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사람들] 이현상의 은신처, 익선동 9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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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현상(1905~1953), 그가 체포된 익선동 9번지.
[그때 그사람들] 이현상의 은신처, 익선동 9번지
나영선(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일제강점기 개량한옥촌 흔적 간직한 익선동
서울지하철 5호선 종로3가역에 내리면 낮고 오래된 한옥들이 이어진 골목이 눈에 들어온다. 익선동이다. 가회동 삼청동 일대의 일명 ‘북촌 지역’과 함께 서울을 대표하는 한옥 거리다. 하지만 눈여겨본다면 북촌의 한옥이 넓은 도로와 정돈된 환경 속에 놓여 있다면, 익선동은 오래된 골목의 형태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개량한옥촌의 흔적을 살피기에는 오히려 이곳이 더 적합하다.
익선동은 조선 25대 임금 철종이 즉위 이전에 태어나 10여 년을 보낸 곳이다. 왕이 되기 전 거처였던 ‘잠저’는 궁으로 불렸고, 그 이름이 ‘누동궁’이다. 철종이 즉위한 이후 아버지 전계대원군의 사당과 형 이욱의 거처를 마련하면서 붙여진 명칭이다. 이 집의 대문 좌우에 있던 행랑, 곧 ‘익랑’이 발달하면서 ‘누동’보다 ‘익랑골’이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게 됐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거치며 오늘날의 ‘익선동’이라는 지명이 정착했다.
이재유 이순금 이관술도 살았던 한옥마을
누동궁은 그 면적이 2,500평에 이르는 거대한 저택이었다. 하지만 1920년대가 되면서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고, 서울의 인구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새로운 주택수요가 급증하면서 근대적 부동산 개발이 본격화됐다. 가회동·삼청동·계동 일대에서 시작된 개발의 흐름은 익선동 누동궁 터로 확장됐고, 그 결과 오늘날의 한옥마을이 형성됐다. 이 개발을 주도한 인물은 정세권이다. 그는 1920년대 주택 건설로 막대한 자본을 축적했으며, 관여한 주택만도 6천여 채에 이른다. 동시에 신간회, 조선어학회, 물산장려운동 등에 자금과 건물을 지원하며 사회운동에도 깊이 관여했다.
정세권이 주도한 개량한옥은 획기적이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새로운 주거 형태였다. 수도와 전기를 도입했고, 마당 가까이에 화장실을 배치해 생활의 편의성을 높였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 또한 호응을 얻었다. 1920~1930년대의 익선동은 잘 계획된 골목과 신식 주택이 들어선 신흥 주거지였다. 이런 조건은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과 직장인들이 자취하거나 하숙하기에 선호하는 공간이 됐다. 이현상, 이재유, 이순금, 이관술 등등의 거처도 이곳 익선동이었다.
1928년 9월 이곳에서 체포된 이현상
이현상은 1928년 9월 11일에서 12일 사이 이곳에서 체포됐다. 당시 그는 보성전문학교 법학부 1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나, 이미 민족해방과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하는 삶을 선택한 상태였다. 1926년 6·10 만세운동 당시 중앙고보 4학년으로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복역한 경험은 그의 사상 형성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를 심문한 경찰은 피의자 소행 조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견 온순함을 가장하고 있으나 음험한 자로서 과묵하며 의지가 대단히 강고함”, “극렬한 사회주의자로서 의지가 매우 강고하므로 개전할 가능성은 없음” 이러한 평가는 비록 식민 권력의 시선이지만 장기간의 예심 기간 조직과 신념을 끝까지 지키는 인물에 대한 정확한 묘사이기도 하다.
조서에 따르면 그는 1928년 4월 하순 김복진의 권유로 고려공청에 가입한 뒤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아 ‘야체이카(세포 조직)’의 책임자가 되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비밀결사 조직이 가입 직후의 인물에게 핵심 역할을 맡길 리 없다. 이미 이전부터 조직 내부에서 검증된 인물이었음을 시사한다.
이현상은 6‧10 만세 투쟁으로 중앙고보에서 퇴학당한 이후 자신의 고향인 전북 금산을 중심으로 청년 조직을 주도적으로 건설했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군조직을 넘어 면 단위까지 청년 대중조직을 확장했다. 이러한 조직 활동은 개인의 자발성만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이미 상위 조직과의 연결 속에서 이루어진 활동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일제의 잔혹한 심문에도 조직과 신념 사수
체포 이후 그의 진술 전략은 일관되게 조직 보호에 맞춰져 있었다. 그는 필요하다면 절도 혐의까지 뒤집어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근우회 간부이자 조선공산당 학생 담당이었던 김필수의 부탁으로 80원이 든 가방을 맡았다가, 이름도 모르는 인물(김모)에게 전달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경찰은 김필수와의 관계, 전달 대상의 신원을 집요하게 추궁했지만,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일경은 엄혹한 심문에도 이현상으로부터 김필수의 행방도, 김모라는 이의 정보도 알아내지 못한다. 일경의 모욕에도 “그렇게 보아도 어쩔 수 없다”라는 태도로 버텨냈다.
