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내레터 다시읽기] 민주주의에 대한 짧은 답변
페이지 정보

본문
이광일 (성공회대)
민주주의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말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 그런 평가는 민주주의에 관한 발상, 그에 근거한 실천들이 하나의 덩어리일 수 없다는 점을 함축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의미를 지니지만, 다른 한편 민주주의를 논평자의 입장에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근대이후 정치의 핵심인 민주주의가 지배자의 언어가 아니라 착취-수탈-차별-배제당하는 이들의 언어이자 외침이라는 점을 소홀히 보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자기통치’,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의 실현으로 규정된다. 물론 그 ‘동일성’ 또한 어떤 타자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보면, 그러한 규정 또한 내재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내재적 한계는 단지 논리적인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근대국가의 탄생 및 재구성이 이런저런 타자들을 만들고 배제, 차별하는 역사특수적 과정이었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바로 그 근대국가가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실현, 보장해야 할 주체로 설정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당시 그 선언에서 지시하는 인간이 ‘자유로운 부르주아 백인 남성시민들’을 의미하고 그 국가가 ‘역사의 완성’을 구체화한 실체로 간주되었다는 측면에서 보면, 역설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에 의해 주도된 것처럼 보이는 그 혁명과 국가의 실현이 착취-수탈-차별-배제 받는 이들의 힘, 즉 ‘아래로부터의 힘’에 의해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현실의 운동(정치)이 ‘법, 제도’의 구축으로 귀결되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그것이 그 운동의 요구들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것, 아니 그 틀에 가두어 둘 수 없다는 것 또한 너무도 자명하다. 애초 운동(정치)은 법과 제도, 국가를 넘어선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 지금 막 일어난, 뜨거운 봉기조차도 창백한 그림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 놓여 있는데, 그것은 소실될 수 없는 민주주의의 거처, 즉 새로운 혁명의 가능성이 거기에 늘 존재함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선언이 부르주아 남성시민들의 것으로, 그들의 국가로 환원, 고정될 수 없는 이유이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담보한 것으로 간주된 그 국가가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선언」을 요구한 여성을 단두대로 보낸 이후에야, 그리하여 그것을 통해 그 선언이 하나의 이데올로기임을 자인한 후에야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여성, 노동자 등의 생명을 담보로 유지되고 있는 현실은 그것을 확인해 준다.
이런 측면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이 과거에는 물론 앞으로도 실현될 수 없다는 통찰은 여전히 의미심장하다. 감히 그 누가 그것의 실현을, 즉 ‘모순 없는, 자유로운 이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구성된 사회’에 이르렀음을 선언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그런 세상이 가능하냐?’고 묻는 것 자체가 난센스이다. 그렇기에 민주주의자, 민주주의운동이란 그 실현을 막고 있는 모든 착취, 수탈, 차별, 배제 등에 맞서며 항상 낯설게 다가오는, 결정되지 않은 그 길을 계속 걸어가는 이들, 운동들 이외에 다른 그 무엇이 아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체제를 넘어서고자 하는 사회주의운동, 페미니즘운동 등은 그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는가. 있다. 단 자기 자신들조차도 그 민주주의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인지, 인정, 실천할 능력을 가지고 있을 때만 그렇다. 그럴 때만이 노동자계급 안에서, 여성 안에서 가장 고통 받는 이들에게 눈을 돌리고 그들과 함께 투쟁하는 것이 추상적으로 다가오는 ‘전체 노동자’, ‘전체 여성’을 구체화시키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자기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럴 때만이 사회주의, 페미니즘 등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공통의 지점에 터해 있음을 확인하고 함께 어깨를 걸고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결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수 없는, 아니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2018년 4월)
- 다음글[다섯 시의 독서] 민주노조운동의 지역 X 산별 역사 편찬 25.09.1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