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사람들] 6.10만세투쟁 결정한 강달영의 아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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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조선일보 사옥 위치(위 붉은 원)와 강달영 주거지인 삼각동 28번지 위치(아래 붉은 원)
6.10만세투쟁 결정한 강달영의 아지트
나영선(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일제강점기 3대 대중투쟁을 꼽는다면 무엇보다 1919년 3.1만세운동을 꼽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투쟁은 무엇일까? 시기순으로 말한다면 1926년 6.10만세투쟁과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그것이다. 3.1운동은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수년간 저항해 온 구한말 항일 의병을 피로써 제압하고 무능력하고 무책임했던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 이척, 즉 순종이 제 손으로 한일병합조약에 도장을 찍게 만들면서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다. 폭압적인 헌병통치로 조선을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건설해가고 있었다. 자신감이 붙은 일제는 1915년 경복궁 한복판에서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박람회를 열어 식민지 민중을 포섭하려 했다. 하지만 3.1운동이 전 조선 민중의 독립 의지를 확인시켜 주었다.
3.1운동의 방아쇠는 고종의 죽음이었다. 7년 후 국권 피탈을 무력하게 동의한 순종이 1926년 4월 26일 오전 6시 10분에 사망했다. 일제로서는 3.1운동의 재현을 반드시 막아야 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국가폭력기구를 최대한 동원했다. 순종이 사망한 창덕궁 앞 돈화문에 임시경비사령부를 차리고 기마경찰을 배치했으며, 헌병을 돈화문 앞에서 종로까지 배치해 당시 신문에 “경관으로 성벽을 쌓았다”라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요주의 활동가 164명을 밀착 감시했고, 조선노농총동맹 간부들을 불러 각종 집회 금지를 통보했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 시내 주요부를 헌병 10~20명이 짝을 이뤄 순찰하며 위력을 과시했고 밀정과 정사복 경찰을 배치했다. 조선공산당이 제작한 전단이 발각되고 권오설 등 만세 시위의 준비팀 일부가 체포된 6월 7일 이후에는 의장대라는 이름으로 1만이 넘는 군대를 동원했다.
한편으로 일제는 순종의 죽음을 희석하기 위해 경복궁 안쪽에서 6월 11일 끝낼 예정이던 대조선 전람회를 6월 21일까지로 연장했다. 이 박람회는 서커스, 동물원 등 오락 행사를 무료로 개장했다. 이렇듯 일제는 순종의 장례가 제2의 3.1만세운동이 되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의 5월 2일 결정
조선공산당은 전년도인 1925년 12월 신의주사건으로 타격을 입었지만 새로 선출한 지도부를 중심으로 조직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조직 역량을 회복하고 안정화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김재봉과 박헌영 등 검거된 주요 간부들의 헌신적인 진술 투쟁과 조직 보위 덕분이었다. 물론 주요 간부들의 체포로 타격이 작지 않았지만, 전체 당원과 공청원 대비 5% 미만의 조직원만 검거되고 더 확대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새로 선임된 강달영을 책임비서로 하는 조선공산당은 내부 정비와 조직 확대를 진행했다. 당의 기본단위인 세포단체를 정비해 전국적 규모로 확장하고 있었다. 더구나 1925년 4월 창당 이후 코민테른에 승인을 얻기 위한 노력이 열매를 맺어 1926년 3월 31일에는 코민테른의 정식지부로 승인을 얻어 조직적·물질적·사상적 지원을 받을 수가 있었다. 이는 조선공산당의 지도부에게 큰 힘이 되었다.
