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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노동운동] 전국총파업의 시발점 된 KBS 방송제작거부투쟁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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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1,170회 작성일 23-03-1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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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된 정권, 1990년 3월에는 방송노동자들이 맞섰다

 

전국총파업의 시발점 된 KBS 방송제작거부투쟁

 

 이황미(노동자역사 한내 기획국장)

 

정권의 언론장악 음모가 부른 투쟁

윤석열 정권이 처음은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영방송 장악’ 논란은 반복된다. ‘편향성 논란→사장 교체→방송장악’의 악순환은 모든 정권에서 이어지는 양상이다.

노태우 정부는 출범 직후 특별감사 카드를 통해 KBS에 손을 뻗쳤다. 1990년 3월, 유신 정부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서기원을 사장에 임명한 것이다. KBS노동조합은 “정권의 충견이 또다시 KBS 사장이 되게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발표하고 총파업 투쟁을 전개했다.

노태우 정권은 확고하게 언론을 장악해 지배 이데올로기를 구축해왔다. 특히 이후 진행될 지방선거(1991년)와 대선(1992년)에서 권력을 재창출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언론을 도구화해 가고 있었다. 1989년 안기부와 경찰의 <한겨레신문> 편집국 압수수색, <경향신문> 노조 간부 5명 강제해직에 이은 KBS노조 와해 시도 역시 그 연장선에 있었다. 이는 노태우 정권이 1989년 초 발족해 방송구조 개편을 추진하던 ‘방송제도연구위원회’가 1990년 4월에 낸 최종보고서에 ‘재벌 등에 민영방송 허용’과 ‘MBC 민영화’ 따위의 내용이 담긴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파업투쟁이 가능했다. 1989년 초부터 추진돼온 정권의 방송장악 음모에 대한 불만이 깊어진 것이다. 방송노동자들을 굴종시키려는 행태에 대한 불만도 폭발했다. 더욱이 투쟁현장에 공권력까지 투입함으로써 방송사와 방송인의 자존심을 완전히 짓밟자 KBS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선 것이다.

투쟁을 시작할 때 구체적 목표는 노태우가 임명한 ‘서기원 사장 퇴진’이었다. 그러나 본질적 목표는 민자당의 언론장악 음모에 맞선 전 국민의 ‘민주언론 수호투쟁’이었다.

 

‘서기원 퇴진’에서 ‘민주언론 수호’로

1988년 5월 노조를 결성한 KBS 노동자들은 방송민주화운동을 구체화해 나갔다. KBS노조는 1989년 3월에 ‘광주는 말한다’를 제작·방영했고, ‘조선대생 이철규 의문사 사건’에 대한 국회 진상조사 특위 활동의 생방송을 요구하며 단식농성까지 벌였다. 위기의식을 느낀 노태우 정권은 칼을 빼 들었다.

1990년 1월에 검찰이 연예PD 6명을 배임수뢰혐의로 구속해 방송인들의 윤리성에 치명타를 입힌 사건이 벌어졌다. 해당 PD들은 이후 검찰이 곡괭이로 때리거나 토끼뜀 등 온갖 가혹행위까지 가하며 무리한 수사를 벌여 공소사실을 조작했다고 폭로했다.

2월에는 감사원이 KBS 직원에게 지급한 온당한 법정수당을 ‘예산 변칙 지출’로 몰았다. 이 사건은 정권의 사주를 받은 언론들의 왜곡 보도로 KBS가 마치 노사합작으로 34억 원을 횡령한 것처럼 세상에 알려졌다.

이를 빌미삼아 정권은 방송민주화에 호의적이었던 서영훈 사장을 압박했다. 결국 서영훈 사장은 3월 2일 자로 사표를 냈고, 서기원 서울신문 사장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다. 그는 1989년 서울신문노조 파업에 강경한 태도였던 인물이기도 하다. KBS에서는 새 사장 부임과 함께 군사정권 시절 관제방송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포착됐다.

