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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노동운동] 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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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1,777회 작성일 23-04-11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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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리앗이여! 서러워 울지 말아라!

~ 골리앗이여! 노동자의 깃발이여!

    

이황미 (노동자역사 한내 기획국장)

 

1990425,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에 나섰다. 78명의 결사대는 82m 높이 골리앗에서 결사 항전했다.

노태우 정권과 현대 자본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육해공을 동원한 미포만 작전으로 진압했다. 그러나 골리앗 투쟁은 현대자동차와 울산 현대그룹 노동조합들의 연대파업, 그리고 5월 전국 총파업투쟁으로 더욱 확산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 투쟁은 그해 122일 출범한 전노협을 지켜낸 투쟁이자 독재정권과 맞서 싸운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현대자본과 정권이 기획한 노조탄압

현대중공업에서는 노동조합 결성부터 어려웠다. 주력 기업인 데다 중공업 사업장이 지닌 폭발성 때문에 현대그룹이 치밀하게 노무관리를 했기 때문이다. 갖은 폭력과 어용노조 설립 등 방해 공작을 뚫고 1987721일 현대중공업노동조합(현중노조)이 출범했다. 출범 이듬해인 19881212일 회사의 노조탄압에 맞서 시작한 파업은 1989330일 노태우 정권이 공권력으로 진압하기까지 무려 128일간 이어졌다. 현중노조가 파업 중이던 198918일에 있었던 각목테러 사건¹은 현대재벌의 노사관을 그대로 보여줬다.

1990년 상반기 들어서면서 현대그룹과 정권은 다시 노조파괴를 기획했다. 199026, 부산고등법원은 1989년 파업지도부에 대한 항소심에서 1심보다 높은 형량을 구형했다. 9일에는 이영현 5대 위원장을 연행·구속하고, 우기하 수석부위원장에 사전구속영장을 발부했다. 10일에는 완전무장한 사복경찰 250여 명이 노조사무실에 난입해 압수수색을 했다. 조합원들은 사측의 도발에 대해 즉각 집단 월차, 사내시위로 맞섰다. 1990년 상반기 투쟁의 방향과 기조를 둘러싸고 혼란과 동요가 계속됐다.

 

조합원들 자발적 작업거부

그러던 중 420일 오후, 서울에서 투쟁 일정을 논의하고 돌아오던 우기하 노조 수석부위원장이 동대구 요금소에서 연행·구속되자 현장에서 분노가 폭발했다. 421일에야 소식을 전해 들은 조선사업부 조합원들은 곧바로 작업을 거부하고 투쟁에 돌입했다.

그간 구속자 석방 투쟁으로 민주노조를 사수해야 한다는 주장과 임단협 투쟁으로 조합원의 경제적 실리와 복지증진에 주력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해 왔다. 나아가 총자본의 공세에 맞서야 한다는 주장과 희생을 더 자초해서는 안 된다는 신중론까지 다양한 목소리가 하나의 힘으로 모이지 않고 있었다. 조합원들의 자발적인 투쟁 돌입은 지도부의 동요와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즉각적인 파업투쟁을 강제했다.

 

425일 전면파업 돌입

422일 긴급하게 열린 대의원 간담회에서 425일부터 전면파업에 돌입하자고 결의했다. 23일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 24일부터는 소위원·선봉대·기동대·정당방위대의 철야농성과 대의원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파업투쟁의 열기가 달아올랐다. 천막농성을 시작한 2천여 명의 농성자들은 투쟁의 의의와 방향에 대해 천막마다 토론을 이어갔다. 공권력 투입에 대비한 무장도 갖췄다. 정문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천막 주변에 민주박격포²를 설치했으며 화염병을 만들었다.

그리고 조합원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결의서에 서명했다.

 

우리는 금번 생존권을 내건 총파업 투쟁에 있어서 공권력 개입 등의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결코 전체의 뜻을 거역하거나 현장에 들어가지 않고 최후까지 투쟁을 결의한다.”

 

총자본에 맞선 전면전지도부 재구축

현대그룹 자본과 공권력을 중심으로 한 총자본, 현대중공업 노동자와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총노동 간의 피할 수 없는 격전이 시작됐다. 1989년 이후 가라앉았던 노동자 투쟁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경제위기’, ‘임금 한 자릿수 억제등 일체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정면으로 돌파하며 국가를 상대로 정면 투쟁에 나섰다.

