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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노동운동] 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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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1,167회 작성일 23-04-18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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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미 (노동자역사 한내 기획국장)

 

경찰, ··공 입체 미포만 작전

1990428일 새벽 5시부터 헬기가 울산만 상공을 분주하게 날아다녔다. 이어서 6시에는 불도저가 정문 앞 바리케이드와 담장을 밀어붙이고 뒤따라 백골단이 뛰어 들어왔다. 73개 중대 1만여 명의 병력이 하늘(헬기를 통한 사전정찰, 상황지시, 선무방송)과 땅, 그리고 바다(미포만에 군함 상륙)를 통해 달려들었다. 그 뒤에는 페퍼포그 차가 숨어서 수백 발의 최루탄을 쏘아댔다.

오전 6시 정각,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한 최루탄 연기를 뚫고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민주박격포가 작렬했다. 화염병이 날았다. 구토 나는 최루가스 속에서도 노동자들의 투쟁은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페퍼포그와 함께 돌진해 오는 전경들에 의해 공격 개시 7분 만에 3차 바리케이드까지 무너지고 말았다. 30여 대의 민주박격포가 불을 뿜었지만 역부족이었다.

 

투쟁하면서 퇴각하라, 승리하는 그날에 만나자

삽시간에 대오가 쪼개지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눈물을 삼키며 조금씩 물러서고 있을 때, 골리앗 투쟁지도부의 지침이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졌다. “동지들! 현 위치를 사수하라. 우리가 엄호할 테니 아래의 동지들은 마음껏 공격하라!” 그리고 함성과 함께 수백 개의 볼트가 날아갔다. 전경의 방패가 깨지고 머뭇거리던 동지들이 대오를 갖추었다. 그러나 중장비까지 동원한 공권력 앞에서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골리앗 지도부에서 새로운 지침이 떨어졌다.

 

동지들! 투쟁하면서 퇴각하라! 공장을 빠져나가 야전지도부의 지도 아래 가두투쟁을 전개하라! 우리는 골리앗으로 간다. 골리앗은 결코 점령당하지 않는다. 투쟁하면서 퇴각하라! 동지들! 승리하는 그날에 만나자!”

 

조직적인 퇴각이 시작됐다. 835, 4도크와 5도크에서 항전하던 노동자들이 무장해제당했다. 노동자들은 용접봉, 장작, 볼트가 널브러진 도로 위를 따라 사복조들이 도열한 틈으로 눈물을 삼키며 빠져나가야 했다.

 

골리앗에서 생라면으로 버티다

한편 428일 공권력 투입 직전 골리앗을 점거한 결사대 78명은 429일부터 조합간부와 선봉대장을 중심으로 사업부별로 조를 편성해 순찰과 야간 동원 근무를 시작했다. 429일 오후 6시경에는 골리앗 지도부가 모든 상황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을 하며, 야전지도부는 골리앗의 상황을 알리고 협의사항을 발표하는 대변인 역할만 하기로 했다.

골리앗 점거에 당황한 자본과 공권력은 선무방송으로 심리전에 나섰다. 430일에는 헬기로 골리앗 위를 대형그물로 덮는 고공작전을 시도했으나 결사대가 골리앗 끝부분에 나이론 밧줄을 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51일 골리앗 탑에서 전체가 모여 노동절 기념집회를 한 뒤 오전 10시경 골리앗 중간 부분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51일 결사대 중 1명이 내려가다 연행되자 일반 조합원 사이에 동요가 일었다. 52일부터는 집행부가 곳곳에 보조근무를 서고 대의원들이 대오를 챙기기 시작했다. 52일 오후 가족을 동원한 선무방송으로 다시 1명이 내려갔다. 3일 오후에는 전체 논의를 통해 13명이 내려갔다. 53일부터는 물과 비상식량까지 바닥나서 하루에 생라면 하나로 때우면서 버텼다.

 

전파방해·썩은물최후의 판단

공권력 투입 직전 역할분담을 통해 골리앗 지도부가 모든 결정을 하기로 한 바 있다. 그러나 골리앗에서 판단은 오직 무전기와 라디오방송, 그리고 멀리 맨눈으로 보이는 동구 지역의 투쟁상황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무전기는 방해전파로 단절됐다. 현실적으로 투쟁의 전 과정에 대한 지도는 야전지도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골리앗 위에서 얼마나 버티느냐가 결국 투쟁 지도력 그 자체였다.

54일 현대자동차노조의 정상조업 결정과 55일 이후 가두투쟁의 지리멸렬함은 결국 골리앗 지도부의 상징성마저도 퇴색시켜 가고 있었다. 몇 차례 협상에서 자본은 노동자들의 소박한 요구마저 거부해버렸다. 되풀이되는 산발적인 전투 속에서 동력이 소진되고 있었다. 마침내 56일 정오, 골리앗은 전체회의에서 마지막 방법으로 단식투쟁을 결의하고 남은 식량을 모두 바다에 던져 버렸다.