노동조합은 2월 29일 ‘KBS에 대한 음해공작을 규탄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본사 민주광장에서 조합원 비상총회를 열어 ‘KBS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이어 서영훈 사장의 사표가 수리된 3월 2일부터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노조는 매일 비상총회, 투쟁보고대회와 함께 비상대의원대회, 부서·지부·분회별 토론을 이어갔다. 연일 조합원 1천여 명이 투쟁에 참가했다. 3월 6일에는 언론노련 소속 조합원 800여 명이 프레스센터 앞에서 집회하고 시내 10여 곳에서 대국민 선전전을 진행했다. 다음날 무소속 국회의원 이철이 ‘KBS 사태 진상보고서’를 통해 서영훈 사장 퇴임 전 정부의 외압과 안기부 개입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한겨레>와 일부 지방지들을 제외한 모든 중앙언론은 보도하지 않고 외면했다.

투쟁이 다소 소강상태로 접어들던 즈음인 4월 3일, 이사회가 3차 투표 끝에 서기원 사장 임명을 제청키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노조는 ‘KBS 비상대책위원회와 집행위원회 연석회의’를 열어 농성을 확대했다. 4월 4일 ‘서기원 사장 취임 거부 전사원 서명’을 시작으로 관제사장 출근 저지투쟁을 벌여 나갔다. 철야농성 41일째인 4월 11일 서기원이 청원경찰 50명과 실·국장 100여 명의 호위 아래 사장실 기습진입을 시도했으나 조합원들이 막아냈다.

 

공권력 투입에 투쟁 확산

4월 12일, 서기원은 다시 청원경찰과 실·국장의 호위를 받으며 지하차도 엘리베이터를 통해 사장실에 기습 진입했다. 백골단 300여 명까지 사내에 진입해 사장 출근을 저지하던 6층의 조합원들을 구타하고 6층부터 현관 앞까지 백골단으로 터널을 만들어 조합원 117명을 강제연행했다. 조합원들이 강제연행된 직후 서기원은 제2회의실에서 100여 명의 백골단이 경호하는 가운데 취임식을 진행했다.

4월 13일, 4천여 명의 조합원이 모여 ‘전국비상사원총회’를 열었다. 남한강연수원에서 연수 중이던 11기 사원 70여 명도 연수를 중단하고 참석했다. 총회 진행 중에도 백골단 220여 명이 5·6층에 상주하고 있었지만, 조합원들은 서기원이 퇴진할 때까지 무기한 제작거부와 농성투쟁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교양국, 기획제작국, 라디오국 등 송출기술부를 제외한 제작자 전원이 당일 오후 6시를 기해 제작거부를 결의했고, 1,000여 명이 철야농성을 시작했다.

파업으로 ‘KBS 9시 뉴스’는 4월 12일부터 임시 스튜디오에서 진행했다. 당시 9시 뉴스 앵커였던 박성범 보도본부장이 사원들의 파업 보도 요구를 무시하자 노조원들이 스튜디오에 들어가 항의하는 바람에 9시 뉴스는 클로징도 하지 못한 채 12분 만에 종료되기도 했다.

4월 17일에는 이사 2명이 “서기원 사장 임명제청은 외압에 의한 것”이라고 폭로했다. 평사원 중심으로 시작된 투쟁에 부장·차장들까지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부산과 창원의 간부급까지 사원들의 방송민주화를 위한 노력에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사장 운전기사는 운전을 거부했고, 사장 비서실 직원 17명도 근무를 거부했다. 출근 저지투쟁은 22일까지 계속됐다. 22일 ‘방송민주화 쟁취와 4․19기념 단축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한편 CBS노조도 동맹 제작거부를 결의했다.

