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우리의 이야기] 산재보험제도의 거대한 개미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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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산재보험 개악 대응 함께] 2024년 6월 산재보험 60주년 노동안전보건운동단체 기자회견
‘의학적 전문성’ 장벽 허물고 당연한 치료권 보장하라
이은주(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전문성이라는 비정한 미로, 행정적 ‘개미굴’에 갇힌 노동자
현행 산재보험제도의 변화과정과 운영 현실을 마주하면 거대한 개미굴이 연상된다. 그간 정부와 근로복지공단은 ‘신속성’과 ‘공정성’이라는 두 개의 가치 중 늘 공정성이라는 미명 아래 선별과 배제의 잣대를 더욱 엄격화해 왔다. 특히 그 잣대는 언제나 ‘전문성’과 ‘의학적 판단’이라는 무소불위의 칼날을 휘두르며 이루어졌다. 전문의와 의학박사들이 구축해 놓은 난해한 의학 용어와 차갑게 수치화된 데이터 앞에서, 노동자가 평생 일터에서 온몸으로 겪어낸 노동의 역사와 구체적인 고통의 언어는 철저히 부정당한다. “이 질병과 업무의 연관성을 의학적으로 입증하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 서는 순간, 노동자는 자신의 아픔조차 스스로 증명하지 못하는 지독한 무력감을 느끼며 한없이 초라해지고 작아질 뿐이다. 그 엄격한 잣대가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이 바로 산재보험의 거대한 ‘행정적 개미굴’이다.
이 개미굴은 무엇보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은밀함을 가지고 있다. 겉보기에는 노동자 보호를 위해 가장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판단을 내리겠다는 그럴싸한 명분과 공정의 탈을 쓰고 있지만, 그 내부로 한 걸음만 들어가면 일반인은 도저히 구조를 알 수 없는 수많은 하부 위원회와 소위원회가 마치 지하 동굴처럼 복잡하게 끝없이 뻗어 있다. 2008년 도입된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을 시작으로 질병소위원회, 요양검토회의 등등 이름조차 낯선 기구들이 개미굴의 어두운 통로마다 장벽을 치고 서 있는 형국이다. 공단이 자랑하는 그 정교한 ‘전문성’이란, 실상 약자를 품기 위한 따뜻한 손길이 아니라 철저히 노동자를 골라내고 쳐내기 위해 설계한 세련된 방패일 뿐이다. 동시에 이 굴은 한 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는 거대한 덫이다. 모래 구덩이에 빠진 곤충을 집어삼키는 ‘개미지옥’처럼, 노동자가 아픈 몸을 이끌고 입증 서류를 쥐어 짜내 발을 들이는 순간, 기다리는 것은 끊임없는 재심사와 심의의 무한 루프다. 전문성과 객관성을 표방하는 이 절차들은 실상 비정한 미로이며, 노동자의 고통과 생계는 파묻히고 행정편의주의만 남게 됨으로써 노동자를 지치게 만들고,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잔인한 과정이 된다.
이 거대한 개미굴 시스템 속에서 몸이 아픈 노동자는 제도의 온전한 주체가 되지 못한다. 그저 굴의 체제를 유지하고 가동하기 위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하나의 ‘서류 조각’ 혹은 무력한 ‘개미’처럼 취급될 뿐이다. 역학조사라는 명목으로 몇 달, 위원회 심의 연기로 또 몇 달이 흐르는 동안 시간은 철저히 공단의 편이며 노동자의 적이 된다. 이 어두운 개미굴 안에서 노동자가 매일 마주하는 실존적인 고통과 당장 생계를 위협받는 신음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파묻힌다.
일터에선 골칫거리…공단에선 의심 환자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한민국에서 노동자가 일하다가 몸이 아플 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 감정은 아픔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한국 사회에서 산재를 신청하겠다는 결심은, 목에 주홍글씨 걸기를 감내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래전 현장 노동자한테서 들었던 이 처절한 말은, 관료주의적 개미굴로 진입하기도 전에 현장에서 이미 노동자의 숨통을 조여오는 잔인한 현실을 폭로한다.
산재를 거부하는 회사 측은 “왜 유독 너만 유별나게 구느냐”며 노동자 개인의 책임이나 나약함으로 몰아붙인다. 앞으로도 이 바닥에서 계속 일하고 싶다면 산재 대신 적당히 돈 몇 푼 쥐여주는 ‘공상’으로 합의하자며 은밀하고도 집요하게 종용한다. 법으로는 산재 은폐를 엄격히 처벌한다고 하지만, 현장의 문법은 여전히 법보다 멀고 가혹하다. 결국 생계와 고용 불안이라는 현실에 발목이 잡힌 노동자는 일터에서는 ‘유별난 골칫거리’로, 행정 기구 앞에서는 ‘부정수급을 꾀하는 의심 환자’ 혹은 ‘상병이 없는데 치료받으려는 가짜 환자’로 전락하는 주홍글씨를 목에 건 채 개미굴 앞을 서성이게 되는 것이다.
산재보험을 운영하는 주체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기본적으로 ‘노동자에 대한 불신’이 짙게 깔려 있다. 1964년 우리나라에 최초로 도입된 사회보험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이 무색하게도, 산재보험은 발전의 역사 내내 노동자를 따뜻하게 보호하는 울타리가 아니라 기금을 방어하고 통제하는 문지기 역할을 자처해 왔다. 공단이 휘두르는 의학적 잣대의 부조리함은 수치로도 명백히 증명된다. 근로복지공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기준 공단의 행정소송 패소율은 23%로, 5년 전(13.1%)보다 두 배 가까이 급증했다. 주목할 점은 소송의 패소 원인이다. 사실관계의 차이가 아니라 ‘상당인과관계’를 판단하는 법령 해석의 차이가 무려 50.2%로 절반을 넘었다. 공단 스스로도 “공단은 의학적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업무 관련성을 판단하는 반면, 법원은 규범적·종합적으로 판단한다”고 인정했다. 법원은 이미 사회통념에 기초한 ‘규범적 판단’을 확립해 놓았음에도, 공단은 닫힌 의학 자문의 틀에 갇혀 노동자를 사지로 몰아넣고 있었음을 자백한 꼴이다.
