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한내레터준비호_역사로 보는 오늘] 다음의 소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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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소희에게
- 학생들은 왜 일터로 떠났나
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 정경원
교육, 산업의 부품이 되어
1949년에 제정된 교육법은 일반고와 직업고를 구분하지 않았다. 1963년 산업교육진흥법이 제정되면서 직업교육을 담당하는 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른바 실업계 고등학교다.
한국의 제조업은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든 저임금 노동자를 기반으로 발전했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그 양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각국의 보호무역, 개발도상국 내에서의 경쟁력 하락으로 이윤이 확보되지 않자 자본은 노동집약적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전환을 시작했다. 이에 문교부는 실업계 고등학교 육성계획을 세워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조응했다. 문교부장관이 전국의 공과대학장협의회, 공업고등학교장협의회 등과 직접 회의를 할 정도였다. 1970년에서 1980년까지 실업계 고등학교 학생 수는 연평균 10.5% 속도로 증가했고 전체 고등학생 중 실업계 고등학교 학생 비율은 1975년에 이르러 42.3%, 1980년에 45%까지 확대되었다.
기업의 이익을 위한 현장실습
학생들의 현장실습도 권장되었다. 산업교육진흥법조차 구체적 교과과정이나 실습제도에 대해 규정하고 있지 않았지만 학생들의 현장실습은 1970년대 이후 꾸준히 이어졌다.
“공업고등학교에 실습 시설이 갖춰지지 않았고 교원이 스스로 현실적인 산업사회에 알맞는 새로운 지식을 갖추지 않아, 이런 환경에서 배출되는 학생들이 현실적인 지식을 갖추기를 바랄 수 없다.”며 학자들이 이론 확인을 위한 최적의 장소가 산업현장이라 주장했다. 또한 “우수한 인재를 찾기보다는 학생들을 우수하게 교육시킬 수 있는 길을 만든 후에 그들을 고용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며 기업의 이익임을 강조했다. (매일경제 1972.10.26.<교육혁명>)
정부는 이를 실현하는 데 적극 나섰다. 1973년 3월 문교부는 서울대와 부산대 공대에 기계 관련 학교를 신설, 신입생을 추가 모집하도록 했다. 이미 학기가 시작된 이후인데 말이다. 그 이유인 즉, 각 대학의 기계공학과는 기계설계사를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기계공학과 출신자들이 실제로 기계를 설계할 수 있으려면 졸업 후 한 분야에서 2년쯤 일을 하고 나서야 가능하니, 기업주들은 불만을 제기했고 “산업체의 즉각적인 요구에 부응”하여 산업체에 현장실습을 할 수 있는 전담부서를 상설토록 권한 것이다. (1973.3.31. 조선일보 <"실습위주"에의 전환방향>)
다음 소희에게
대학진학률의 확대와 산업구조 변화에 따라 실업계고등학교의 위상도 달라지고 교과도 다양해졌다. 1997년 12월 7차 고등학교 교육과정편성 운영지침에 “실업계 고등학교에서의 전문교과 학습은 현장실습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한 이래 현장실습은 “조기 취업 형태를 규제하고 본래 취지를 살릴 수 있는 기업에 한해 학생을 파견해야 한다.”는 방향성으로 개선되어왔다. 하지만 실습 현장은 교육 장소가 아니라 일터였기에 학생들은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산업재해, 성희롱, 차별에 노출되었다.
현장실습 중 문제가 발생할 때면 안전 교육과 조치, 임금 개선, 전공과 관련 없는 업무 배치 불가 등 개선방안이 논의되고 각종 매뉴얼이 대책으로 나왔지만 소용없었다. 여전히 특성화고, 마이스터고교는 취업률에 발목을 잡혀있고 학생들은 교육 외피를 두른 열악한 노동현장에 내몰리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이 자본의 요구에 따른 노동력 생산 과정으로 자리잡고 있는 한, 다음 소희는 다음의 ‘누구’로 이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이 사회의 생존자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다음의 소희들. 그래서 다음 고리를 끊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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