4월 23일 KBS 사태에 대한 정부담화문이 발표됐으나, 사태의 본질을 외면·호도하는 내용이었다. 전국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는 오후부터 서기원 사장과 최병렬 공보처장관 퇴진을 촉구하며 무기한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CBS노조도 동조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언론노련은 52개 언론사 집행위원회를 긴급 소집해 적극적인 연대투쟁을 결의하고 집행부 철야농성을 시작했다. 4월 24일에는 KBS 기자들이 긴급 기자총회를 열어 스스로 특집을 제작·방송할 것을 결의했다. 탤런트 300여 명도 비대위 투쟁을 지지하는 결의를 발표했다.

4월 25일, 경찰이 비대위원 11명에 대한 출석요구서를 발부했지만 전 직원의 단결을 더욱 공고히 할 것과 서기원 퇴진 방침에 변함이 없음을 확인했다. 사태의 해결을 위한 대화 노력도 병행하며, 방송정상화 등 국면전환은 정부의 대응에 따라 판단하기로 최종 결정해 전사원 비상총회에 보고했다.

4월 27일 KBS 부장단들이 방송정상화 즉각 실시, 사원 요구 관철, 공권력 재사용 불원 등을 담은 결의문을 발표했고, 국·실장단도 전적으로 동조했다. 같은 날 방송작가 115명까지 성명서를 내 KBS 사원들의 투쟁을 적극 지지하고 나선 가운데, 공권력 재투입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정권의 꼼수 ‘선 방송정상화’ 압도적 부결

4월 28일 KBS 본관 주위에 1,800여 명의 경찰병력이 배치됐다. 서기원과 박성범은 계속 사내에서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최병렬 공보처장관이 “4월 28일 오후 2시까지 방송과 사내 질서를 정상화하지 않으면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단행하겠다”고 통보함으로써 공권력 투입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이러한 와중에도 KBS PD들은 서기원이 퇴진하지 않으면 연대사직서를 제출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던 와중에 이날 김용갑 전 총무처 장관과 비대위가 회담을 했다. 회담 결과 “5월 14일까지 서기원을 사퇴시킨다는 전제하에 4월 28일 자로 농성을 풀고, 4월 30일부터 방송을 정상화”하기로 하고, 이 사항을 4월 30일 오후 2시 사원총회에서 추인받기로 했다. 김용갑은 실질적 권한도 없으면서 협의에 나서 농간을 부린 것이다. 4월 30일, 비대위에서 상정한 김용갑 안(선 방송정상화)은 3,000여 명이 참여한 전국 사원총회에서 2,408명이 반대해 압도적으로 거부당했다.

노태우 정권은 자신들의 공작이 압도적인 표 차로 좌절되자 불과 2시간 뒤 KBS에 공권력을 투입했다. 전노협이 선포한 총파업을 하루 앞둔 상황에서 투쟁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한 계략이기도 했다. 이날 밤 11시 15분경 19개 중대 3,000여 명의 병력이 본관에 진입, 농성 중이던 조합원 333명을 강제연행(7명 구속)했다.

이로써 민주광장 농성과 투쟁은 사실상 종결됐다. 그러나 KBS 노동자들은 공권력 투입이 임박한 마지막 순간에도 정부의 기만적인 ‘선 방송정상화 안’을 부결시켰다. 이로써 이후 MBC, CBS를 비롯한 전 언론계로 투쟁을 확산하는 기폭제가 됐으며, 5월 전국총파업 투쟁의 토대를 형성했다.

 

방송3사 연대 제작거부 투쟁

경찰병력이 KBS를 완전히 장악하고, 집결하려던 명동성당마저 원천봉쇄되자 조합원들은 MBC로 이동했다.

