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사람들] 아현리 537번지 김병환의 방. 조선공산당 3차 당대회를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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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1924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사진2] 네이버 지도 캡쳐

[사진3] 3차 당대회 개최지, 중외일보
나영선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고양군 용강면 아현리 537번지의 현재위치
조선공산당의 3차 당대회는 고양군 아현리 537번지, 즉 현재의 마포구 아현동 331-12번지에 위치한 김병환의 하숙방에서 개최되었다. 지금껏 이 장소는 나에게는 막연히 아현동의 재개발로 인하여 새로 지어진 고층아파트 단지 속 어딘가에 편입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지적도를 검토하니 그곳은 아현동 내부가 아니라 그 북쪽, 북아현동과 아현동의 경계를 이루는 도로에 가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를 근거로 지번 변화를 추적한 결과, 3차 당대회가 치러진 현재 주소는 마포구 아현동 331-12번지임이 확인되었다. 현재의 지번으로 바뀐 것은 1964년 7월 3일 시행된 대현토지구획정리사업 때문이었다.
현재 이곳을 방문하기 위해선 지하철 2호선 아현역 4번출구에서 나와 이대역 방면으로 약 200미터가량 가면 큰 길가에 위치한 동물병원 바로 뒤편의 건물이 자리한 곳이 3차 당대회가 열렸던 터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김병환이 하숙하던 그 방에서 당대회가 진행되었다. 당시 신문 기사에는 김병환에 대해서 ‘그 동지 김병환의 하숙에서...’라고 보도된바, (조선일보 1930. 11. 17 2면기사) 김병환에 대해선 저 짧은 기사외에 현재 나로서는 이 이상의 정보를 더 알지 못한다. 다만, 신문 기사의 ‘동지’라는 표현과 그의 거처에서 극도로 위급한 상황의 조선공산당의 최고지도부가 회의장소로 선택한 점을 볼 때, 충분히 조직에서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1차 당대회는 서울 시내 한복판 고급 요릿집에서 열렸지만 2차 당대회와 2월당의 3차 당대회는 도심 외곽 비좁고 허름한 곳에서, 하지만 그들이 조직하고자 했던 노동자계급의 생활공간에서 열렸다.
비상한 상황 속의 당대회
1928년 2월 27일 밤 8시. 당시 서울의 노동계급과 도시빈민이 모여 살던 가난한 동네 아현리에 은밀하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날씨는 진눈깨비가 내리다 눈으로 바뀌었고, 입춘이 지난 지 20여 일이 넘었지만, 기온은 영하 6도를 넘어섰다.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춥고 음산한 날씨였다. 참석자들의 마음을 위축시킨 것은 추운 날씨만이 아니었다. 조선공산당은 안팎으로 큰 어려움에 처해있었다.
그 어려움은 무엇인가? 첫 번째로 흉포한 일제 경찰의 탄압이었다. 지난해 12월에 시작된 검거 사건이 멈추었다고 여겼는데,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2월 2일경부터 대규모 검거 선풍이 불었다. 다수의 동지가 체포되었다. 검거된 동지들의 면면은 더욱 엄중했다. 바로 직전 책임비서를 맡았던 김세연을 비롯하여 공청의 책임비서인 김철 등 당 중앙의 주요 간부들이 체포된 것이다. 체포된 동지들을 향할 일제 경찰의 잔혹한 고문과 심문으로 조직의 기밀이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로 판단되었다. 두 번째로 지난 12월, 당 운영과 사업에 대한 견해 차이를 드러낸 다수의 동지가 별도의 당대회를 강행하였다. 이로써 양측은 돌이킬 수 없는 적대적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당대회는 이러한 중첩된 어려움 속에서 치러졌다. 원래 이 당대회는 1928년 1월 중 개최할 계획이었지만 지난해 8월에서 10월 사이 치러진 당대회 성사를 위해 치러진 대의원 선거에서 이들은 소수파로 전락했다. 결과는 전체 13개 지역 중 2곳만이, 50여 개의 국내 야체이카중 3곳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중앙당 간부 구조 속에서는 다수였지만 전체 당원들 사이에서는 소수였기에 1월 당대회를 개최할 수 없었다. 2월 당대회를 추진했던 이들은 12월 당대회를 개최한 세력으로부터 제명되는 등 배제된 상태였다. 따라서 당대회를 개최하는 데 필요한 대의원의 선출에 중앙집행위의 권위를 빌려 자파 조직을 중심으로 선출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비합법 혁명운동 상태에도 민주적 운영을 원칙으로 삼아야 하는 사회주의 정당의 큰 흠결로 지적할 수 있다. 애초에 참석 예정 인원은 14명이었지만 대회전 1명이 검거되고, 1명은 미행을 인지하고 불참하였고, 다른 1명은 비밀누설의 우려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결국, 참석한 인원은 모두 11명이었다. 이들은 중앙간부 3명과 지역 대의원 9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중앙간부중 1인이 지역대의원을 겸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상한 상황에서 당대회는 신속하게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2차 당대회가 검거 선풍 속에서 치러진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밤 8시에 시작된 회의는 새벽 2시까지 약 6시간 동안 밀도 있게 진행되었다. 이에 비해 12월에 치러진 당대회는 12월 20일부터 22일까지 사흘에 걸쳐 치러졌다.
