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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오늘] 아동노동을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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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41회 작성일 26-06-02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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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미국 탄광에서 일하는 아동 노동자들(루이스 하인, 1911)


아동노동을 돌아보며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

 

산업혁명과 함께 등장한 아동노동

 

노동하는 아이가 근면하다”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

산업혁명은 아동노동의 성격을 바꿔놓았다. 교육과 훈련이 아닌 타인의 이윤을 위해 일하는 아동 노동자가 생겨났다. 5살이 되면 성냥공장에서 방직공장에서, 조금 큰 8살이 되면 탄광에서 일했다. 유럽 각지에 성냥왕이 등장했지만, 한편에선 백린에 중독되어 죽어가는 어린 노동자들이 있었다.

 

제어 안 되는 아동노동 사용이 노동력 재생산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고 인도적 여론이 거세지자 국가의 간섭이 시작됐다. 1802, 법으로 아동 노동자의 복지 개선 문제부터 규제를 시작하려 했다. 공장주들은 반대했다. 파산 위험이 있다, 자꾸 간섭하면 공장을 포기할 것이다, 외국으로 공장을 옮기겠다, 협박했다. 이후로도 법은 서너 번 더 제한 규정을 담아 통과했지만, 공장주는 무시했다. 1833년이 돼서야 9세 미만 아동 고용 금지, 13세 미만 아동의 8시간 노동 등이 입법되고 강제됐다.

 

아동노동의 가장 큰 원인은 절대빈곤과 자본의 이윤 추구를 사회적으로 전혀 통제하지 못한 데 있었다. 자본가의 눈에 아이들은 임금이 싸고 부리기 쉽고 손놀림이 재빠르고 파업 참가 가능성이 낮은 노동력일 뿐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작돼 1980년대까지 이어진 한국의 아동노동

 

1911년 일본 공장법이 아동과 여성의 노동을 제한하자 고무신공장, 방직공장 등이 한반도에 세워졌다. 해방 이후 성냥만은 자급자족이라는 구호가 등장할 정도의 필수품이었던 성냥공장은 이천, 수원, 시흥, 군산, 목포, 부산, 신의주, 청진 등지에 세워졌다.

노동조건은 열악했다. ‘조선인촌(성냥)회사 직공 356명 파업기사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임금을 현재보다 5할 이상 인상하여 줄 것, 노동시간을 여덟 시간으로 하여줄 것, 직공들의 식당을 설비하여 줄 것, 무리 해고를 절대 반대, 감독을 쫓아낼 것을 요구했다(조선일보 1932.5.4).

 

아동노동은 광범위했다. 해방 후 이른바 아동노동법(법령 112)19469월 발령돼 한 차례 보류 후 194761일 시행됐다. 법령 발령 후 공장, 회사, 작업장, 요리점, 상점, 이발소 등에서 일하던 14세 이하 아동들은 일을 그만뒀다. 미군정은 아동노동법 시행으로 인해 공장 회사를 떠나게 되는 14세 이하 아동이 남조선에 수만 명이나 된다고 했다. 운수부 철도국에서는 오는 2(보류 전 시행예정일) 시행을 앞두고 이미 2천 명이나 되는 유년공에게 공장을 떠나도록 할 준비에 착수했다고 한다(조선일보 1946.12.3).

 

한국은 법으로 아동노동을 규제하고 있음에도 아동노동 근절은 이뤄지지 않았다. 1970년 청소년들은 농수산업에서 53.3%, 기능공 생산공정 및 단순노무자로 21.1%가 일했다(경향신문 1971.4.21). 해방 후 인구가 급격히 늘어 두 배가 된 상황에서 아이들은 노동자의 부양 부담을 증가시켜 경제성장에 큰 짐이 된다고 분석하는 사회(‘공업화와 노동력’, 동아일보 1971.8.27)에서 아동노동이 사라질 리 만무했다.

 

“14살 소년공이 일이 지겨워 자기가 다니는 공장에 불을 질렀다는 기사가 1988년 한겨레신문(1988.6.28)에 실렸다. 하루 11시간 노동에 지친 소년이 공장만 없어지면 일 안 하고 가고 싶은 학교에도 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단다. 이미 1973ILO는 일할 수 있는 아동의 최저연령을 의무교육을 마친 나이인 15세로 정했다.

 

세계화, 아동노동을 전 지구적으로


부산에 있던 삼화고무는 1974, 미국 나이키 OEM(주문자상표부착방식) 생산을 시작했다. 3천 켤레에서 시작해 수만 켤레를 수출했다. 이어 국제상사, 동양고무, 태화고무도 나이키 운동화 만들었다. 나이키는 운동화로 유명세 반열에 올랐다. 고무신, 군화를 거쳐 운동화 생산으로 한국의 신발산업은 탄탄 가도를 달렸다. 1970~1980년대 부산 신발산업 고용인구는 5만 명이 넘었다.

1990년대 나이키가 더 싼 임금을 줄 수 있는 곳으로 떠나자 한국 신발업체는 줄도산했다. 반면, 나이키는 세계 아동노동에 기대 자본을 확장해갔다. 1995년 이후에야 전 세계 나이키 공장에서 16세 미만 아동 고용을 금지했다.

 

세계화는 자본의 세계화다. 한국의 그 많던 공장은 더 싼 임금을 찾아 떠났다. 방글라데시 의류공장 노동자는 19831만 명에서 1997130만 명으로 늘었다. 자본은 말한다. “개발도상국에서 아동노동은 가난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자발적 노동이다.”

 

612일 세계 아동노동 반대의 날

 

1995416일 파키스탄에서 12세 소년이 피살당했다. 소년은 4살 때부터 부모에 의해 카펫 직조공장에 보내져 일했다. 그는 1994년 스톡홀롬에서 열린 노동문제 회담에 참석해 노동실태를 고발했고 미국 신발 제조사가 수여하는 노동하는 어린이 상도 받았다. 파키스탄의 몇몇 카펫공장들이 문을 닫으며 암살위협을 당하다가 결국 목숨을 잃었다(경향신문 1995.4.20).

 

그즈음 세계무역기구가 새로운 통상의제를 논의하면서 노동, 환경 등 사회적 기준과 무역을 연계하는 방안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14살 이하가 25천만 명으로 추산되는(전 세계 어린이의 20%) 아동노동을 근절해야 한다는 것도 쟁점이었다. 개발도상국 대부분이 격렬히 반대했다(한겨레신문 1996.12.11). 당시 UN 발표에 따르면 세계 모든 어린이에게 무상(초등)교육을 시행하는 데 드는 비용은 전 세계 군비의 1%도 안 되었다.

 

19981년간 아동노동 반대 세계 행진이 있었다. 사회운동 조직들은 필리핀에서 시작해 아시아,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를 거쳐 스위스 제네바까지 행진했다. 19996ILO협정 182최악의 아동노동 금지 협정이 체결됐다. ILO2002612일을 세계 아동노동 반대의 날로 정했다. 산업혁명과 함께 아동노동이 문제 되기 시작한 지 200년이 지나서다.

 

오늘날 거의 모든 국가에 아동노동 규제 법령이 존재한다.

그런데 2024, 유엔은 전 세계적으로 약 13,800만 명의 어린이가 여전히 농장과 공장 등에서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5세에서 17세 사이 어린이 전체의 약 7.8%에 해당하는 수다. 아동 노동자 중 약 40%가 특히 위험한 업무에 종사하고 있단다.

아동노동은 지구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했을 뿐 자본을 위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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