단식투쟁 이후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일교차가 20도가 넘는 데다 며칠째 비까지 내려 농성자들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다. 회사가 생수랍시고 썩은 물을 올려보내 여기저기서 배탈 환자가 속출했다. 탈진상태에 빠진 골리앗 동지들을 본 지도부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최후의 판단을 내렸다. 510일 오후 2시 골리앗 최후의 결사대 51명이 골리앗 점거 13일 만에 농성을 해산하고 내려왔다. 이들 중 15명이 구속됐다.

 

만세대투쟁가족과 울산노동자도 끝까지 싸웠다

다시 4월 28일, 경찰의 새벽 진압 작전을 두 시간 연기시키며 치열하게 싸웠던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아침 출근시간이 되자 자연스럽게 파업으로 이어갔고 전체 노동자가 투쟁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1만여 명이 가두투쟁 대오를 형성해 현대자동차 앞 도로 3~4km를 점거한 채 경찰병력을 포위해 들어갔다. 워낙 대규모라 한쪽에서는 싸우고, 한쪽에서는 구호를 외치며, 또 한쪽에서는 약식 집회를 진행했다. 1030분경 앞 대오가 150여 명의 전경을 무장해제시키고 현대자동차 앞 주택가까지 무차별 최루탄을 쏘아대던 페퍼포그를 불태웠다.

같은 시각, 만세대 민주광장은 밀려난 노동자들이 집회를 열 수 없게끔 백골단과 전경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밀려난 노동자들의 집결시간은 12시였다. 이미 싸움으로 단련된 가족들이 먼저 나섰다. “당신들이 뭔데 우리 땅을 차지하고 있는 거야! 여기는 정주영 땅이 아니니 썩 정주영 땅으로나 꺼져라!” 이를 계기로 경찰과 백골단이 가족들을 공격했고 격렬한 투석전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백골단은 근처를 지나던 오토바이를 세우더니 아무 말도 없이 쇠파이프로 내리쳤다. 비명이 울려 퍼졌고, 백골단도 잠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때 한 노동자가 백골단을 향해 돌진하여 분노의 주먹을 휘두르다 백골단의 집단폭행에 기절해 버렸다. 이렇게 만세대 민주광장 일대의 가두투쟁이 시작됐다.

429일부터 매일 출근 체크를 마친 노동자들은 다시 부서별로 나누어 동구 전역에서 치열한 가투를 전개했다. 가투가 시작되기 전 작은 골목마다 가족들이 합동으로 쓰레기를 모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최루탄을 씻어낼 고무호스를 준비했다. 특히 128일 파업의 경험을 살려 가족들은 스스로 물품보급조와 구급조를 편성, 조직적으로 투쟁에 동참했다. 현대중장비 앞에서는 최루탄이 다 떨어진 전경들이 시위대열에 밀려 점심도 못 먹고 온종일 갇혀 있기도 했다. 비록 끊임없이 밀리고는 있었지만, 전선이 곳곳에서 형성돼 쫓고 쫓기는 투쟁이 쉴새 없이 계속됐다.

 

사그러져가는 투쟁 열기

51일에는 현대자동차노조가 효문로타리와 염포검문소 등 2개 방향으로 평화대행진을 벌였다. 현중노조도 조합원의 투쟁참여율이 95%에 육박했다. 오후 3시에는 만세대 민주광장을 전경들로부터 완전히 탈환해 오후 5시에 노동절 기념집회를 하기도 했다. 현대종합목재노조, 현대정공노조 등에서도 1,500~2,000여 명씩 참여해 대규모 가두시위를 계속했다. 그러나 51일을 넘기면서 투쟁의 열기는 조금씩 식어가기 시작했다.

골리앗 투쟁을 중심으로 한 1990년 상반기 투쟁은 당시 26,000여 명의 현대자동차노조 조합원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제기했다. 428일 공권력 저지 투쟁은 이러한 과제에 부응하려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몸짓이었다. 그러나 현대차노조는 53일 오전 9, ‘7일부터 정상조업을 결정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분노한 조합원 1,000여 명이 몰려들어 항의했으나 이상범 현대차노조 위원장은 결정을 고수했다.

현대자동차노조가 조업복귀 방침을 내림으로써 투쟁 열기는 급격히 사그라졌다. 6일 집회 장소인 사천세대로 노동자들이 모여들자, 경찰은 헬기를 낮게 띄워 집회를 방해하고 대대적인 진압을 개시했다. 심지어 아들의 옷일 현대중공업 작업복을 입고 모내기를 하던 할아버지까지 끌려갔다. 골리앗 투쟁이 시작된 후 53일까지 현대중공업 610, 현대자동차 77, 현대전동기 22, 현대정공 10명 등 총 730명이 연행됐다.

