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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내레터

[그때 그사람들] 안동을 여행한다면 - 창당에서 해산까지 함께한 안동의 사회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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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264회 작성일 25-06-10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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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선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창당에서 해산까지 당의 주요한 직책을 맡으면서 함께했던 사람들이 있던 지역이 있다. 바로 안동이다.

 

당 창당의 초대 책임비서였던 풍산읍(당시 풍산면) 오미리의 김재봉, 강달영 책임비서와 함께 중앙집행위원이였던 풍산읍 상리리의 이준태,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맡았던 풍산읍 가곡리의 권오설, 안광천 책임비서와 함께 중앙집행위원을 맡았던 와룡면 오천리의 김남수, 경북도당 책임비서였던 와룡면 중가구리의 안상길은 조선공산당 마지막 책임비서인 차금봉때 안동야체이카를 책임지다 구속되었다. 조선공산당이 코민테른의 방침에 의해서 해산된 이후에도 당 재건 운동에 나섰던 권오설의 친동생인 권오직은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와 경성콤그룹등 일제하 전 기간에 걸쳐 투쟁과 투옥을 거듭하였다. 안상길의 6촌 동생 안상윤도 지역인 안동에서 안동콤그룹을 결성하여 당 재건 운동에 복무하였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내내 사회주의 운동에 종사한 지역은 많으나, 안동과 같이 창당과 해산의 과정에서 조직의 주요간부로 활동한 지역은 흔치 않다.

 

 

오미마을

 

오미마을은 동촌과 서촌으로 구분되는데 오미마을 한 가운데 나지막한 동산이 있다. 그 동산에 올라가면 오미광복운동기념탑이라는 탑과 오미마을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24명의 독립운동가를 기념하는 탑이 있다. 이 기념공원은 오미마을의 후손들이 작게는 5만원에서 많게는 3천만 원까지 땅과 성금을 내고 국가의 보조를 받아 세운 공원이다. 마을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추모하는 대상은 누구였을까? 의병항쟁이 실패로 돌아가고 1908년 단식순국을 한 김순흠, 상해임시정부의 법무차장을 지내고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한 김응섭, 의열단의 일원으로 일왕의 궁궐에 폭탄투척을 김지섭, 참의부 소속으로 하얼빈에서 일제 경찰과 교전 중 사망한 김만수,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였던 김재봉등이 그들이다.

김재봉은 김응섭, 김지섭, 김만수등과 비슷한 시기에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서로간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 중 1876년생인 김응섭은 상해임정에서 활동을 마치고 1921년 이미 이르쿠츠크 공산당에 입당을 한 상태였고, 1884년생인 의열단원 김지섭은 김재봉과 함께 1921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가를 한다. 이 시절 김재봉은 극동인민대표회의가 끝난 이후에 귀국을 하지 않고 러시아에 2년 가까이 머무는 데 김응섭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러시아에서의 체류과정에서 김재봉은 코민테른의 조선공산당 창당 준비 기관이던 코르뷰로에서 조선공산당 창당의 임무를 띠고 국내로 파견되어 창당을 위한 준비활동에 돌입한다. 그는 23~24년까지 당 창당 준비기간을 거친 이후 1925417일 조선공산당을 창당하고 초대 책임비서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 조선공산당에 가해진 첫 번째 탄압과정에서 체포되어 6년형을 복역하고 만기 출소하였다.

 

이 마을의 동촌에는 김응섭, 김재봉의 생가가, 서촌에는 김지섭, 김만수의 생가 터에 새로 지은 집이 자리하고 있다.

 

 

가일마을

 

