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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시의 TV 읽기] 누가 교권을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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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54회 작성일 26-06-23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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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의 한 장면.

 

[다섯 시의 TV 읽기] 누가 교권을 말하는가?


양돌규 (노동자역사 한내 운영위원)

 

넷플릭스에서 65일 공개된 시리즈 <참교육>10편으로 막을 내렸다. 한국에서 넷플릭스 시청률 1위뿐만 아니라 비영어권 45개국에서 1위를 찍는 기염을 토했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참교육>을 둘러싼 이야기는 도리어 무성해졌다. 특히 이번 6.3 지방선거 경기도교육감 당선자 안민석이 라디오에 출연해 교권보호국의 현실판이라 할 수 있는 교육활동 보호국도입의 필요성을 언급한 이후 논쟁은 격화됐다. 안민석 당선자는 폭력은 절대 안 된다면서도 교사들 중 특수부대, 해병대, 특전사 등 출신들이 의외로 많으니 이런 교사들 20~30명을 확보해 학교와 교사가 통제할 수 없는 사건에 투입할 수도 있고 이들이 계도와 훈계를 통해 학교 분위기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면서 공론화를 통해 구체화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정근식 서울교육감 당선자는 파시즘적 발상이라며 비판적 의견을 밝혔고, ‘정치하는 엄마들참교육을 위한 학부모회등도 목소리를 높여 안민석 당선인의 구상은 학교 문제의 책임을 학생 인권의 확대, 학부모의 개입, 교권 약화로 돌리며 강력한 통제와 징벌에서 해법을 찾는다고 비판했다.

 

경기도판 교권보호국이 현실화될 것 같지는 않다. 워낙 비현실적인 구상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미디어에 민감한 정치인 출신 교육감이 드라마의 흥행에 기대어 언론플레이를 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잘해봐야 교권 보호와 관련한 전담 부서 정도가 만들어질 수는 있겠지만, 그 역시 뭐 대단한 실효성을 가질 것 같지는 않다.

 

어쨌거나, 그런 현실의 논란과 상관없이 많은 이들이 시리즈 <참교육>을 빌어서 참교육’, ‘교권’, ‘학교 현장’, ‘전교조등에 관한 기사, 칼럼, 게시물을 각종 매체, SNS에 쓰고 있다.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대부분 글에는 공감되는 요소가 담겨 있었다. 교사, 학생, 활동가 등이 길게는 수십여 년, 짧게는 십여 년에 걸쳐 교육 현장에서 벌어졌던 일을 돌아보고 현실을 진단하는 내용이었다. 그 모두가 진실의 일부임은 물론이다.

 

사적 복수와 범죄 수사물의 혼종

 

시리즈 <참교육>은 동명의 웹툰 <참교육>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드라마 제작을 앞둔 20257, 전교조 등 62개 교육시민단체가 넷플릭스 한국지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제작 중단을 요구했다. 이는 웹툰 <참교육>이 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인종 비하 등의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 학생 인권의 신장이 교권 침해 현실로 이어진 것처럼 묘사하며 체벌금지법때문에 교권이 붕괴됐다는 허구적 설정도 비판했다. 이런 비판과 제기 덕택인지 1년여가 지난 후 공개된 드라마는 수정과 보완에 상당한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이고, 논란보다는 보편적 공감을 훨씬 더 많이 끌어냈다.

 

예컨대 시리즈 <참교육>에서 교육부 장관은 이렇게 말한다. “교권보호국은 학생들과 싸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괴물들과 싸우려는 겁니다. 괴물은 괴물로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폭력은 학교 수준을 넘어섰는데 교사들에게 분필이나 들고 싸우라는 겁니까?”

이 대목에서 교권보호국은 마치 학생들과 전면 전쟁을 선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10편까지를 보면 교권보호국과 대립하는 것은 비단 괴물이 되어버린 학생들, 가령 학폭 가해자들과 사이버불링을 행하는 학생들만이 아니다. 교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학부모, 시험 문제를 유출하면서 뒤로는 학원을 운영하는 교육감 출마 야망을 품은 교사, 대치동으로 이사와서는 자녀에게 약을 먹여가면서 의대 진학으로 몰아가는 어머니, 각종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면서 피해자들과 학교와 사회를 조롱하는 촉법소년 4인방, 학교 현장에 광범하게 퍼져 가는 온라인 도박 조직, 그리고 궁극의 빌런으로는 학교 담장을 넘어 조직된 마약 네트워크 등이 등장한다.

