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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목격한 사회] 데미안, 멈추지 않는 마음 속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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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37회 작성일 26-07-07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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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붉은 바이올린, 라울 뒤피, 1948.

 

데미안, 멈추지 않는 마음 속의 질문


왕의조(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헤르만 헤세는 1877년 독일에서 태어나 엄격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선교사이자 신학자였던 그의 부모는 그를 신학교에 보냈지만, 이는 그로 하여금 극심한 우울증을 겪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이후 헤세는 시계 공장과 서점에서 일하며 혼자 문학을 공부하고 글쓰기를 시작했다. 헤세는 1차 세계대전 등의 사회 혼란과 가족의 불화와 질병 등이 겹치면서 다시 큰 정신적 위기를 맞게 되었는데, 이 시기 그는 융 학파 심리학자들의 심리치료를 받으며 인간의 무의식과 자아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경험들은 훗날 헤세의 작품에 충실히 반영되었는데, 데미안은 이러한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투영한 헤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아직 열한 살도 안 된 아이가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할 사람들도 더러 있을 줄 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내 일을 이야기하지 않겠다. 인간을 보다 잘 아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겠다. 자신의 감정들의 한 부분을 생각 속에서 수정하는 법을 익힌 어른은 어린아이에게 나타나는 이런 생각을 잘못 측정하고, 이런 체험들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당시처럼 깊게 체험하고 괴로워했던 때도 드물다.”

 

어른들은 쉽사리 자신들이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오래된 착각에 불과하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구축한 규범과 질서를 제시하거나 설득할 뿐이고, 아이들은 그들 중 얼마간을 자신들의 삶에 수용하거나 거부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다. 어른과 아이는 평등하다.

 

어른과 아이는 성숙과 미성숙 같은 경계로 명확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다. 아이 같은 면모를 아이보다 더 많이 갖고 있는 어른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오히려 좋은 어른일수록 자신의 내면에 수많은 아이들을 삶 속에서 오랫동안 감각하고 또 발견하면서 살아간다. 내면에서 솟아 나오는 진지한 질문을 외면하지 않고, 또 쉽게 결론 내리지도 않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데미안이 청춘의 소설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 이유도 이러한 사정에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얼마나 많은 어른들(혹은 사회)이 청춘과 아이를 망각하고 살아가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지금은 안다. 세상에 자기 자신에게로 인도하는 길을 가는 것보다 더 인간에게 불편함을 주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데미안의 주인공인 싱클레어는 유복하고 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세계는 종교의 세계이며 죄와 구원의 이분적 세계이다. 데미안은 이 세계관을 뒤흔드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싱클레어에게 다가온다. 특히 이 사회가 악당이나 악마라고 여기는 존재들에게는 저마다의 구조적인 사정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며 전복적인 주장을 해오는 것이다. 싱클레어는 이를 통해 자기 안의 정직에 더 깊이 귀 기울이게 된다.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가 사실은 하나의 믿음에 불과하며, 그것이 언제든 전복되거나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외면하기로 결정하고 방황에 탐닉한다. 그리고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며 자신의 청춘과 내면이 그토록 처절하고 고통스러웠던 이유들을 하나둘 파헤쳐 가기 시작한다. 기나긴 방황의 과정에서 자신만의 생각이 정리되었을 때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다시 만난다.

 

어느 흑인 부락에 있는 청년 집회소나 여기나 모두 똑같은 게 아닙니까? 한 사람이 말했다. 다 똑같지요. 심지어 타투가 아직도 유행한답니다. 알아두세요. 이게 신유럽입니다. (중략) 그런데 당신네 일본에서도 더 나을 건 없겠죠. 패거리를 뒤쫓지 않는 사람은 어디서나 드물어요. ”

 

지금 도처에 만발해 있는 것은 결코 연대가 아니야. 진정한 연대는 개개인들이 서로를 감각함으로써 새롭게 형성될 테고, 한동안 세계의 모습을 바꾸어 놓을 거야. 지금 연대라며 저기 저러고 있는 것은 다만 패거리 짓일 뿐이야. 사람들이 서로에게로 도피하고 있어. 서로가 두렵기 때문이야. (중략) 그들은 한 번도 자신을 안 적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거야.”

 

좋은 문학은 적확한 은유이자 알레고리이다. 소설의 인물은 저마다 분리되어 있지만, 내재적으로는 모두 문학적 논리에 따른 인과를 맺고 있다. 그러니까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작가의 내면과 번민을 인격화한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듯이 말이다.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죄와 구원의 문제에 몰두한다. 이는 서구 문학의 오랜 주제의식이기도 하다. 그리고는 마침내 질서와 가치는 하나의 국면이기에 반드시 와해되는 것이며, 자기 자신만의 소명을 감각하고 생산해내는 일만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누구나 먼 운명을 목표로 삼고 있을 때가 있다. 그러나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은 개인들에게는 성격에 불과하다. 개인의 성격이 곧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먼 운명이 구체적인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쯤 인간은 깨닫는다. 단지 나의 사소한 선택들이 이 모든 것을 이루었음을 말이다.

 

직업이 없어지는 시대가 온다고 한다. 새삼스러운 일이다. 이 사회는 언제나 공장처럼 돌고 있었는데 말이다. 부품처럼 인간을 찍어내려고 드는 사회가 또 하나의 부품을 발명한다고 한들 놀라운 일도 아닌 것이다. 더군다나 부품처럼 길러진 인간은 기계의 일부이기에 언제든 대체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오히려 고민해야 할 것은 인간임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에 있다. 인간이 죄와 구원을 고민하고 카인과 아벨을 호명하기 시작한 이유는 인간의 정체성을 논증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사회라는 거대한 공장이 이번에는 완전히 인간을 대체하려고 할 때, 그때. 인간이란 무엇일까? 언젠가 외계인이 지구에 등장해서 로봇과 인간에게 누가 인간인지를 증명해보라고 한다면 인간은 어떤 방법을 택할 수 있을까?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전쟁이 터지자 각자 병사와 장교로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그리고 전장 속에서도 서로를 응시하며 질문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전장에 육박하는 내면의 소리. 인류가 멈추지 않는 마음속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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