원래는 5.1메이데이투쟁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순종의 사망이라는 변수가 생기면서 정세 변화에 따른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해졌다. 바로 6.10만세투쟁이다.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순종이 사망한 지 6일 만인 5월 2일 삼각동 28번지 강달영의 거주지에 모여 대책을 논의, 순종 인산일인 6월 10일에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결정은 많은 고민을 동반했다. 그것은 투쟁에 반드시 동반되는 희생의 문제였다. 더구나 불과 6개월 전 당 중앙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구속으로 조직력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기에 자칫하면 당의 명운이 갈릴 수 있는 투쟁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고민을 깨뜨린 이가 바로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를 맡고 있던 권오설이었다. 권오설은 당면투쟁을 결행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당 중앙은 투쟁에 돌입하기로 했다. 다만 예상되는 탄압에 맞서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조치로 한시적 투쟁기구인 6.10투쟁지도특별위원회(6.10투쟁특위)를 설치하고 위원장에 권오설, 위원에 박민영, 이지탁을 선임했다. 회의가 열린 강달영의 서울 거주지는 그가 발령받은 ‘ㅁ자’ 모양의 한옥을 사옥으로 쓰던 조선일보(관철동 249번지)와 청계천만 건너면 지척이었다. 집 바로 옆으로는 남산에서 발원한 창동천이 흐르고 있었다. 방음이 잘 안 되는 전통 가옥의 특성상 회의는 큰 소리로 진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강달영 책임비서 시절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가 열린 회의 장소는 신중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비밀결사의 최고위급 간부들의 회의인 만큼 장소에 신경을 써야 했다. 신문조서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이 자주 이용한 회의 장소는 크게 세 곳이었다. 즉 경운동 구연흠의 집, 종로6가에 있는 동아일보 영업국장이자 취제역(오늘날의 이사)을 지낸 양원모 자택의 사랑방, 그리고 바로 강달영이 머무는 삼각동이 주요 회의 장소였다. 세 곳 중 두 곳은 당 중앙간부의 자택임을 알 수 있다. 책임비서 강달영 외에도 구연흠은 당의 중앙검사위원이었다. 양원모는 김철수, 장덕수, 신익희 등과 와세다대학 동기였으며 신아동맹단의 자금모집책을 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최소한 집주인이 밀고할 우려는 없는 장소였다.
투쟁특위 가동, 자금 마련부터 인쇄물 제작과 가두시위까지
당 중앙집행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6.10투쟁특위가 본격적으로 가동됐다. 6.10투쟁특위 위원 3인은 매일같이 모여 회의를 진행했다. 특위를 구성한 인물들은 헌신적이고 유능한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은 인쇄물 작성, 배포망 구축, 국외 망명 중인 상해 중앙간부와 연락, 운동자금 마련 등의 사업과 가장 중요한 대중 시위를 전개할 계획을 작성했다. 학생 조직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지도부에 포진한 당원을 중심으로 당일 가두시위를 담당할 조직을 구성케 했다. 제국의 군대와 경찰이 빽빽이 들어선 삼엄한 경계 속에서 가두시위는 체포는 물론이고 가혹한 고문이 기다리고 있는 역할이었다. 굳센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 역할을 맡은 이천진, 이병립, 이선호 등은 학교별로 시위 장소를 나누어 당일 조직화에 온 힘을 다했다.
화요회 계열이 주축이 된 조선공산당과 함께 당시 조선 사회주의운동의 양대 산맥은 서울청년회 계열이었다. 따라서 6.10투쟁특위는 당연히 서울파에게 공동투쟁의 가능성을 타진했으나 서울파의 거절로 성사되지 못했다. 투쟁에 조직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세력은 크게 둘이었다. 당의 민족통일전선 방침에 따라 3월 초부터 의사를 타진해 오던 천도교 내 권동진파 세력, 그리고 조선공산당이 직접 동원할 수 있는 세력이었다.
6.10투쟁특위는 조선공산당의 당원이며 인쇄 노동자인 민창식, 박래원을 중심으로 비밀 인쇄소를 꾸려서 시위 당일 뿌릴 유인물 인쇄작업에 돌입했다. 이들은 인쇄 기계 2대를 구입해 인쇄하는 도중 주변에서 위조지폐 제작의 의심 속에 장소를 옮기면서까지 초인적인 노력으로 5월 말까지 무려 6만 매의 격문과 전단의 인쇄를 마쳤다. 인쇄물을 배포할 전국적 선전망도 구축했다. 특위는 전국 13개도 58개 지역에 배포망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천도교의 조직선과 학생조직, 사회운동 조직선이 가동된 성과였다.