오미마을과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가일마을에 들리면, 19266. 10만세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한 권오상, 권오운의 생가와 마찬가지로 6.10만세 운동을 기획하고 박헌영의 뒤를 이어 고려공산청년회 2대 책임비서 권오설과 그의 친동생 권오직의 생가 터가 있다. 권오설은 1925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그해 11월 초대 책임비서인 박헌영의 체포이후 고려공청의 책임비서직을 승계하여 활동하다가 19266.10만세 투쟁을 준비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복역 중 19304월 고문후유증으로 옥사하였다. 그의 동생 권오직은 박헌영이 고려공청 책임비서로 있던 1925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으로 유학을 갔다가 1929년 귀국하여 김단야와 함께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로 당 재건 운동에 참여하다 19306년형을 받고 구속이 되어 복역하였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대전형무소로 이송되는 도중 조선공산당 만세’ ‘조선민족해방만세’ ‘조선독립만세등의 구호를 외치다가 8개월 형을 추가로 언도받아 복역하였다. 석방이후 휴식 없이 다시 조직운동에 투신한 그는 경성콤그룹에 결합하여 기관지 출판을 맡아 활동하다 1940년 다시 체포되어 12년 형을 받고 복역하다 해방을 감옥에서 맞았다. 해방이후 조선공산당의 기관지 해방일보 사장, 민주주의 민족전선 중앙위원, 정판사 위폐사건으로 월북하였다. 안기성은 1925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1926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동만구역 책임비서로 활동하다 간도공산당 사건으로 투옥되어 해방이후 재건된 조선공산당 당원으로 민주주의 민족전선에서 활동하였고 한국전쟁시기 빨치산부대 중 이름 높은 남도부부대의 정치위원을 지낸 안기성의 생가 터까지 돌아볼 수 있다.

가일마을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독립운동가는 14명이지만 대한광복회 활동을 한 권준희를 제외한다면 대부분 사회주의 운동에 종사한 것을 화인할 수 있다. 나이로 보면 안기성과 권오설이 비슷한 연배이고 권오상 권오운 권오직등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 이들과 지역에서 풍산소작인회 활동을 한 이들은 위 두 사람보다 아래인 집안의 족제들이다. 이 마을이 사회주의 운동의 경향을 보인 이유는 권오설의 영향이 컷다. 권오설은 이준태, 김남수 등과 함께 안동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이며, 1924년 회원 5천여 명에 이르는 풍산소작인회를 창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대중조직의 조직화 성과는 안동지역 활동가들의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마을 어귀에는 권오설 선생의 기적비가 있는데 이 기적비를 쓴 이는 김용직 서울대 교수이다. 김용직은 권오설의 동지였던 김남수의 친아들이다.

 

 

상리 (우롱골)

 

가일마을에서 차로 대략 10분 거리에 떨어진 상리리로 이동하면 조선공산당 강달영책임비서 시절 중앙집행위원을 했던 이준태의 생가를 방문할 수 있다. 이준태의 생가는 골조는 그대로 남기고 집을 전체 수리하였는데 현재는 이준태 선생의 손자분 내외가 기거하고 있다.

이준태는 김재봉, 안상길과 더불어 상해임시정부의 국내조직과 활동비 모금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고, 김재봉 안상길은 이 일로 수감되어 각 징역 6개월과 1년 형을 받았다. 이준태는 김재봉과 짧지 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김재봉은 1890년생, 이준태는 1892년생으로 비슷한 나이이며 늦어도 1910년대 초인 경성에서 학업을 하며 서로 간에 알았을 것이다. 둘은 경성공업전습소의 동문으로 김재봉이 1911년 입학하여 1914년에 졸업을 하였고 이준태는 1년 전인 1910년에 입학하여 1913년에 졸업하였다. 그 이후 이준태는 총독부에서 고용한 측량기사로 근무를 하다가 그만둔 이후 경성의 무산자동맹회, 코르뷰로 국내부에 참여하면서 김재봉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11월 말 조선공산당의 존재가 일제경찰에게 발각이 되면서 강달영과 함께 수배중인 김재봉을 만나서 당 수습을 논의하여 강달영 책임비서와 함께 두 번째 집행부를 건설하다 6.10 만세 투쟁으로 조선공산당이 두 번째 탄압을 받을 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중가구리

 

풍산읍에서 차를 동북쪽 방면으로 40분쯤 가면 와룡면 중가구리가 나온다. 이곳은 안상길의 집터이다. 이곳에는 현재 안상길의 손자 내외분이 사랑채만 남은 집을 수리하여 살고 있다. 안상길이 분가하여 살던 곳은 이곳의 바로 옆 터인데 집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현재는 빈터로 남아있다.

안상길은 3.1운동에 참여한 이후 중국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국내조직인 교통부에 가담한다. 그는 그 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김재봉, 이준태등과 상의하여 독립자금 모집과 상해임정 선전사업에 참여하다가 김재봉과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다. 그 이후 풍산소작인회, 안동 화성회, 조선공산당 입당하여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한다. 그는 조선공산당의 네 번째 책임비서인 안광천 비서시절 조선공산당 경북도당의 책임비서직과 신간회 활동을 전개하였고 19288월 이후 조선공산당의 검거 선풍 속에서 활동을 지속하다가 192810월경 체포가 된다.

