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우리의 이야기] 잔인한 계절, 죽은 자와 산 자들의 존엄을 묻다. ‘함께 비애에 빠지는 것, 그것이 연대의 시작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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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내가 매일 마주하는 이들은 세상의 경계 밖, 사회적 시스템의 보호에서 배제되어 있는 이들이다. 현장에서 일어난 명백한 사고도 산재로 인정받지 못한 노동자,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고 쫓겨난 이주노동자, 불법 촬영의 숨은 폭력에 영혼이 난도질당해도 사측으로부터 아무런 보호조차 받지 못한 노동자다. 그리고 조직적 소외 끝에 스스로 생을 등진 이와 그 죽음의 진실을 붙들고 처절하게 바둥거리는 유가족들까지. 그들의 이야기는 진술서나 보고서의 문장이 되기 전, 이미 누군가의 피와 눈물로 쓰인 생존의 기록이다.
보름 전, E7-3(조선업 용접공)비자로 입국한 지 1년 만에 해고와 브로커의 협박 앞에 놓인 한 이주노동자를 만나기 위해 급히 노동부 조사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목격한 가해자의 논리는 치밀하고 정교했다. 근로계약서상 장소가 아닌 곳으로 파견을 보낸 불법 행위는 ‘피해 노동자의 요청에 의한 배려’로 둔갑해 있었고, 브로커를 통역자로 대동하고 매수된 동료들까지 사측 증인으로 나서 조직적인 거짓을 늘어놓았다. 사람이 아닌 '필요 노동력'으로만 취급하는 이주 정책이 불러온 결과였다. 불법과 위협이 ‘정당한 조치’라는 탈을 쓰고 피해자를 압박하는 현장은 그야말로 ‘정교한 악마’의 모습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해고를 철회하는 합의를 했다. 대신 그는 일자리를 잃지 않고 추방되지 않기 위해 체불 임금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주노동자와 함께 노동부를 나오며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정답 없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나는 온전히 듣고 함께했는가? 사건이 쌓여갈수록 정리의 기술은 늘어갈지 모르나, 마음의 무게는 가벼워지지 않는다. 남은 피해자의 상실감을 보며 나는 다시금 뼈저리게 느낀다. 피해자의 고통은 늘 투박하고 파편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통받는 자 곁에서 함께하는 활동은 어쩌면 피해자의 파편화된 고통을 듣고 퍼즐을 맞추어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을 그러모아 의문점을 찾고, 가짜 배려 뒤에 숨은 진짜 폭력을 찾아내며, 피해자의 부서진 진실을 하나의 온전한 서사로 구성하는 일 말이다. 이 거대한 비극을 진술서, 보고서, 때로는 기자회견문이라는 고작 몇 장의 종이 위에 가둬야 한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서글퍼질 때가 있다.
또한 그 퍼즐을 맞추며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되새김질한다. 나의 언어가 권력이 되어 피해자의 진실을 검열하고 있지는 않은지, 수많은 사건 속에서 타인의 고통을 ‘사례’나 ‘데이터’로 치부하며 무뎌지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한다. 피해자의 거친 목소리를 정돈한다는 핑계로 그들의 날것 그대로인 진실을 나의 논리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내가 내딛는 발걸음, 말 한마디, 적어 내려가는 한 줄이 누군가의 생존과 존엄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서늘한 책임감을 잊지 않으려 몸부림친다. 특히나 ‘정형화된 조사 체계’라는 틀 안에서 객관성이라는 미명 아래 그 아픔을 재단하거나 계량화해야 한다는 오류에 빠질 때가 많다. 하지만 인간의 아픔을 어떻게 자로 잰 듯 나누고 무게를 달 수 있겠는가. 조사 과정에 편견이 개입되는 순간, 우리의 시선은 은연중에 가해자의 논리에 동화되기도 한다. “왜 더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나”, “그 상황에서 그것이 상식적인가”라는 질문들은 피해자에게 또 다른 비수가 되어 꽂히는 2차 가해일 뿐이다.
조사기록에서, 부당해고를 다루는 근로감독관의 무심한 말투에서, 그리고 노동자의 상처 치유를 지원해야 할 업무상질병판정위원들의 심의 과정에 규정만을 내세우는 서늘한 풍경 속에서, 고통에 등급을 매기려는 시도가 도리어 피해자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비극을 현장에서 목격할 때 내 마음에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것을 경험한다. 가해자의 유창한 변명이 조사단의 중립성을 집어삼키고 진실이 '언어의 기세'에 눌려 왜곡되는 과정을 목격하는 일은, 조사의 탈을 쓴 또 다른 폭력이 재생산되는 생생한 현장을 지켜보는 일과 같았다. 이때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복잡한 감정은 결코 개인의 예민함이 아니다. 나는 그 불편함을 붙들고 질문을 멈추지 않으려 한다. 이 끝없는 질문과 막막함이야말로 나로 하여금 무너져가는 진실을 지탱하고 인간의 존엄을 지켜낼 여정에 나를 곧추세우는 힘임을 깨닫는다. 질문이 멈추는 순간, 나는 고통을 재단하는 행정가가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답이 보이지 않아 괴롭고 무력감에 슬픔이 깊어질 때도 있지만, 확신보다는 의심을, 매끄러운 결론보다는 투박한 질문을 품고 그들의 곁에서 걸어가려 한다.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함께 묻고 함께 비애에 빠지는 것 자체가 연대의 시작임을 믿기 때문이다.
[출처] : 민주노총 노동과세계
4월 28일 ‘세계 산재 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을 지나 노동절로 향하는 이 계절은 너무도 잔인한 시간이다. 노동절이 ‘국가 지정일’로 정해졌고 노동자의 권익이 향상되었다는 화려한 수사들이 기념사를 채우겠지만, 그 화려한 그림자 뒤에서 우리는 여전히 동료를 잃는다. 다단계 하도급 구조의 굴레를 멈추기 위해 투쟁하던 화물노동자가 경찰의 비호 아래 살해당했다. 그 현장에서 함께 죽지 못했다며 동료는 자책의 눈물을 흘린다.
노동절이 기일이 되어버린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의 피해 노동자와 양회동 열사, 그리고 이천 물류창고에서 쓰러져간 이들까지. 오늘 우리가 지켜내지 못한 동료의 빈자리가 더 크게 다가오는 이 시기, 나는 다시금 스스로에게 묻는다. “우리의 연대는 죽음을 막지 못한 자책을 넘어, 산 자들의 존엄을 지키는 단단한 방벽이 되고 있는가.” 노동자들의 부서진 진실을 맞추는 일, 슬픔이 분노가 되고 분노가 다시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 될 때까지 우리는 이 질문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저 들리는 대로, 보이는 대로 그 아픔의 곁을 지키는 것. 비록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비애가 나를 짓누를지라도, 나는 이 슬픔을 외면하지 않으려 한다. 이 비애야말로 우리가 고립된 섬이 아니라, 서로의 고통에 응답하는 존엄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억울한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은 그와 그들이 한평생을 살아오며 지키고자 했던 세상을 향한 투쟁이 되어야 한다. 슬픔과 분노는 애도 투쟁의 불씨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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