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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시의 독서] 가난이 사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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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1,440회 작성일 23-05-02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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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사는 집.jpg

 

김수현, <가난이 사는 집>, 오월의봄, 2022

 

 

양돌규 (노동자역사 한내 운영위원)

 

 

옛날 서울은 여기저기 판잣집도 많았고 판자촌도 동네마다 있었다. 익숙해서였던 것일까. 일일연속극 <달동네>(TBC, KBS, 1980~1981)60%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했고, 극중 추송웅의 딸로 출연한 똑순이 김민희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 이후 판자촌은 달동네라는 예쁜 이름으로 불렸다. 달이 가장 잘 보이는 동네, 달빛이 제일 먼저 내려앉는 동네가 달동네였다. 그 이름처럼 처연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정한수 떠놓고 비는 마음처럼 간절함이 있던 마을이기도 했다.

이 책, <가난이 사는 집>은 그 판자촌의 역사, 사건, 그 역사에 함께했던 사람들, 판자촌 이후의 재개발, 세계의 슬럼가 등 여러 주제를 포괄하는 책이다. 지난 회에서 다뤘던 김윤영의 <가난한 도시생활자의 서울 산책>(후마니타스, 2022)가난의 지도라고 한다면 이 책은 가난의 소사전또는 개론서라 할 만하고 특히 가난의 연대기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가난의 풍경

일제 강점기 때 경성의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토막촌은 움집처럼 땅을 파고 기둥을 세운 뒤 거적 같은 것으로 겨우 바람을 막던 것이었다. 무허가 토막에 일제조차도 온정적이었다. 경성의 산비탈마다 토막촌이 들어섰다.

그러다가 1960년대 합판, 양철, 함석, 루핑 등을 사용해 지은 판잣집으로 진화했다. 우리가 아는 판잣집’, ‘판자촌의 출발이었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덧붙여 둬야 할 것이 있다면 당시 한국은 세계적인 합판 생산국이었다는 사실이다. 해외에서 목재를 수입해 와서 그것을 얇게 켜고 섬유 방향으로 직교해 붙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합판은 다시 수출했는데 한국 합판 총생산량의 70~80%를 수출했다. 1960~70년대 한국의 대표적 수출산업 중 하나였고 전세계 합판 생산량의 20% 이상을 점유했다. 그러니 합판이 흔했고 저렴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건축 재료로 선택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후 1980년대에는 시멘트 블록, 시멘트 기와로 진보가 이루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은 이 달동네, 산동네를 판자촌이라 불렀다. 판자촌의 전형적인 모습이 이때 만들어졌는데 붉은색 시멘트 기와, 미장한 블록 담장과 벽, 새마을보일러, 재래식 개별 화장실, 골목길 주황색 나트륨등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대개 8평 공간 안에 두 가정 약 5~6명이 살았다.

<가난이 사는 집>의 표지에는 바로 그 전형적인 달동네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배경에 깔려 있다. 책의 부제는 판자촌의 삶과 죽음이다. 판자촌의 흥망성쇠를 가리키기도 하고 그 속에 살았던 구체적 인간의 삶과 죽음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점에서 중의적이다.

 

판자촌 사람들·사랑들

판잣집에 살던 사람들은 가난한 농촌에서 올라온 인구였다. ‘이촌향도라는 말은 그 가난을 고상하게 표현해 그 고단하고도 급격했던 변화를 살짝 감추는 효과는 있다. 1960244만 명이었던 서울 인구는 1965347만 명, 1970543만 명으로 10년 만에 두 배 이상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살 집은 부족했고 판자촌은 늘어났다. 1965년 도시 지역의 빈곤율은 54.9%에 달했다.

판자촌은 가난한 사람들이 싼 주거비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무허가 판자촌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관대했다. ? 집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모두 뼈저리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6년 조사에서는 서울시 인구의 38%가 판자촌에 사는 것으로 추정됐고 1970년대에도 대체로 20% 내외에 달했다.