이현상이 보호하려 했던 김모는 누구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김필수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그녀는 조선공산당의 추천으로 1928년 10월에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고 1933년부터 함경남도 일대에서 남편 임민호와 함께 태평양노동조합운동이라는 당 재건 활동을 하다 체포됐다.
김필수와 이현상이 만난 시점은 김필수가 모스크바로 가는 출국 직전인 9월 4일이었다. 김필수가 인편으로 이현상을 자신의 거처로 불러 무엇인가를 논의했음을 고려하면, 이현상은 조직 자금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임무의 전모를 알지 못했더라도, 진술 과정에서 지켜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활동가들 체포·고문·수감 이후 변절하기도
1928년 3월, 고향 금산에서 올라온 이현상의 첫 거처는 화동이었다. 경성제일고보의 동남쪽 담벼락을 따라서 지어진 집이었다. 같은 조직원인 최성환과 강병도의 거처 역시 소격동과 안국동 일대, 도보 5분 이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우연이라 보기 어려운 배치다. 그의 하숙집 주소는 경성부 화동정 121번지였으며, 현재는 정독도서관 인근 도로에 편입돼 흔적을 찾기 어렵다.
검거의 계기는 서울 시내 고등보통학교에서 연쇄적으로 발생한 동맹휴학이었다. 경찰은 그 배후를 추적하며 수사를 확대했고, 이현상에게도 수사의 손길이 미쳤다. 여름방학 동안 고향에 다녀온 그는 경찰이 하숙집을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잠행에 들어갔다. 소격동 일대 지인의 집에서 일주일가량 몸을 숨긴 뒤, 익선동 9번지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이 은신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사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체포됐고, 두 번째 수감 생활이 시작됐다.
1928년 2월에 당대회를 치른 ‘2월당’은 당대회 직후부터 당 지도부들의 체포가 이어졌다. 일경들은 당 내부의 상황에 대해 알고 있는 듯 조직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기층의 당 조직은 위축되지 않았다. 대중투쟁의 조직과 투쟁의 성과로 조직을 확대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현상의 역할은 학생대중을 조직하는 일이었고, 식민지교육 철폐와 민족적 차별에 대한 저항 등 대중의 조건에 맞추어 각 단위 학교의 동맹휴학을 힘 있게 조직하려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성장하는 선진 학생을 조직으로 결집했다. 이현상은 이 시기 조선공산당의 당원이었고 고려공청 야체이카의 대표였으며, 서울청년회의 집행위원, 조선학생과학연구회(조과연)의 상무위원으로 활동했다. 보성전문 연희전문 경성제일고보의 학생들을 조직해서 독서회로 조과연으로 그리고 당으로 조직하는 일선 조직가였다. 그리고 고향에 아직 어린 두 아이를 둔 아버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중층적 활동은 당시 운동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함께 활동하던 동지들 여럿은 진주에서 서울 이재유그룹의 당 재건 운동에 참여했고, 일경의 가혹한 고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하지만 운동의 대의에서 일탈한 자도 있었다. 이현상의 조직상 지도선인 김복진과 그 동생이었던 김기진이었다. 그 둘은 카프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수형을 마친 이후 운동의 대열에서 떨어져 나간 것을 넘어 친일 행적을 일삼았다. 형제는 예술적 재능이 있었다. 형은 조각가로 손꼽혔고 동생은 글을 잘 썼다. 그들은 악명높은 친일분자의 동상을 제작하고 일제의 전쟁에 참여하라는 선전활동에 가담했다.
수많은 이현상들은 사회주의 운동 근간 지켜나갔다
이현상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1세대는 아니다. 하지만 6·10 만세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라는 대중투쟁에서 단련된 세대였다. 수백 명의 이현상은 1930년대 당 재건 운동의 주요 활동가들로 성장한다. 선배 세대의 이탈에도 이 새로운 세대는 전국에 무수한 당 재건그룹을 결성하고 숱한 패배에도 사회주의 운동의 근간을 지켜나갔다.
[참고자료 및 논문]
김성민, 「1920년대 후반 서울지역 학생운동의 조직과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 2004
양지수, 「1920년대 후반 사회주의계열 학생운동연구」 연세대학교 석사논문, 2006
윤경로, 「이현상 심문조서 이현상과 1928년의 학생공산당사건-고려공산청년회 산하 사회과학연구회원들이 중심이 된 학생운동사건」, 역사비평, 1988.12
강만길‧성대경 엮음, 『한국 사회주의 운동 인명사전』, 창작과비평, 1996
김경민,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이마, 2017
안재성, 『이현상평전』, 실천문학사, 2009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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