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목격한 사회] 인간실격, 부끄럽고 고귀한 생애
페이지 정보

본문
[사진] 자화상, 장 미쉘 바스키아, 1982.
인간실격, 부끄럽고 고귀한 생애
왕의조(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AI 데카당스
인류 최초의 노동운동은 기계를 파괴하는 일이었다. 영국의 한 공장에 모인 노동자들은 방직기계라는 거대한 고효율의 수단이 공동체를 해치고 있다고 보았다. 이윽고 그들은 망치를 들고 기계를 부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러다이트(Luddite)라고 불렀다.
러다이트는 일종의 반시대적인(anti-modern) 운동을 펼쳤다. 이러한 운동은 과학화와 산업화가 가지는 이점인 ‘시장경제의 효율성’과 격돌하면서 빈부격차와 실업을 해결하기 위한 복지정책과 사회보장제도를 고안해내도록 했다. 역사의 무분별한 전진에 시간적 퇴행과 중단을 촉구함으로써 오히려 공동체에 이로운 역할을 해낸 셈이었다.
이후 영국, 프랑스 등지에는 데카당스가 유행했다. 데카당스는 문명의 성숙기 끝에 찾아온 파멸과 퇴행, 허무 자체를 예술의 영역에서 다루고자 했다. 이른바 퇴폐적 미학이었다. 러다이트가 노동의 소외에 대한 물리적 반동이었다면, 데카당스는 정신적 소외에 대한 인간들의 예술적 대응이었다. 전쟁과 기근, 그리고 자본이 쌓은 금자탑의 역설은 폐허마저 미학으로 다루는 사회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자본(Capital)은 어김없이 지구를 정복했고, 이제 그 열차는 돌고 돌아 다시 ‘AI적 데카당스’에 도착하고 있다. 미디어와 언론은 이른바 ‘AI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문명적 공포’를 온 사회에 선전하고, 선구자를 자청하는 자본가와 위정자들은 TV쇼에 출연해 - 직업 따위 없어져도 그만이라는 듯 -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장황한 엄포를 일삼고 있다.
이것은 데카당스다. 그런데 인류가 200년 전에 지나온 그 정거장에는 여전히 하나의 질문이 남아, 먼지를 머금은 명판처럼 흔들리고 있다. 인간이 단지 사회라는 기계의 부품이 아니라면, 인간은 왜 존재해야 하는가?
인간 실격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문장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이 말은,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실격』의 서두를 차지하고 있다. 다자이 오사무는 『인간실격』을 통해 데카당스의 일본적 수용을 이뤄내는 한편, 작가 자신의 유서에 가까운 소설을 통해 인간존재에 대한 집요하고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자 했다.
“그러나 저는 아버지 어머니조차도 전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에게 호소한다. 그런 수단에 저는 조금도 기대를 걸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한테 호소해도, 어머니한테 호소해도, 순경한테 호소해도, 정부에 호소해도 결국은 처세술에 능한 사람들의 논리에 져 버리는 게 고작 아닐까.”
주인공인 요조는 인간의 위선과 허위를 조금도 견디지 못하는 성정을 타고난 아이였다. 그는 인간과 사회를 향한 공포를 감추려고 일부러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자처하는 ‘익살꾼’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훗날 성인이 된 요조는 술과 여자, 그리고 좌익운동에 빠져들지만 인간에 대한 환멸을 견디지 못하고 애인과 함께 자살을 시도한다.
“아아,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弔詞) 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
동반자살을 시도한 애인은 결국 사망에 이르고, 혼자만 살아남게 된 요조는 죄책감으로 폐인이 된다. 그 후 요조는 ‘신뢰의 천재’라고 부를만한 ‘요시코’를 만나 구원에 이르는 듯하지만, 이웃에게 겁탈당하는 요시코를 목격하고는 끝내 인간과 세상에 절망하며 약물에 중독되어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인간이라는 규격
“인간의 삶에는 서로 속이면서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도 입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들뢰즈는 사회적 억압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인간들이 종국에는 억압 그 자체를 욕망하고 사랑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때 인간은 자신을 억압할 수 있는 권리 자체를 체제에 위임하게 되며, 들뢰즈는 이러한 상태를 파시즘이라 보았다. 이렇듯 파시즘은 특정한 정치 체제가 아니라, 욕망이 조직되는 방식인 것이다. 욕망이 서로 닮아가고, 비슷해지고, 표준화되는 사회.
러다이트운동의 사례에서 보듯, 자본은 언제나 고임금·숙련 노동부터 효율적으로 대체하려 한다. 자본의 관점에서 숙련 노동이란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단지 고비용 노동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사회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거대한 기계의 수레바퀴에 잘 맞도록 인간을 깎아내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비정규직, 불안정노동, N차 하청, 노동시장의 중층구조 같은 말들은 모두 부품을 자유롭게 교체할 수 있는 그 위대한 ‘자유시장경제’를 만들기 위한 전초기지에 가깝다.
『인간실격』은 결국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의 조건’, 곧 인간의 규격에 맞추지 못한 한 인간의 파멸을 다룬 소설이다. 요조가 사회의 규격을 거부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가 인간이나 사회처럼 비열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조가 목격한 사회는 ‘인간이라는 규격’에 미달한 존재를 가차 없이 실격 처리하는 사회였다.
부끄럽고 고귀한 생애
미국의 핵물리학자 오펜하이머는 핵무기를 개발한 뒤 죄책감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그가 얼마나 깊은 죄책감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인간으로서 책임질 수 없는 일을 벌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구글은 AI의 윤리적 허점을 점검하던 윤리위원회를 해체했고, 스페이스X와 테슬라의 수장 일론 머스크는 전쟁에 개입하며 사회적 통제에서 벗어난 과학기술을 남용하고 있다.
트럼프는 집게손가락을 치켜들며 전쟁과 제국의 권능을 과시했다. 그는 데카당스를 가리킨 것일까. 데카당스의 시대에는 기만과 협잡이 유행한다. 오늘날의 AI는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이세돌은 바둑에 흥미를 잃었다며 은퇴했고, AI가 바둑을 망쳤다고 했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기원에 모여 바둑을 둔다. 바둑의 목표는 승패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알파고가 인간을 닮았다며 감탄했지만, 인간이야말로 알파고를 닮은 것은 아닐까. 요컨대 새는 ‘날기’로 자신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자신을 입증하는가. AI는 거짓말을 할 수 있고, 기만과 협잡을 통해 자기 존재를 방어한다. 거짓말을 한 뒤에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음 질문을 기다리는 것이다. 정말 AI는 인간을 닮은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인가.
“인간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중략)
지금까지 제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그러나 AI가 부끄러운 생애를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시간은 그저 흐를 뿐이고, 역사의 유구함이나 인생의 의미 또한 그 시간이 어떻게 탕진되었는가에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 200년의 역사로부터 우리가 깨달은 단 하나의 사실이 있다면, 풍요가 빈곤의 반대말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인류가 개발한 도구나 수단이 그 어떤 이윤과 부를 창출한다고 할지라도, 공동체나 관계의 미덕은 효율성에 있지 않다.
그리하여 고귀한 인간이란 결국 자기 안의 정직을 발견할 수 있는 인간이다. AI가 인간이나 공동체의 고귀함을 파괴한다면, 당연히 인간은 그것을 멈출 수 있어야 한다. AI가 인간을 멈출 것인가, 인간이 AI를 멈출 것인가. 그리하여 실격되는 것은 무엇인가? 부끄럽고 고귀한 인간의 생애.
- 다음글[여기, 우리의 이야기] “죽는다”는 협박 아닌 “살 권리”를 말하라 26.01.1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