5월 1일, 전노협 소속 서울지하철노조가 KBS 공권력 투입에 항의해 무임승차 투쟁을 전개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총파업과 노동절 투쟁이 강도 높게 진행됐다. MBC노조는 전면 제작거부에 돌입했다. 1차 시한을 5월 6일 자정까지로 정하고, 19개 지방 MBC도 비대위의 결의에 따라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4월 23일부터 무기한 철야농성을 벌여왔던 CBS노조도 같은 날 제작거부에 돌입,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음악만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 KBS 조합원 1,000여 명은 MBC 내 ‘민주의 터’ 광장에서 ‘공권력 재투입 규탄 및 방송동지 연대 출정식’을 가졌다. 역사적인 방송노조 연대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KBS비대위는 2일부터 본부를 MBC노조 사무실로 옮기고 MBC비대위와 공조체제에 들어갔다. 5월 2일에도 ‘구속동지 석방촉구 및 노태우 정권 규탄대회’ 등 연대집회가 계속됐다. MBC 경영진은 양사의 연대투쟁을 저지하기 위해 5월 4일부터 KBS 사원의 MBC 출입을 봉쇄했고, 경찰은 이날 밤 100여 명의 병력을 MBC노조 사무실에 투입, 전영일 KBS 비대위원을 강제연행했다. 이에 대해 전국의 MBC 사원들은 5월 5일이 공휴일임에도 규탄집회를 개최하고, 언론자유를 말살하려는 노태우 정권에 맞선 더욱 강력한 투쟁을 다짐했다. 그러나 MBC 비대위는 5월 6일 오후 3시 대책회의를 열어 6시간에 걸친 격론 끝에 “일단 예정대로 7일 새벽 0시를 기해 제작에 복귀해 보다 강력한 프로그램 제작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연대 제작거부 투쟁은 6일 만에 일단락됐다.

한편, 5월 4일 김철수 신임 비대위 위원장을 중심으로 조직을 재정비한 KBS 사원들은 MBC노조 사무실에 ‘망명정부’를 설치하고 5월 18일 제작복귀에 이르기까지 ‘언론민주화와 국민의 방송을 위한 국민걷기대회’(5월 12일), ‘서기원 퇴진 100만 명 서명운동’(5월 14일), ‘전사원 대동제를 위한 민주광장 탈환투쟁’(5월 17일) 등을 꿋꿋하게 이어갔다.

KBS 공권력 투입을 계기로 사상 최초의 방송사 연대 제작거부 투쟁을 전개했지만 사전에 준비하지 못한 투쟁의 한계도 드러났다. MBC노조는 제작거부 시한의 연장문제를 놓고 이견이 노출돼, 비대위의 분열과 집행부 총사퇴로 이어지기도 했다.

 

사무전문노동자들 ‘노태우 타도’를 외치다

방송 4개사가 방송 사상 초유의 연대 제작거부에 돌입했음에도 노태우 정권은 7월 14일 국회 본회의에서 방송 관련 3개 악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의회민주주의를 말살한 민자당의 반민주적 횡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3당 야합의 본질을 국민에게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됐다. 방송관련법의 날치기 통과로 야당 의원들이 의원직을 사퇴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수많은 독소조항을 안고 있는 공보처의 방송구조개편안이 발표된 직후부터 KBS노조는 MBC, CBS, PBC 등과 공동으로 ‘방송법개악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이후 방송 4사는 전노협, 국민연합, 야당, 재야단체와 함께 정권의 방송구조 개편의 부당성을 알리며 여론의 비판적 분위기 확산을 꾀했다.

KBS 투쟁은 노태우 정권이 조성한 공안정국 속에서 민족민주운동 진영과 노동운동 진영이 다시 떨쳐 일어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 국민에게 노태우 정권의 방송장악 음모를 폭로함으로써 국민적 운동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KBS 투쟁을 계기로 출범한 업종노동조합회의가 개최한 ‘KBS 노조탄압 규탄대회’에서 1987년 이후 처음으로, 조직된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이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쳤다.

 

참고자료

- KBS노동조합, 『KBS 1990년 4월 방송민주화투쟁 백서』(1991)

- 전국노동조합협의회백서발간위원회, 전노협백서 3권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1990)』 (2003)

사진설명 1990년 4월 16일 KBS본관 (제공 : 노동자역사 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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