당시에 서울에서는 신혼 살림을 방 한 칸 전세로 시작했다가 변두리의 넓은 독채 전세로 옮기고, 그 다음에는 전세를 낀 내 집을 장만하는 것이 나름의 주거사다리였다. 판자촌은 이 주거사다리를 탈 수 없는 사람들, ’방 한 칸도 빌리기 어려운 사람들이 불가피하게 택했던 궁여지책이었고 그런 사정을 잘 아는 정부도 그래서 1982년 이전 주택에 대해서는 무허가 판자촌의 점유권을 인정했다.

가난한 청춘들도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기 마련이었다. 하기야 전쟁 때도 아이는 태어났다고 하지 않는가. 1994년에 81화에 걸쳐 방영한 MBC 주말드라마 <서울의 달>은 시청율 40%가 넘는 인기를 얻었다. 이 드라마에서 20~30대였던, 시골에서 올라온 한석규, 최민식처럼 달동네에도 젊은 사랑이 있었을 것이다. 시인 신경림은 1988년 발표된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난한 사랑 노래> 중에서 일부 인용)

 

희망의 공동체, 생산·금융·돌봄 네트워크

한국의 판자촌은 서구의 슬럼가와 비교되는 점이 많았다. 서구의 빈민가에서는 마약, 범죄 등이 난무했지만 한국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일하려고 했고 자녀 교육에 최선을 다하는 희망이 살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빈곤 탈출까지 약속해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판자촌은 가난한 사람들이 비빌 수 있는 언덕이 되어줬다. 우선 일자리 측면에서 그랬다. 건설업 비중이 높았던 판자촌 거주 남성들에게는 일자리 연결망을 제공했고, 거주 여성들에게도 봉제 등 소규모 가내공장 일, 자잘한 부업 등을 제공했다. 행상, 노점, 가사도우미 등도 이웃들이 알선했고 소개했다.

이웃들 간에는 크고 작은 계모임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돈을 빌리거나 부조하고 친목 모임을 가지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판자촌은 재생산공간만이 아니라 생산 네트워크이기도 했고 사금융 네트워크이기도 했다. 한편 판자촌의 아이들은 이웃이 함께 돌보았고 마을이 키웠다. 동네 형 누나가 함께 놀아줬고 골목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아이들을 먹였다. 그런 점에서는 돌봄의 네트워크이기도 했다.

 

합동재개발, 그 이후

그러던 것이 1980년대 초중반, 올림픽을 앞두고 벌어지는 합동재개발사업을 계기로 서울 전역에 철거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합동재개발사업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재개발 방식이다. 즉 주민(가옥주)들이 조합을 만들고 건설업체와 합동으로 재개발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형식적으로는 지역 주민들이 설립한 조합이 주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돈을 대고 절차를 진행하고 주택을 분양해 자금을 회수하는 것은 모두 건설업체의 일이었다.

정부는 건폐율과 용적률을 완화해 줌으로써 개발이익이 발생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합동재개발은 모두에게 이익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판자촌의 가옥주도, 세입자도, 아니면 판자촌에 살 수 밖에 없었던 빈곤층도, 정도는 달라도 모두 피해를 입었다. ‘빈곤층의 저렴한 주거 공간이 단기간에 사라졌고 이들의 가난은 더 심화되었다.