그럼에도 최근 정부는 또다시 의사 중심의 ‘업무상질병의학자문위원회’를 신설하겠다는 시행령 개정안을 내놓았다가 많은 비판과 우려로 일단 철회했다. 업무와 재해 간의 인과관계 판단에 규범적 관점을 명문화하겠다는 국정과제는 온데간데없고, 대안적 방안으로서 실효성 있는 당연한 치료권을 검토하지 않은 채 법률가나 노동자 측의 참여를 철저히 배제하면서, 오직 ‘의학적 입증’의 잣대만 더 굳건히 세우려 하고 있다. “의학적으로 증명된 것만 인정하겠다”는 닫힌 사고는 규범적 책임을 회피할 또 하나의 교묘한 퇴로이자, 거대한 개미굴 위에 옥상옥을 얹는 기만일 뿐이다.
산재보험이 존재하는 진짜 이유는 어디로 갔는가. 일하다 병든 노동자가 생계 걱정 없이 조속히 치료받고, 무사히 일터로 복귀하도록 돕는 것이 이 제도의 유일한 존재 이유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특히 반도체·전자산업처럼 수백 종의 화학물질이 복합적으로 사용되는 첨단 사업장에서, ‘불확실한 위험’의 영역은 나날이 넓어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발암 요인인 ‘흡연’조차 특정 암과의 인과관계를 의학적으로 명백히 밝히는 데 수십 년이 걸렸는데, 국내 유통 화학물질의 대부분이 발암성 정보조차 없는 현실 속에서 노동자에게 의학적 완벽성을 증명해 오라는 것은 애초에 산재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몸이 아픈 노동자가 생계를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다시 일터로 나가거나,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파산에 이르는 현실은 이 제도의 파산을 의미한다.
이뿐 아니라 농림어업의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여전히 산재보험 적용이 제외돼 있다. 게다가 시대가 변하고 노동의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플랫폼 노동, 프리랜서, 특수고용직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노동자들이 일터를 채우고 있지만, 산재보험의 시계는 여전히 과거의 기준에서 멈추어 있는 형국이다. 이들은 똑같이 일하다 다치고 병들어도 자신이 ‘노동자’임을 증명하는 서류 한 장을 갖추지 못해 개미굴 입구에서조차 쫓겨난다. 사각지대에 방치된 이들에게 산재보험은 실재하지 않는 신기루일 뿐이다. 위험의 외주화를 넘어 ‘위험의 무권리화’ 판치는 현실 속에서, 산재보험은 가장 취약한 노동자들을 고의로 누락시키며 그늘을 넓혀가고 있다.
‘위험의 무권리화’를 넘어, 노동자의 따뜻한 ‘방패’로
플랫폼·특수고용직 노동자가 서류 미비로 배제되지 않도록, 형식적 근로계약서 유무가 아닌 ‘실질적 종속성 및 소득 의존도’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플랫폼 기업이 산재보험료를 의무 분담하도록 시스템을 개조할 때, 비로소 ‘위험의 무권리화’를 막을 수 있다.
산재보험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패러다임의 전면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국민이 아프면 어느 병원에 가든 치료비의 일부만 내고 당연히 치료부터 받듯이, 일하다 다치고 병든 노동자 역시 고용의 형태나 계약서 유무와 상관없이 ‘당연한 치료권’이 최우선으로 보장받아야 한다. 산재의 문턱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처리 절차를 대폭 간소화해야 한다. 국가가 먼저 치료를 보장하고 노동자의 생계를 안정시킨 뒤, 까다로운 상병 심사와 인과관계 규명은 입증 역량을 가진 국가와 위험의 원인을 제공한 기업 간의 책임 공방으로 재구조화하는 것, 그것이 사회보험이 져야 할 마땅한 사회적 책임이다.
제도 개선의 방향은 의학의 잣대로 판단의 공간을 좁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구체적인 삶을 품는 규범적 공간을 넓히는 방향이어야 한다. 겹겹이 파헤쳐진 행정의 개미굴을 메우고 통제의 장벽을 허물 때, 비로소 일터에서 다친 노동자들이 목에 걸린 잔인한 ‘주홍글씨’를 벗어던지고 온전히 회복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돌아보면, 파괴된 몸으로 일터의 유해성을 증명하는 증표가 되어야 했던 노동자가 다시 병든 몸을 이끌고 불의에 저항하며 싸워온 그 투쟁의 역사야말로 이 비정한 산재보험이 그나마 제 기능을 하도록 밀어붙인 서글픈 동력이었다.
법과 제도는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한 고정물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이자 기울어지기 쉬운 ‘저울’에 가깝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권력과 관료주의라는 중력에 이끌려 기득권을 이롭게 하는 통제의 도구로 흘러가 버리지만, 끊임없이 감시하고, 질문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채워 넣을 때 비로소 사회를 이롭게 하는 약자의 방패로 바뀐다. 산재보험제도라는 거대한 관료제의 개미굴을 무너뜨리고, 노동자의 방패를 벼리는 실천을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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