투쟁사업에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코민테른에서 사업비가 교부되긴 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당시 조선공산당이 코민테른에 청구한 예산은 1년 기준 363,800원이었는데 모두 승인된 것은 아니다. 1926년 8월 1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진행된 강달영의 신문조서를 보면 청구한 예산 가운데 10만 원 내외로 승인받았다고 한다. 그중 강달영이 체포되기 전까지 교부된 금액은 모두 3,600원 정도라고 하니 승인 예산의 3.6% 정도만 교부된 것이다. 투쟁사업에 쓸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자금의 출처를 둘러싼 기록은 엇갈린다. 공식 사료에는 상해 망명 그룹의 자금이 유입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당시 6.10투쟁특위 위원이었던 이지탁의 회고는 다른 정황을 전한다. 실제 출처는 권오설의 동향 지인이자 운동 지지자인 이중현이라는 것이다. 이지탁은 이중현이 부친상으로 받은 유산 중 1천 원을 내놓았다고 증언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권오설은 이중현을 보호해야 했다. 그래서 취조실에서 일부러 상해의 김단야를 언급하며 허위 진술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자금의 출처가 어디였든 간에, 6.10투쟁특위에 속한 노동자, 학생 그룹은 비상한 각오로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위에 열거한 그 많은 사업을 불과 20여 일 만에 차질 없이 진행했다.
제국 군대와 경찰 경계 속에 만세투쟁 성사
1926년 6월 6일, 모든 준비가 순조로워 보였지만 우연한 계기로 인쇄물이 유출 발각되면서 검거 선풍이 시작됐다. 6일 박래원을 시작으로 7일 권오설까지, 투쟁특위 지도부 3인이 모두 검거됐다. 고려공산청년회 소속 학생지도부들은 이처럼 긴급하고 위중한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임무를 저버리지 않았다. 학생지도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천진은 뒷날 이렇게 증언했다. “삐라조차 모조리 빼앗겼고 지도자를 전부 잃은 우리들은 운동의 재출발을 부득이 계획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자취방에서, 산속에서 유인물 1만여 매와 태극기 60여 장들을 제작해 당일 시위에 사용했다.
[사진] 6.10만세운동 시위도(출처 : 6.10만세운동 기념사업회)
6.10만세투쟁은 경성 시내 곳곳에 깔린 경찰과 밀정, 군대의 감시와 동지들의 연이은 검거에도 끝내 이루어냈다. 일제가 그토록 봉쇄하고자 했던 순종의 국장은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헌신으로 거대한 항일투쟁의 무대가 되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혹독했다.
조선공산당은 이 투쟁으로 조직이 와해될 정도의 극심한 타격을 보았다. 당일 시위의 선두에 선 학생 그룹은 2백여 명가량이 현장에서 연행돼 구속됐다. 먼저 잡혀간 권오설, 민창식, 박래원, 박민영, 이지탁 등을 시작으로 수사의 창끝은 조선공산당 전체를 직접 겨누었다. 7월 17일에는 책임비서 강달영이 잠행 중에 체포됐고 8월 8일 권오설의 후임으로 공청을 책임졌던 전정관까지 검거됐다. 한 해 전인 1925년 12월에 시작된 조선공산당 조직 사건은 1926년 9월 7일 검사국에 송치될 때까지 검거자 수가 220명을 헤아렸다.
이중 조사 과정에서의 고문과 그 후유증으로 권오설, 박순병, 백광흠, 박길양, 권오상이 사망했다. 책임비서 강달영은 진술 과정에서 머리를 날카로운 모서리에 찧는 등 목숨을 건 조직 보위 투쟁을 벌였고 고문과 자해의 후유증으로 정신 이상을 겪다가 해방을 3년 앞둔 1942년 세상을 떠났다. 이들 모두 참혹한 죽음이었다.
‘삼각동 28번지’에서 지켜낸 정신의 계승
경성 한복판의 ‘삼각동 28번지’에서는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가 순종 국장이라는 역사적 계기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이후 숱한 혁명가들이 검거되고 조직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이 집에서 내려진 결정은 식민지시기 최대 규모의 대중투쟁 가운데 하나인 6.10만세투쟁으로 이어졌다.
투쟁의 피해만을 놓고 볼 때 5월 2일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하지만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투쟁 속에서 조직하는’ 원칙을 견지했다. 6.10만세 투쟁 과정에서 숱한 투사들을 배출했고, 제국의 야만에 꺾이지 않는 투혼은 불과 3년 뒤 광주학생운동에 또렷하게 계승됐다. 1920년대 중후반에 벌어진 이 위력적인 대중투쟁은 1930년대에도 전국 곳곳에서의 당 재건 운동, 동맹파업, 소작쟁의 등의 밑거름이 됐고, 해방되던 1945년까지 민족해방과 새로운 사회의 전망을 여는 기반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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