년)』 (2003)
[사진] <한겨레> 1991년 12월 12일 자.
- 이전글[그곳의 역사]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 23.12.26
- 다음글[문학이 목격한 사회] 갑을고시원 체류기 - 박민규 23.12.1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