합동재개발 이후, ‘가난의 집인 판자촌은 이제 영구임대주택, 고시원, 쪽방, 비닐하우스촌, 옥탑방, 반지하셋방으로 산포되었다. 저자는 이들, 21세기 판자촌에 대해서도 하나 하나 짚어 나간다. 가난의 상징이 된 영구임대주택, 영화 <기생충>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K-반지하, 다소 낭만적으로 그려지는 옥탑방, 2018년 화재 사고로 7명이 숨진 국일고시원, 도시 빈민의 막다른 골목 쪽방 등이다. 각각 어떤 식으로든 개선되어야 하겠지만 저자의 다음과 같은 문장은 서늘하다.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지는 모양이나 장소를 달리하겠지만 결국 어딘가에 또 만들어질 것이다. 빈곤이 남아 있는 한, 가난한 사람이 모이는 주택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투쟁하는 도시빈민, 또 하나의 주체

가난의 연대기를 짚어가다가 보면 한국에서 국가와 그것의 인격적 체현체인 통치자가 얼마나 강력한가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 많은 도시빈민들을 서울에서 몰아내기도 하고 (지금의 성남인) ‘광주같은 신도시를 별안간에 만들어내기도 하니 말이다. 물론 신도시라고 썼지만 그저 벌판과 언덕에 천막을 나눠주고 패대기 쳐놓은 것에 불과했지만.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그 강력한 국가와 통치자의 의지를 꺾고, 정책을 바꾸어냈던 것은 도시빈민들의 투쟁이기도 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1966~71년 김현옥 서울시장이 15만 동의 판잣집을 철거하고 도심의 판자촌을 서울 외곽으로 강제로 옮겼던 대전쟁1971년 광주대단지 투쟁을 계기로 종식되었다. 1971810, 5만여 명의 광주대단지 주민들은 성남출장소와 차량을 불태우고 경찰력을 무력화시키기도 했다. 이후 정부는 광주대단지로 이주하려던 2만여 가구 철거 계획을 백지화하고, 서울의 판자촌을 양성화했으며 현지 개량을 지원했다. 시흥2, 구로동, 사당동, 신림동, 봉천동, 오금동, 천호동, 미아동, 성북동, 면목동, 수색동, 남가좌동, 홍은동…… 이 지역에 들어선 새 판자촌은 블록과 시멘트 기와 등으로 꾸준히 고쳐지기 시작했고 나름의 점유권을 인정하고 상하수도, 소방도로 같은 도시기반시설을 확충해 나갔다.

마찬가지로 1980년대 세입자들에 대해 아무런 대책 없이 무작정 강제철거를 하던 합동재개발 방식은 도시빈민들의 치열한 투쟁에 부딪혔다. 1985년 목동, 1986년 상계동, 그리고 1987년을 전후로 사당3, 오금동, 신당동, 사당2, 돈암동, 창신3동 등 20여 곳에서 철거반대투쟁이 벌어졌다. 1988년에는 도화동, 홍은동, 신정동, 전농동, 서초동 꽃마을, 석촌동, 신가촌, 남현동 등 수십 개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서울은 가난한 사람들이 꼭 필요했지만, 정작 가난한 사람들이 살 집은 사라지고 있었다. 철거민들은 서울시철거민협의회를 결성하고 공공임대주택이라는 요구를 정식화했다. 그리고 1989년 마침내 25만 호 영구임대아파트 공급 계획이 발표됨으로써 합동재개발 방식을 보완한 정책적 변화를 이끌어냈다.

이처럼 이 책은 이 도시의 변화를 만들어온 주체로 국가못지 않게 투쟁하는 도시빈민들을 그려내고 있고, 그래서 상당 분량을 그 투쟁사를 소개하는 데 할애한다. 다시 말해 도시사의 변곡점을 만들어낸 또 하나의 중요한 주체로 투쟁하는 도시빈민을 위치시키고 있다. 제정구 선생, 정일우 신부, 허병섭 목사부터 서철협 초대 회장 고광석, 난곡의 전도사였고 노래 <민중의 아버지>를 작곡한 김흥겸 등 투쟁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금융화된 부동산 시대, 가난의 숙제들

이 책의 저자인 김수현은 빈민운동에서 출발해 한국도시연구소를 거쳐 노무현 정부 때 부동산 정책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문재인 정부 때 다시 청와대 정책실장 등을 맡으며 부동산 정책에 관여했다. 그리고 알다시피 두 정부 시기 서울의 부동산은 극악하게 올랐고 민심이 이반했으며 임기가 끝나자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책의 말미에 붙인 짧은 보태는 글에는 두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추측해 볼 만한 언급이 없지는 않다. 예컨대 과잉 유동성이라든가 세계적 규모에서의 부동산 거품같은 언급들이 그것들이다. 하지만 이 책이 부동산 시장 안정에 실패한 정책 담당자의 평가와 반성을 담은 책도 아니고 그 같은 언급이 자세하지도 않다.