투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투쟁 기간 죽어지내던 기회주의자들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더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도저히 승리할 수 없다.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자. 우리가 앞장서서 수습하겠다며 근로감독관의 주재하에 서영택 등으로 구성된 수습대책위가 설치기 시작했다. 이원갑을 중심으로 한 전투적인 야전지도부가 피눈물을 삼키며 집회장을 돌며 투쟁을 조직하는 등 고군분투했지만 뒤집힌 상황을 돌이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노협 5월 전국 총파업으로 확장

전노협의 현대중공업에 대한 지원 투쟁의 핵심은 ‘5월 전국 총파업성사였다. 그간 지역과 업종차원의 연대 수준에 머물러 있던 노동조합운동을 전국 투쟁으로 조직해 한 단계 끌어올려야 했다. 그리고 그 필요성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제기하고 있었다. 마창노련은 425, 23개 노조가 참가한 비상대표자회의에서 현대중공업에 공권력이 투입되면 총파업에 돌입할 것을 결의했다. 27일 현총련 결의에 이어 같은 날 서노협도 53~4일 파업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현대중공업 투쟁은 곧장 전노협 전체의 투쟁으로 확대됐다.

전노협은 현대중공업에 공권력이 투입된 바로 다음 날인 429일 오전 10시에 비상중앙위원회를 열어 전체 노동자의 생존권 수호와 노조활동의 자유를 위해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더이상 물러설 수 없다며 즉각 전국 총파업에 돌입할 것을 선언했다. 아울러 울산지역에 각 지역의 선봉대를 무제한으로 파견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현대중공업과 울산지역에 투입된 경찰병력 즉각 철수 단병호 위원장을 비롯한 모든 구속 노동자 즉각 석방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 중단과 노조활동의 자유 보장 노동부장관·내무부장관·상공부장관 현사태 책임지고 즉각 퇴진을 촉구했다. 전노협은 이러한 결의를 수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사업을 펼쳐나갔다.

 

골리앗은 외로운 늑대가 아니다

특히 429일 비상중앙위원회에서 결의한 전노협선봉대 파견방침은 즉각 시행돼, 6개 지역에서 114명을 파견했다. 각 지노협에서 파견한 선봉대 외에 공개모집을 통해 참여한 학생들을 포함하면 전노협선봉대는 200여 명을 넘어섰다.

전노협선봉대는 55일과 6일 사천세대에서 전노협 깃발을 들고 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은 현대중공업 경찰 봉쇄선을 물리력으로 뚫고 전노협 깃발을 휘날림으로써 골리앗 농성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전노협선봉대는 울산 사천세대 앞에서 골리앗은 결코 외로운 늑대가 아니다라는 선전물을 배포하며 투쟁에 힘을 실었다이러한 전노협선봉대의 활동은 역시 전노협이라는 평가와 함께 이후 울산지역에서 살아있는 연대정신의 표본으로 기록됐다

한편 구속 중인 단병호 전노협 위원장은 KBS와 현대중공업에 대한 공권력 투입이 확실시되던 427, 당시 투쟁의 의의를 밝히며 전면적 투쟁을 신속히 조직하라는 장문의 옥중서신을 전해왔다. 공권력이 투입된 28일에는 권용목 전 현총련 의장 외 울산지역 12명의 구속자가 단식농성에 돌입했으며, 29일에는 단병호 위원장도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430일에는 마산교도소에서 이종엽 마창노련 의장대행 등 130여 명의 양심수가 즉각적인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전국에서 공권력침탈 규탄 가두시위

전국 곳곳에서도 지노협을 중심으로 공권력 침탈을 규탄하는 투쟁이 벌어졌다.

수도권 결의대회는 429일 동국대학교에서 열렸다. 오후에는 종로3가 피카디리극장 앞에서 기습적인 가두시위를 시작으로 6천여 명이 노동부사무소 앞 종로대로를 완전히 점거하고 해체! 민자당, 사수! 전노협, 퇴진! 노태우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했다. 경찰차 3대를 화염병으로 공격해 전소시킨 시위대는 단성사 옆 파출소 1층을 불태웠으며, 노동부 지방청사무소 간판도 화염병에 맞아 불탔다. 30여 분간 피카디리극장 앞 네거리를 완전히 장악했던 시위대는 백골단에 세운상가 쪽으로 밀려났다. 백골단이 식당 안까지 들어와 닥치는 대로 연행하자 시민들이 경찰에 항의했지만 백골단은 시민들 몇 명만 모여도 사과탄을 던져 넣었다. 밀려가던 시위대 6천여 명은 동대문 앞에서 2차 가두집회를 열고 백골단과 공방을 주고받으며 골목골목에서 시위를 계속했다.

혜화동 방면과 청계천 방면에서도 수백 명씩 대오를 형성해 투쟁이 벌어졌다. 청계천 일대에서 시위를 벌이던 1,000여 명의 시위대는 평화시장 고가다리, 이대 동대문병원 앞, 명동성당 주변 등지에서 가두투쟁을 계속했다. 저녁에는 서총련 학생들을 중심으로 150여 명이 명동성당 농성에 돌입했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이날 91명이 연행됐다.

 

 

- 참고자료 : 전노협백서발간위원회, 전노협백서 3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1990)(2003)

- 사진 : 노동자역사 한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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