 

마약 카르텔의 정점에 있는 조규철(이봉준 분)은 나화진(김무열 분) 감독관의 약혼녀이자 최강석(이성민 분) 교육부 장관의 딸인 교사 최가윤(하영 분)을 살해한 살인범이기도 하다. 조규철이 다시 학교로 돌아오고, 이런 내막을 알게 된 국회의원 황기태(김종수 분)교권보호국사적 복수를 행하는 기관에 불과하다며 폐지를 주장한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그 같은 폐지 주장에 별로 동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어차피 허구이기도 하지만, 드라마는 예컨대 사적 복수논란보다는 정의의 실현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교권보호국으로 대표되는 정부의 역할이라고 믿기 때문인 것 같다.

 

교권국은 선생 편도 학생 편도 아닌 피해자의 편입니다. 학생이 학생 역할을 하지 못해서 선생이 선생 역할을 하지 못해서 피해를 본 그 누군가를 위해 교권국은 존재합니다. 이것이 사적 복수라면 예 맞습니다. 법이 못하는 걸 누군가는 나서서 복수라도 해줘야죠. 그래야 피해자들이 숨 쉬고 살지 않겠습니까.”(4, 최강석)

 

그래서 드라마 <참교육>은 한국의 학교 현장에 대한 작품이라기보다는 범죄수사물이라는 장르물, 그리고 근래 많이 제작되는 사적 복수물’, 예컨대 <돼지의 왕> <글로리> <모범택시 1, 2, 3>의 계보와 더 친연성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대신 완전한 사적 복수가 아닌, 국가 기관에 의한 정의의 실현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드라마 <참교육>은 바로 학교를 배경으로 한 경찰놀이, 다시 말해 범죄수사물이라는 것이다. 그 점을 분명히 할 때 장르적 허용이 가능하다. 예컨대 장르로서 범죄수사물은 여러 위기와 긴장의 시간을 거쳐 진범이 잡히고, 피해자를 위로하고, 정의가 실현되면 시원하고 통쾌함을 던져주는데 드라마 <참교육>은 딱 그런 사이다 같은 응징을 행한다. 교권보호국이 참교육하는 방식은 자신이 한 행동을 고스란히 돌려받음으로써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깨닫게 하는 것, 그게 바로 교권국이 추구하는 진짜 교육이다라는 대사처럼 정확히 거울 치료의 방식인데, 이는 다분히 극적인 장치일 뿐이고 실제 실현 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 거울 치료의 방식으로 정의 실현의 방식을 제한한 것이 웹툰과 드라마의 차이이고 이는 논란을 피해가기 위한 영리한 방도였을지도 모른다.

 

대부분 시청자는 그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딱 그 정도의 후련함을 느끼는 것 같다. ‘초법적 권한을 가진 교권보호국이 현실에서 가능할 거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그런 정부 기관이 정의를 실현해주는 데에 통쾌해하는 것이다. 사적 복수에 대한 열광의 배면에는 이처럼 정의가 국가에 의해서 실현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

 

두 가지 교권, 누구의 교권인가?

 

그런데 TV를 끄고 그냥 잊고 지내기에는 마음 한구석에 찝찝함이 남은 사람들이 있다. 찝찝함이 모두 같은 이유일 수는 없겠으니 내 경우만 한정해서 정리해두도록 한다.

 