그보다 이 책은 판자촌의 역사, 사람들, 사건, 합동재개발, 뉴타운과 도시재생, 세계의 판자촌 등 판자촌을 둘러싼 여러 주제, 시대, 구조, 역사 등을 망라하는 데에 힘을 쏟는다. 그러면서 저자는 한국의 합동재개발 방식의 숙제로 개발이익 독식 구조가 옳은가?”라는 윤리적 질문을 여러 장에 걸쳐 반복적으로 던진다. 이미 1980년대 빈민운동에서 제기됐던 질문인 누구를 위한 재개발인가?”를 묻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윤리적 질문은 중요하지만, 이것보다 합동재개발 방식이 집값이 계속 올라야 성공하는 모델이라고 하는 게 더 눈에 들어왔다. , 계속 용적률을 높일 수 있어야 하고, 이를 필요로 하는 유효수요가 있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개발 이익이 발생해야 하고, 무엇보다 계속적인 성장이 이루어져야 이 재개발이 성공한다는 전제들이 있다. 2004년 뉴타운사업이 극성했다가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제풀에 꺾였던 것도 대부분 사업성(채산성)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두 정부 시기 부동산 폭등은 설명이 안 된다. 특히 문재인 정부 시기의 집값 고공행진은 단순히 코로나19로 인한 유동성 확대 때문이라고 언급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고 세계적 규모에서의 부동산 시장 커플링이라는 것으로도 불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합동재개발 방식은 사실상 건설사가 실질적인 주체라고 말한다. 그때는 그랬다. 제도적 절차, 자금 동원, 시공 등을 사실상 건설사가 다 했고 정부는 용적률 조정을 통해 개발이익을 보장할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건설사보다 금융이 주체로 보인다. 대규모 프로젝트파이낸싱도 그렇고 새 아파트 분양시 은행들의 주택담보대출계 직원들이 들러붙는 걸 봐도 그렇고, 신탁 방식 재개발 방식의 등장도 그렇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빚을 내 겨우 내 집을 마련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을 투기꾼이라고 비난하려면 우리 모두 투기꾼이 되게끔 몰아세우는 이 퇴행적 체제를 문제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체제는 저자가 가난의 연대기를 쓰던 시대와는 다르게 건설사보다 금융이 주체가 된 개발 체제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 투기적 속성은 금융화된 부동산 시장의 결과이다. 그리고 그 결과 과거 뉴타운 때보다 더 큰 위기를 스스로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 위기가 지나간 다음에는 더 큰 주택가격의 폭등을 야기할 것처럼 보인다.

결국, 저자가 지난 세기의 가난 연대기에서 그려냈던 것처럼, 이 체제를 다시 바꾸어낼 주체는 투쟁하는 주체일 수밖에 없다. 지금은 그 주체가 막연해 보이고 한 줌도 안 되어 보일지라도 그렇다. 달동네는 사라졌지만 가난의 삶은 사라지지 않았다. 새로 탄생한 달동네마다에서 투쟁해나갈 새로운 주체들은 정한수 떠놓고 비는 간절한 마음으로 반역의 다짐을 하게 될 것이다. 가난의 삶도, 가난의 죽음도 계속되는 것처럼 가난의 투쟁 역시 새롭게 반복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속편은 지금도 예비되고 있고 어딘가에서 쓰여지고 있을 것이다. 차고 기우는 달처럼, 또는 해를 잡아먹을 개기일식의 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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