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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내레터

[문학이 목격한 사회] 연재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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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876회 작성일 23-03-2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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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조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해체

신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던이 모든 것을 해체했다. 역사는 근대를 기어코 뒤엎고야 마는 인간과 그들이 이룩한 문명을 그런 방식으로 표현했다. 해체에는 자발적인 양상도 있었으나 약탈에 가까운 폭력적인 현상도 못지않았다. 사람들은 공동체에서 자아로, 집단에서 개인으로, 광장에서 방으로 흩어졌다. 문장도 시대를 거스를 순 없었다.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이 권력이었던 시절, 지배계급의 훈장과도 같았던 문학은 미디어 군단에 의해 순식간에 그 영토를 점령당했고 인터넷의 발달은 누구나 자신의 문장을 공적인 공간에 게시할 수 있도록 했다. 문장의 독점 또한 해체된 것이다.

 

기록

그 과정에서 본격문학-대중문학’, ‘참여문학-순수문학같은 논쟁의 구도들 또한 자연스럽게 사그라들었다. 샤르트르는 작가란 사회적 발언자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짜 작가가 된다.”며 패기 있게 외쳤지만 그런 선언은 오래가지 못했다. 더욱이 미디어가 문장을 밀어내는 시대에 이르러 문학은 장기 침체를 맞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세상에 몰락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떠올려본다면 그리 우려할 바도 아니긴 하다. 헌데 정말 문학은 사회적 발언력을 잃은 것일까? 산업의 몰락은 문학의 몰락과 등치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은 마침내 누구나 읽고 쓰는 시대가 왔다는 사실이다. 인류 역사의 어느 시기보다도 수많은 문장이 생산되고 또 읽히고 있다. 해체는 하나의 양상일 뿐, 인간은 현상에 대처하면서 수명을 다한다. 그리하여 여전히 사람들은 글을 쓴다. 우리가 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없던 시기에도 인류는 무언가를 썼다. 다시 말해, 인류는 언제나 기록했으며 기록은 해체되지 않았다.

 

문학

문학에 관한 가장 오래된 오해는 문학이 거짓말이라는 것과 문학은 감성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 오히려 문학은 현상이 거느리고 있는 뒤틀린 진실에 접근하는 가장 이성적이고 내밀한 시도에 가깝다. 거짓말은 일간지에 나열된 지리멸렬한 문장들 틈에 도사리거나, 위정자들의 자서전 속에나 있는 것이다. 일례로 당대의 작가(기록자)들은 대부분 아주 예민하고 정직한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더듬이는 주로 인간과 사회의 현상을 향한 것이었고 이는 어떤 사회적 징후에 대한 도착과도 같았다. 이 집착은 주로 세 가지 층위의 문제들을 드러냈는데 - 오늘 엄마가 죽었다(사실) 엄마의 죽음에 대한 나의 태세(사실이 거느린 실체) 윤리란 무엇인가?(부조리) :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 우리가 진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대부분 3번의 영역 안에 있으며 문장을 통해 3번에 이르는 과정을 우리는 문학이라고 부른다.

 

뒤통수

문학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작품 전체의 주제의식을 한 몸에 담고 있다. 주제의식은 특정한 상황에 대한 인물의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캐릭터) 따라서 시나 소설, 희곡 따위를 끝까지 읽지 않아도 그 인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만으로도 우리는 작품 전체의 내용과 결말을 유추할 수 있다. 설사 이 유추가 전복되는 반전이 있을지언정 작품 전체의 주제의식이 캐릭터와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는 희곡이나 시에 등장하는 시적 화자에게도 적용된다. 현상과 관계 맺는 주인공의 발화는 가장 치밀한 형태의 감각과 기획을 통해 본질로 접근한다. 우리가 접하는 문학 작품들은 모두 이 접근과정이 만든 궤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궤적을 들여다볼 때 비로소 독자들은 작가들이 포착한 인간(사회)의 모습과 마주한다. 문학은 인간(사회)의 뒤통수를 상상하는 일이다. 그리고 진실은 언제나 그()들의 뒤통수에 있다. 한내 연재 통해 당대의 문학이 포착한 장면들을 하나씩 소개하기로 한다.

 

 

[그림] 공장에서 퇴근하는 사람들, 로렌스 스티븐 라우리,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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