교권은 넓은 의미의 규정도 있지만 좁은 의미에서 법이 인정한 교사의 교육할 권리 및 권한을 의미하고 초중등교육법 등 여러 관련 법령을 통해서 그 권리 및 권한의 내용이 규정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교권이 학생, 학부모 등에 의해 침범당하면서 교육할 권리의 실현, 즉 교육 현장에서 교육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방해받고 특히 학급 붕괴, 교실 붕괴 현실에서 교사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 수년간 강조돼 왔다. 급기야 <참교육>에서처럼 국가가 교권을 수호하고 학교를 지키는 역할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교육사를 돌아보면 국가가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가능한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19604.19 혁명 후 결성된 교원노조가 5.16 군사쿠데타로 좌절된 후 제도교육은 반공주의와 군사주의를 관철시키는 국가와 온갖 비리로 만연한 사학 족벌체제에 의해 지배돼 왔다. 그 과정에서 교육할 권리, 교사의 권리 따위도 처참하게 짓밟혔다. 이에 저항하는 가냘픈 움직임이나 목소리는 교권 수호라는 수사를 동원하곤 했는데, 이때 교권은 바로 국가 폭력과 사학재단의 전횡으로부터의 보호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교권을 짓밟는 한국의 국가 역시도 교권을 들먹이곤 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19852, 대통령 전두환은 문교부의 업무 계획을 보고 받는 자리에서 지난해에는 일부 학원에서 방화 기물파손 폭력 수업 방해 등 불법 사례가 없지 않았다고 말하고 학교 당국은 면학 분위기를 해치고 선량한 다수 학생에게 피해를 주거나 교권을 유린하는 행위는 절대로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며 관계 당국도 법에 따라 엄중 조처해야 할 것이라고 지시했다(경향신문, 198529). 당시는 교육개혁심의위원회 출범, 7.31 교육개혁 조치, 학원자율화 등의 정세가 전개되는 시절이었고 1980년 광주항쟁 이후 유화국면이 열리는 시점이었다. 대학에는 총학생회가 재조직되고 민주화운동의 한 축으로서 학생운동 세력이 대중적으로 진출하는 시점이었다. 바로 그러한 움직임에 쐐기를 박고자 하는 군사독재 정권이 전가의 보도처럼 들고나온 것이 바로 교권이었다.

대통령의 지시가 나왔으니 뒤이어 문교부 장관 차례다. 얼마 뒤 손제석 문교부 장관은 학원의 정치장화를 배격하고, 대학생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불용하겠으며 학내 질서 유지에 관계되는 일체의 불법행위에 대해 교권은 제때 빠짐없이 개입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학내 기물파손, 폭력, 화염병 투척, 도서관 점거, 학교 시설의 아지트화, 타 학생의 수업 방해 등에 대해서는 사법적 판단과 관계없이 학칙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밝혔고 이후 학원안정법을 추진하기도 했다. 1980~1990년대 내내 대학에서의 학원자율화 투쟁은 늘 교권의 벽에 부딪혔고, 군사정권과 사학재단의 편에 빌붙어 일신의 안위만을 구했던 어용 교수들은 재단 비리 분규 때마다 교권 추락을 개탄하곤 했다.

 

이처럼 상반된 교권 개념을 들고나와 대립이 이루어진 것은 대학에서만이 아니었다. 친일파의 작품으로 가득찬 국어 과목이나 반공주의, 실증주의 역사 과목 같은 국정교과서를 달달 외워야 하는 살인적인 입시 교육 체제에서 학생들에게 몽둥이질해가면서 통제해야 했던 교사들의 반성적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1985<민중교육>지 사건과 19865.10 교육민주화선언이었다. 이는 19876월항쟁 이후에도 이어져 1988년 민주교육실천 전국교사협의회 출범, 1989년 전국교직원노조 출범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때마다 전두환-노태우 군사정부와 이에 대항하는 교사, 학생, 학부모들이 모두 들고나온 것이 교권이다. 한국의 국가와 문교 당국은 일부 좌경 세력의 책동으로 교육 현장에서 교육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주장했고, 민주화운동 세력은 반대로 교육 현장의 자율성이 국가의 강압에 침해받고 있다고 보았다.

 

발명되어야 할 교권과 참교육

 

당시 정부 입장에 가까웠던 서울대학교의 한 교육학 교수는 아쉬운 교권 존중이라는 제하의 한 칼럼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교사의 전문적인 역량은 교사의 권위가 인정될 때 가능해진다. 가르치는 사람의 권위가 인정되고 존중될 때 그의 전문적인 역량은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권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물론 교권이라는 개념 속에는 권위만이 아니다. 가르치는 사람의 권리가 포함된다. / 그러나 교권은 원칙적으로 교육의 권위를 뜻하며, 바로 그 권위는 교육의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교사의 권위를 학생이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교사의 가르침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교사의 권위는 바로 교사에 대한 존경으로 직결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동아일보, 1987514)

 

그러면서 그는 학부모가 교사에 입에 담지 못할 언동으로 행패를 부리거나, 학생들에게 단체 기합을 좀 줬다고 해서 학부모의 항의 전화가 빗발친다든가 하는 사례를 열거하면서 오늘날 청소년들이 너무 과보호되고 있다고 혀를 찬다. 또 교사의 가르치는 권위가 전혀 인정되고 있지 못하다고 개탄한다. 그러면서 학부모, 나아가 사회 전체가 교권을 존중하는 사회 풍토 조성을 강조하면서 글을 맺고 있다.

