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책] 한국노동운동사 - 멈추지 않는 노동해방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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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동운동사
- 멈추지 않는 노동해방의 여정
왕의조(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한국노동운동사의 주요 장면들에는 반드시 노동해방의 구호와 깃발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 ‘볼드모트’와도 같은 말이 티브이나 신문을 비롯한 대중매체에 등장한 적은 잘 없다.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외쳤던 그 단어를 이제는 쉽사리 찾아볼 수조차 없다니 말이다. 어쩌면 그 이유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때가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목표가 없는 배는 배가 아니라 부표에 불과하다. 부표는 퇴행하거나 표류한다. 노동해방의 목표는 폐기된 것일까. 찬란했던 그 깃발은 이제 내려진 것일까.
“청계피복, 원풍모방 등 1970년대의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한 대중운동은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노동운동의 방향을 재정립하고자 했다. (중략) 광주민중항쟁 후 신군부는 노동법을 개악해 인민의 노동3권을 완전히 박탈했다. 따라서 노동권의 쟁취는 항쟁 이후 전체 인민의 가장 절박한 요구이자 동시에 한국노동운동의 기본과제가 되었다.”
“민주노총은 위력적인 총파업을 전개했으나, 신자유주의 공세를 지연시켰을 뿐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했다. 민주노총이 노개위 참가를 통해 거머쥐었던 정리해고제 법제화는 양날의 칼이었고, 이는 곧 자본과 정권의 무기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법개정 총파업이 패배한 투쟁은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정리해고 제도의 폐지를 위해 제2, 제3의 총파업을 선언하며 투쟁에 나섰다.”
노동운동이 사회운동의 구심이었던 일차적인 이유는 당대의 가장 첨예한 갈등이 모이는 곳이 곧 노동자의 일터와 사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의 해방을 향한 열망은 다양한 사회적 억압의 반작용이었고, 이와 같은 열망은 이후 한국사회의 계급적 이해와 요구를 포괄하는 ‘내셔널센터(민주노조의 중앙조직)’와 ‘산별노조의 건설’을 촉구하는 핵심적인 요인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시기의 사회운동이 지녔던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이다. 노동운동이 ‘민중 항쟁’을 성찰한다는 것은 얼마간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막상 오늘날의 현실에 비추어본다면 그렇게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정권과 자본은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사회운동의 요구를 쉽게 부문화하거나 파편화하여 협상과 거래의 대상으로 삼기에, 사회운동은 자기 이해와 요구에 고립되는 수세적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당대의 노동운동은 연결되고 연대함으로써 대중운동의 구심으로 작용하고자 노력해왔고, 이는 노동자들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표현되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회운동의 의식이 지역이나 단위사업장에 갖히지 않고, 전체 사회의 정치적 의제에 책임과 소명을 감각하며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노선과 정파를 초월하는 어떤 ‘사적(史的) 원칙’이 작용했다는 뜻과도 같다. 이처럼 노동자의 계급투쟁은 역사적 원칙을 발명하고, 집단적으로 그것을 사유하며 또 외화시켜왔다는 점에서 그 운동성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노동해방이라는 구호는 ‘계급투쟁의 축적’이 발명해낸 하나의 상징이자 구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보정당들은 광장투쟁에서 주변부로 밀려났다. 거대한 촛불광장에서 진보정당들의 존재는 미미했다. 대중투쟁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정당들은 조직력이 취약했다. 원내정당인 정의당은 탄핵 외의 정치적 방향을 제출하지 못한 채 보수 정치세력들과 차별성을 보이지 못했다. 진보정당들은 광장투쟁의 연단에서 배제됐다. 광장투쟁 과정에서 진보 정치세력이 보수 양당 정치세력의 대안으로 설 수 있는 정치적 전망을 만들어 내지 못했음을 의미했다.”
“한국노동운동의 두 가지 큰 방향인 민중해방노선과 민족해방노선은 각 노선의 궁극적인 목표인 ‘해방’보다는 단기적인 정치적 생존 전술에 치중했다. ‘NL-PD’ 대립 구도가 역사적 소명을 다하고 낡아빠져 ‘죽은’ 대립 구도로 치부되지만 이러한 전술적인 문제들에서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는’ 대립 구도로 작동하고 있다. 대부분의 운동 세력이 여전히 ‘해방’을 추구하고 있는 한국노동운동은 그 해방이 무엇인지 재정립하고 각자의 강령 문건에만 존재하는 사문화된 변혁성이 아닌 투쟁과 조직의 잣대가 되는 살아있는 변혁성을 정립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최근 수년간 한국노동운동 내 여러 세력이 ‘체제전환’을 들고나오는 것은 이런 요구의 반영이다.”
노동해방은 한국노동운동사의 정체성을 가장 집약적으로 포괄하는 말이다. 역사는 하나의 정체성이며, 이는 역사의 모든 시기에 도사리면서 국면마다 기준이 되는 하나의 ‘상징계(Imaginary)’이기도 하다. 동시에 원칙이라는 말은 언제나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밝히는 구체적인 예시와 근거들이 필요하다. 「한국노동운동사」는 철저하고 꼼꼼하게 이 캄캄한 지도를 밝혀내고 있다.
어떤 도시에는 산업박물관과 노동박물관이 병존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두 가지 관점이 대립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역사책을 넘길 때마다 왕과 영웅들의 얼굴만이 등장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사회는 현실정치와 사회운동의 두 바퀴로 나아가는 것이지 위정자들의 실정이나 선정 따위로 역사를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환하게 웃는 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퍼스트 펭귄, 넥스트 제너레이션, 그리하여 숭고한 AI 시대의 문을 여는 유력한 정치인들까지. 그들의 다양한 표정이 1면을 장식하고, 결국엔 일그러진 만평과 냉소와 훈수에 찌든 칼럼으로 마무리하는 오늘의 역사에 그만 실증이 나버린 탓일까.
문학이나 사회비평이 새로운 세대(Next generation)를 구분하는 핵심적인 방식 중에 한가지는 이전 세대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계승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음악이나 미술, 심지어는 자연과학에도 적용된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역사성을 감각하고 있는가’ 하는 뜻과 같다.
새로운 세대는 창의성이 아니라, 역사성에서 나온다. 시인 김수영은 인간의 역사를 일컬어 ‘거대한 뿌리’라고 했다. 뿌리가 잠식당할 때 식물은 숨을 거둔다. 노동자의 역사도 그렇다. 역사를 파악하는 것은 범인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원칙과 해방은 역사적인 것이고 그 때의 사회운동이 주요하게 지키고자 했던 가치가 무엇인지를 돌이켜보아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세대가 계승해야만 하는 것은 단지 ‘멈추지 않는 투쟁’이 아니라, ‘거대한 뿌리에의 감각’이다. 「한국노동운동사」는 그 뿌리가 아직 살아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가자, 노동해방!”이라고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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