파업이 노조와 공권력의 전면 대결로 치닫자 비상대책위 지도부는 동요했다. 회사가 24일 비대위 지도부 10여 명을 업무방해와 쟁의조정법 위반혐의로 울산경찰서에 고소·고발하자 진민복 비상대책위 의장이 잠적했다. 정부는 26일 강영훈 국무총리 주재로 긴급 노사관계장관회의를 열어 현중노조의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공권력 투입을 비롯한 강력대응을 결정했다. 같은 날 비대위 부위원장 5명 전원이 정치파업은 못 하겠다며 물러났다. 이에 대의원 간담회에서는 곧바로 사무국장 이갑용을 총책임자로 선임, 파업지도부를 구축했다.

 

7882m 골리앗에 오르다

427일 현대중공업이 중역회의에서 공권력 투입을 요청키로 했다. 경찰은 428일 새벽을 공권력 투입일로 잡고 울산 전역에 12,000여 명의 전경과 백골단을 집결시켰다. 경찰은 현대중공업 정문 맞은편 다이아몬드호텔(현 호텔현대)에 지휘본부를 설치하고 미포만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병력을 현대중공업 주변에 집중 배치하는 한편 수시로 헬기를 띄워 현장 내 파업노동자들의 상황을 확인했다.

몇 차례 열린 노정 간담회는 서로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끝났다. 공권력 투입이 임박했다. 현대중공업 파업노동자들은 사업부별로 현대계열사 인사부 점거 농성, 공권력 투입 시 골리앗³점거 농성, 거리 투쟁계획을 준비했다. 투쟁지도부는 야전지도부와 최종 결정을 담당하는 골리앗지도부로 이원화했다.

426일 밤 11시경 농성조 일부가 골리앗 위로 올라갔다. 다음날 공권력 투입이 확실해지자 밤 10시경 나머지 결사대까지 모두 78명이 82m 높이의 골리앗 위에 올랐다. 야드에서 <파업전야>를 관람하던 8,000여 조합원들은 갑작스러운 비상에 팽팽한 긴장감으로 터질 듯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파업 전사들의 모든 준비가 끝났다. 골리앗에서는 횃불이 타올랐고, 현장은 쇠파이프 두드리는 소리와 노랫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비상이다현대차노조도 가세

1990428일 새벽 345, 경찰이 미포만 작전을 개시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경찰병력이 현대중공업이 있는 동구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새벽 4, 경찰병력이 현대자동차 출고 정문 앞에 이르렀다. 이때 비상! 비상이다!”라며 규찰을 서던 선봉대와 결사대가 새벽을 흔들어 깨웠다. 단체협약과 임금인상을 놓고 철야농성을 전개하던 현대자동차 대의원, 선봉대, 야근조 조합원까지 가세해 2,000여 명의 대오가 경찰병력을 막아섰다. 이들은 처음에는 야유와 함께 돌 몇 개를 던지다가 경찰들이 최루탄을 쏘기 시작하자 현장에서 작업할 때 쓰던 쇳덩이들을 지게차로 옮겨 도로를 차단했다. 당황한 경찰병력은 최루탄을 무차별로 쏘아댔다. 숙소에서 잠들어 있던 현대자동차 노동자들까지 최루탄 소리에 달려 나오면서 후미의 경찰차 30여 대가 완전히 무장해제당했다.

공 입체작전으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을 도망갈 곳 없이 완전히 봉쇄하려던 경찰의 계획은 수포가 되었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저지로 진압이 두 시간 이상 지체됨으로써 현대중공업 조합원들이 포위망을 돌파하고 퇴각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현대 자본에 의해 매번 엇갈렸던 중공업과 자동차 노동자들이 마침내 직접적 행동으로 하나가 된 역사적 순간이다. (下로 이어짐)

 

1 각목테러 사건 현대그룹이 제임스리(본명 이윤섭)라는 노조파괴 전문가를 고용해 야구방망이와 쇠파이프 따위를 들고 현대중전기노조 간부 수련회가 열리고 있던 울산 석남사와 현대그룹해고자협의회 사무실을 차례로 습격해 노조 활동가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한 사건.

2 민주박격포 장작불로 포신을 달구고 그 안에 스프레이 가스를 집어넣은 후 볼트와 너트를 집어넣어 스프레이 가스가 폭발하는 힘으로 나사들이 파편처럼 날아가게 만든 장치.

3 골리앗 현대중공업 육상건조시설 한복판에 자리 잡은 크레인의 별칭.

4 <파업전야> 장산곶매가 제작한 작은 금속공장의 노동조합 결성투쟁을 다룬 독립영화. 정권은 이 영화의 상영을 막으려고 영사기와 필름을 압수하는 것은 물론 전국의 상영장에 전투경찰을 투입했다.

  

[참고자료]

- 전노협백서발간위원회, 전노협백서 3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1990)(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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