 

이 칼럼은 21세기 드라마 <참교육> 붕괴된 교권상황, 그리고 현실 인식과 유사하지 않은가? 안민석 경기도교육감 당선자의 상황 인식과 거리가 없어 보이지 않는가? 오늘날 대체로 교권을 이와 같은 정도로 이해하고 있지 않나?

 

바로 이 칼럼을 쓴 자가 2년 후에 한국의 유사 이래 최대 교권 말살 사건이었던 1989년 전교조 교사 1,500여 명 해고 사태의 장본인인 정원식 문교부 장관이다. 그리고 그는 또 2년 후인 1991년 국무총리 서리로서 교사 대량 해직을 고등학교에서 지켜봤던 외국어대 학생들로부터 밀가루와 달걀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이 학생들을 두고 스승에게 폭력을 가한 패륜아라는 낙인을 찍는다. 이 낙인을 찍을 때 국가와 문교 당국에게 교권은 이미 주어져 있는 신성한 어떤 것, 가령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마라고 말할 때의 그 맥락 속에 있었다.

 

그러나 교권 유린의 대표적 장면은 역시 19895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결성되던 날, 처음 결성 장소로 알려졌던 한양대에서 공권력에 의해 굴비 엮듯 끌려 나오던 교사들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이 교사들에게 교권신성한 어떤 것은 아니었다. 1970~1980년대 내내 비참한 교육 현실, 학생들의 죽음, 입시 지옥, 가난한 이웃들의 현실을 외면하거나 침묵한 데 대한 반성을 기반으로 국가로부터의 부당한 간섭을 뿌리치고, 촌지나 받고 사학재단의 비리에 침묵하는 비겁을 넘어서서,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신뢰와 믿음을 얻는 실천 과정에서 획득되어야 할 그 무엇에 가까웠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에게 교권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로부터 자주적으로 구성해야 하는 실천적 과제였고 동적인 운동의 지평 위에서 구체화해야 할 그 무엇이었다. 어떤 것을 가르칠 것인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무엇을 위해 가르칠 것인가? 이 모든 것을 탐구했고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구체화한 것이 민족, 민주, 인간화로 요약되는 전교조의 이념이었다.

 

전교조는 그런 교사들의 존재론적 결단’, ‘실천적 결단이 있었기에 광범한 지지와 엄호를 받을 수 있었다. 좌경 용공 교사라며 길길이 날뛰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많은 민중, 시민은 적어도 전교조 교사는 아이들을 차별하거나, 두들겨 패거나, 촌지를 밝히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이런 교사들의 차이를 직접 경험했던 학생들 역시 교사들의 결단에 공명했었기에 연인원 50만 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각 학교에서 혹은 각 지역의 연대집회를 통해서 구속, 퇴학, 정학을 불사하고 시위와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전노협을 비롯한 노동자들과 농민들도 마찬가지였다. 1989924일에 열린 전교조 탄압 저지와 합법성 쟁취를 위한 국민대회가 전국 21개 시·도에서 열렸고 이 이후 전교조 사수를 위한 광범한 민중연대가 기반이 되어 몇 년간의 전교조 법외노조 시절을 건널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전교조 행사라면 팔을 걷고 나섰던 수많은 노동조합과 단체, 학생들을 기억한다. 적어도 당시 전교조는 교사들만의 노조는 아니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다. 이 글에서 그 시간을 다 담아낼 수는 없겠다. 다만 지금은 전교조가 제1노조도 아니거니와 전교조가 내걸었던 참교육민족, 민주, 인간화교육으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두들겨 패서 가르치거나 혼쭐을 내는 인과응보같은 식으로 변용해서 광범하게 쓰이는 현실이다. ‘참교육의 변용이 전교조의 효용에 대한 일종의 회의의 결과라면 교권보호국2000년대 이후 신장되고 변화되어 온 학생 인권과 교육 현장의 변화에 대한 거대한 백래시의 기획처럼 보인다.

이런 가운데서 참교육이라는 어휘를 바르게 써야 한다, 같은 소리를 해봐야 아마도 언중의 용법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참교육을 고집하든 아니든 전교조의 실천적, 운동적 노선과 이념을 돌아보고 다시금 질문을 던져보는 건 어떨까? 21세기 글로벌하게 학교가 붕괴된 이 시대에 운동적, 실천적으로 새롭게 구성해야 할 교권이란 무엇인가? 우리 머릿속에 남아 있는 교권도 아직 정원식의 그것 정도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밀가루와 계란 세례를 좀 받아야 하지 않을까. 참교육 좀 당해도 싸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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