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한내레터

[그곳의 역사] 군산에 가면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896회 작성일 23-04-04 11:39

본문



photo_2023-04-04_10-52-31.jpg

 

김미화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군산

조선시대 군산은 전국 최고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의 세곡이 모이는 군산창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군산진이 설치되어 경제, 군사적 요충지로 중시되었다. 189951일 군산항의 개항과 더불어 대한제국은 군산 조계지(주로 개항장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가 일본에 독점되지 않도록 각국의 공동조계지로 정했으나, 개항 이후 군산은 일본제국주의의 필요에 종속되어 왜곡된 성장을 겪었다. 군산의 성장과 함께 식민지 수탈로 몰락한 다른 지역의 농민과 소작인들이 새로운 삶터를 찾아 군산으로 모여들었다.

 

부두노동자

군산항으로 유입된 대다수는 부두노동자가 되었다. 개항과 관련해 새롭게 등장한 부두노동자는 당시 농한기에만 돈을 받고 일하는 계절임금노동자와 구별되는 특징이 있었다. 첫째, 이들은 오로지 임금으로만 생활했다. 농업과 직접 관련하지 않았고 자본가들에게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만 생존했다. 둘째, 노동력의 매매는 오직 현금계산으로 그리고 작업량의 계산은 날도급제를 따랐다. 셋째, 항상 같은 장소에서 대집단으로 노동했다. 부두노동자의 이러한 특징은 군산지역의 초기 노동운동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

 

1920년대의 노동운동

최초의 대규모 파업은 개항장에서 시작됐다. 18982월경 목포에서는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부두노동자들의 투쟁이 해마다 벌어졌다. 이 시기의 파업은 자연발생적이었으나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들이 단결해나가는 통로 역할을 했다.

1920411일에는 최초의 노동자 조직인 조선노동공제회가 만들어졌고, 전국의 주요 도시들과 일부 농촌지역에서도 조선노동공제회 지회들이 조직됐으며, 19221017일 창립한 조선노동연맹회는 개인자격으로 회원을 받았던 조선노동공제회보다 한걸음 나아가 노동조합 단위로 조직을 구성했다.

1920년대 들어서면서 노동운동은 두 가지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데, 하나는 지역 노동조합을 전국 규모로 결합하려는 시도였으며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 사상과 노동운동을 직접 결합하려는 노력이었다.

조선노동연맹회는 서울에서 메이데이 기념 강연 선전지를 배포하고 2,000여 명의 군중을 모아 기념 강연을 진행하고, 서울에서 일어난 파업에 직접 관여하는 등 19244월 조선노농총연맹이 결성되기까지 노동자의 계급 의식을 촉진하고 노동운동의 전국적인 연대를 강화해나갔다.

 

수탈과 대립

군산은 일제가 호남지역 일대에서 수탈한 쌀을 일본으로 운반하는 거점항구였다. 1923년 군산항에서 일제가 수탈해간 쌀이 처음으로 100만 톤이 넘었다. 이에 노동력의 수요 또한 자연스레 증가했고 노동쟁의가 지속하는 조건들을 형성했다.

19243월 노동자투쟁은 노동친목회와 신흥조합의 대립으로 드러났다. 신흥조합은 일본인 하역청부회사(일세조, 군산조, 대정조)의 청부를 받아서 배에서 선내작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이었다. 노동조합이라 불렸지만 본래 의미의 노동조합은 아니었다.

 

요구

신흥조합의 노동자들은 조합 간부인 검찰과 십장에게 임금의 1/10을 떼였다. 검찰은 휘하에 십장들을 두고 노동자를 통솔했으며 십장은 10~20명 규모의 노동자를 감독했다. 검찰과 십장은 노동자를 관리하고 일감을 맡아오는 댓가 명목으로 임금의 10~20%를 착취했다.

부두노동자들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기 위해 검찰과 십장에게 예속된 상태였다. 일본인 자본가는 노동조합과 십장을 통해 노무관리와 노동 통제를 하며 숙련된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고 임금통제 역시 쉽게 할 수 있었다.

결국 이에 저항하는 신흥조합 탈퇴자들이 노동친목회를 중심으로 뭉쳤고, 노동친목회는 3가지 요구를 내걸고 파업에 돌입했다.

 

- 신흥조합은 임금 십일조를 뺏지 마라

- 직업권을 나눠줘라

- 노동자 피 빨아먹는 검찰 십장을 철폐하라

 

파업

노동친목회가 가입한 군산노동연맹회는 즉각 파업에 깊이 개입했다. 노동연맹회 소속인 정미소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인 정미인습공동조합도 동맹파업에 돌입했다. 32일 두 단체 노동자 2,000여 명은 하얀 옷을 붉게 물들여 입고 깃발을 높이 들어 조직력과 결의를 드러내며 신흥조합 사무실 앞으로 집결했다. 하지만 신흥조합원들은 모두 도주했고 일본 경찰은 노동연맹회 간부 5명을 구속했다. 이튿날도 노동친목회 소속 노동자 1,000여 명과 신흥조합 노동자 5백 명이 대립했다. 이 투쟁을 빌미로 일본 경찰이 노동연맹회와 노동친목회 간부들만 전부 구속하자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은 더욱 분노하여 날이 저물도록 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결국 노동친목회의 투쟁은 성공하지 못했으나 노동운동의 계급의식과 연대성 그리고 항만지역의 노동자 투쟁을 상징하는 역사로 남아있다.

 

참고자료

구희진, 1920년대 전반 군산지역의 노동운동-‘군산노동연맹회와 항만하역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역사교육155, 2020

권의식, 우리나라에서 노동계급의 형성과정과 그 시기, 김경일 편, 북한학계의 1920, 30년대 노농운동 연구, 창작과 비평사, 1989.

문윤걸, 일제초기 임금노동자계급의 형성과정과 그 존재형태에 관한 연구, 한구사회사연구회논문집19, 1990.

권의식, 조선노동운동 발전에서 조선노동공제회와 조선노동연맹회가 수행한 역할에 대하여, 김경일 편, 북한학계의 1920, 30년대 노농운동 연구, 창작과 비평사, 1989.

 

 

 

[사진] 1926년 군산항 3차 축항 공사 기념 쌀가마 탑. 출처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