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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오늘] 형평운동 100주년에 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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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1,164회 작성일 23-04-2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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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_포스터_2.jpg

 

형평운동 100주년에 부침

평등한 세상을 위하여

 

*형평운동 :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

 

 

정경원 (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

 

 

백정

조선시대 백정은 도축과 유기 제조를 업으로 살던 이들이다. 고기 섭취량이 늘어나 어느 정도 부를 누리고 사는 이들이 있었음에도 가장 천대받는 계층이 백정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왕조는 민중들의 도전을 받았다. 홍경래 난, 곳곳에서 벌어진 민란’, 동학농민전쟁까지 농민을 비롯한 새로운 사회세력들이 신분제도 폐지 흐름을 만들어갔다.

1894년 법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었다. 문벌과 반상, 문무 차별을 없애기로 했다. 공사 노비제도, 과부 재혼 금지, 조혼제도, 연좌제를 폐지했다. 역인(역리, 역졸), 창우(광대 등), 피공(가죽으로 물건을 만드는 자)을 면천하고 양반의 상업진출을 보장했다. 이때 백정도 면천 되었다. 그러나 제도의 변화가 인식과 대우를 바꾸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요구되었다. 백정은 대표적인 이방인이었고 조선의 철저한 신분 사회에 방치되어 있던 이들이었으며 그들에 대한 차별은 이후로도 오래 지속되었다.

 

형평사

1923425일 진주 대안동에서 회원 80여 명이 형평사발기회를 가졌다. 저울()처럼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는 운동이었다. 그 주체는 백정이었고 지역 활동가들이 함께했다. 수백 년 동안 백정으로 불리던 이들이 서로를 사원으로 호명하기 시작했다.

당시 언론은 형평사 관련 기사를 상세히 다뤘다. 형평사의 창립목적을 요약하면 계급타파와 인간으로서의 실질적 권리 보장이었다.

형평사 출범의 발단에 관한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기록을 보면 진주 대안동에 이학정이라는 백정 출신 자산가가 자제 교육을 위해 수차에 걸쳐 공·사립학교에 입학을 시도했으나 백정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거나 혹 일단 허가를 받아도 백정 자식임이 알려지면 주위의 배척이나 압박을 받아 중도 퇴학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사회의 몰이해를 원망하던 차, 강상호·신현수(조선일보 진주지국장천석구(진주 자작농회 간부) 등에게 백정의 고애를 호소, 같은 백정 출신인 장지필(명치대학 중퇴) 등과 함께 백정들의 신분 해방운동 단체인 조선형평사를 조직하게 되었다.

 

형평에 반대한다

그러나 진주형평사 창립 축하식 다음날 진주지역 농민 2500여 명이 모여 형평사 본부를 습격하고 형평사에 관계가 있는 자에 한하여 백정과 동일하게 대우할 일, 우육을 절대로 비매동맹할 일, 진주청년회에 대하여 형평사와 절대로 관계가 없도록 할 일, 노동단체에서는 형평사를 절대로 관계치 말게 할 일, 형평사를 배척할 일을 결의했다.

이런 일이 진주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1923년부터 1930년 사이 형평사 문제를 발단으로 한 집단 소요들이 많았는데 신문에 실린 것만 20여 건이다. 소고기를 팔기 위해 상점 앞에 서 있던 이를 점주가 내쫓으면서 시작된 진영 장터에서의 싸움(동아일보 1924.5.17.), 강연회 개최 행사에 백정들과 함께 가기를 거부하면서 생긴 김해 청년회 사건(조선일보 1923.8.21.), 부여에서 형평사원과 중국 사람의 말다툼과 난타(동아일보 1926.5.5.), 수원에서 또 형평 농민 충돌(조선일보 1930.6.15.)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충돌이 있었다.

신분해방에 앞장섰던 농민이 형평운동의 주도세력이었던 데서, 당시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의 골이 얼마나 깊었는지, 신분 상승한 집단에 대해 위기감을 느낄 정도의 농경사회 변동 등을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평등한 세상을 위하여

오늘날 정규직 노동자의 이익이 때로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를 공격하기도 한다. 정주노동자의 노동권이 가끔은 이주노동자를 차별하는 논리로 변하기도 한다. 소상공인의 생존권이 알바노동자의 인권을 위협하기도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차별의 굴레는 결국 구조를 은폐한다.

그 사회의 평등함을 확인하려면 가장 차별받는 사람들의 입장에 서 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미 100년 전에 공평(公平)을 이야기했지만 지금도 사회 곳곳의 저울은 기울어져 있다. 누구와 누구의 저울이 기울어진 것일까.

저울의 주인은 언제나 구조 뒤에 숨는다. 우리가 은폐된 이면을 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거나 피하려 하는 한, 차별과 혐오는 이어질 것이다. 형평운동 100주년을 맞아 왜 차별과 혐오가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져 본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류의 본령이다.

그러고로 아등은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여 교육을 권장하며 아등도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을 기하는 것이 본사의 주지이다.

지금까지 조선의 백정은 어떠한 지위와 어떠한 압박을 받아 왔던가, 과거를 회상하면 종일토록 통곡하여도 혈루를 금할 길 없다. ”

- 경남 진주 형평사 발기인 일동, <조선일보> 1923.4.30.

 

 

[사진 설명]

형평사 제6회 전선 정기대회

()선에 산재한 형평 계급아 단결하자

천차만별의 천시를 철폐하자

조선형평사총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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