안상길은 당시 여느 사회주의자들처럼 집안의 형제들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친동생인 안상훈은 고려공산청년회의 추천으로 1925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여 그 이후 김영만 등과 함께 당 재건 활동을 하다가 체포가 되었다.

5차례에 걸친 대규모 검거로 주요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구속된 안동지역에서 당을 재건하기 위한 활동이 안동콤그룹의 이름으로 전개된다. 안동콤그룹은 1931~1933년까지 활동을 전개했다. 그 책임비서는 안상길의 6촌 동생인 안상윤이다. 안상윤의 집은 안상길의 집과 같은 중가구리에 있는데 걸어서 5분정도의 거리인 지척에 있다.

안동콤그룹은 안동지방에 적색노조, 여자부, 임하그룹, 풍산그룹, 예안노농행동대등을 조직하였고 안동지역을 넘어 이웃 영주에 적색농조, 봉화에 적농재건위를 조직하는 등 당시 당 건설의 방침인 아래로 부터의 당 건설 방침에 따라 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1933년 메이데이 기념투쟁을 준비하다 일경에게 발각되어 대대적인 검거를 당한다. 당시 일경에게 체포된 인원수는 3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는 1920년대 이 지역에 사회주의 운동이 대중적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안동콤그룹은 세포조직 143명이 검속되어 이 중 18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안동콤그룹을 마지막으로 일제시기 안동지역에서 확인되는 사회주의 조직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

 

 

오천리

 

중가구리를 나와 안동지역 답사의 마지막이 될 장소인 오천리는 군자마을로도 불린다. 이곳은 광산김씨의 마을로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을 피해 원래의 자리에서 2Km 정도 떨어진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 이곳의 여러 고택 중 탁청정 종파 종택이 있는데 이곳이 김남수의 생가이다.

김남수는 3.1운동 참여이후 조선노동공제회, 무산자 동맹, 안동화성회, 풍산소작인회등 앞의 김재봉, 이준태, 권오설, 안상길과 같은 조직 활동을 전개한다. 김남수는 동향의 선배와 벗들인 김재봉과 이준태 권오설이 차례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고 있을 때 김철수가 주재한 제2차 당 대회를 통해 조선공산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2차례에 걸친 탄압으로 파괴된 당 조직의 복원을 위해 힘써 노력하였다. 그 이후 1927년 조선공산당의 내부 분열로 당 중앙의 다수파였던 레닌동맹과 대립하게 되었을 때 이영 권태석등과 함께 192712월 춘경원에서 기존 당 지도부의 탄핵 성격을 띠는 별도의 당 대회를 개최하는데 함께한다. 그 이후 김남수는 당 활동과 관련하여 19289월경 체포가 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다.

 

 

안동의 사회주의자들은 마치 예견된 탄압 앞에 두려움 없이 활동하였다. 김재봉이 잡혀가면 이준태와 권오설이 뒤를 잇고 다시 김남수와 안상길이 그 길을 갔다. 당이 해산된 이후에도 당 재건을 위해 안상윤과 권오직이 활동을 하였다. 그들은 이 활동이 자신에게 어떤 위해가 가해지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미 가일마을은 6.10만세 투쟁으로 고문을 당해 3명이나 그 후유증으로 옥사, 혹은 석방 이후 사망을 목격하고 들었을 것이다. 비단 가일마을의 그들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시절의 독립운동,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는 대가는 혹독하였다. 그 모든 걸 감수하고 조직운동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의 안위보다 공동체 전체의 대의에 헌신하는 강렬한 도덕적 책무가 그들의 가슴속에 있었을 것이다.

그 이후 이들의 개별적 운명도 비극적이었다. 권오설, 권오운, 권오상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사, 병사 하였다. 김재봉, 김남수는 해방을 보지 못하고 각각 1944, 1945년 사망하였다. 안상윤은 1949년에 사망하고, 이준태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권오직, 안기성은 1953년 북한에서 박헌영 계열의 숙청당시 출당, 숙청되었다. 안상길은 해방이후 좌익 활동으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하다 한국전쟁 당시 석방되어 월북한 이후 1958년 북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생을 독립과 해방에 헌신한 결과가 비극적인 결말로 끝이 난 셈이었다. 그들의 후손들의 삶도 고단하였다.



[사진]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근전 김재봉선생 어록비,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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