당대회는 당대회 의장을 맡은 이경호의 진행으로 신속히 진행되었다. 대회준비를 맡은 한위건의 경과보고에 이어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 일본공산당의 축사를 대독했다. 본 안건은 당면 임무, 조직 문제, 정치 및 경제투쟁,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형평운동, 청년 학생운동 등에 8개 항목에 대한 방침을 결정했다. 더불어 기관지, 결산 예산, 당규 수정안 등을 다루었다. 중앙집행위원회의 인선은 조선공산당의 모든 당대회가 그랬듯 보안을 위해 당 간부 인선은 선거위원을 선출하여 그들에게 위임하였다. 대회에서 다루지 못한 사항들은 구성되는 신임 중앙집행위원회가 결정하기로 하고 당대회를 마쳤다.
대회를 마친 2월 28일 오전, 선출된 3명의 인선위원 중 2명이 종로경찰서에 체포되는 상황을 맞았지만, 유치장에 갇힌 상황에서도 인선위원들은 지혜를 짜내어 중앙간부 인선의 임무를 마친다. 내 외부의 어려움 속에서 2월 당대회를 통해 선출된 간부들은 중앙집행위원 7명, 후보위원 6명, 중앙검사위원 3명 후보 2명을 선출하였다. 모두 18명이었다.
아! 차금봉, 그리고 익명의 김병환
새롭게 조선공산당의 책임을 맡게 된 사람은 1919년 3.1운동 당시 철도 전차 부문 노동자 파업대오를 조직하여 가두투쟁을 이끌며 명성을 높였던 차금봉이었다. 일제 하부터 해방공간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 운동에서 현장 노동자 출신이 사회주의 정당의 대표가 된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였다. 차금봉은 3.1운동으로 해고가 된 이후에 노동공제회, 조선노농총동맹, 조선공산당 경기도책등을 역임해 왔으며, 생계를 위하여 신문 배달을 겸하고 있었다. 단지 신문 배달만을 한 것이 아니라 동종업에 종사하는 동료들을 조직해 신문배달총동맹을 결성하였다. 차금봉이 일제의 고문으로 서대문에서 주검으로 나왔을 때 그의 상여를 메고 마지막을 지킨 이들이 바로 그 신문 배달 동료들이었다.
당과 공산청년회는 한 쌍으로 움직인다. 차금봉 책임비서가 당을 맡았다면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는 전남 여수 거문도 출신의 김재명이었다. 차금봉과 김재명은 체포 이후 모진 고문 끝에 차금봉이 1929년 3월에 김재명은 그해 12월에 목숨을 잃었다.
김병환의 가난한 하숙방은 당이 처한 상황을 보여주었다. 그가 차금봉의 동료였을지 혹은, 이름모를 당원이었을지, 아니면 묵묵히 당의 운동을 지지하는 선한 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회주의 운동은 이런 무수한 익명의 지지에 기대어 일제의 살인적인 탄압에도 그 생명력을 이어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927년 12월 당대회를 치른 세력과 1928년 2월에 당대회를 치른 그룹은 당대회 보고와 승인을 얻기 위해 모스크바에 있는 코민테른으로 향한다. 모스크바에서 당 승인을 위한 외교전이 펼쳐지는 동안 국내에서 두 세력은 일제의 탄압으로 연이은 구속과 희생에도 해방운동을 이어갔다.
[참고자료 및 논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front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aver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https://nl.go.kr/newspaper/
서울특별시 서울부동산정보광장 https://land.seoul.go.kr/land/
강호출: 『코민테른 ‘조선문제결정서’를 통해 본 조선공산당 운동 (1925~1928)』 2004년 고려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윤상원: 『두 개의 조선공산당 3차 당대회』 역사연구 제54호
임경석: 『1927년 조선공산당의 분열과 그 성격』 사림 제61호
전명혁: 『코민테른의 12월 결정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당 운동에서 세 개의 경향을 중심으로』 역사연구 제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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