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우리의 이야기] 멈춰 선 시간, 그 자리에서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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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주노동자노동조합]
멈춰 선 시간, 그 자리에서 만난 사람들
이은주(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김숨 작가의 『딸기이론』을 읽고 있다. 한 딸기밭에서 오래 일해온 이주노동자가 동료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소설이다.
한마디, 한 문장, 한 단락도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문장을 읽고도 한참을 바라보게 되고, 몇 줄을 지나 다시 앞 문장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 문장들 앞에 서 있으면 고통이 보인다. 고통을 견디며 살아낸 시간도 보인다.
책을 읽는 일은 누군가 건넨 말을 받아 그 앞에 마주 서는 일이다. 바쁘다는 이유로, 익숙하다는 이유로, 혹은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외면했던 것들이 문장 속에서 하나둘 끌려 나온다. 누군가의 고통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순간들, 불편한 이야기를 애써 멀리했던 순간들. 책은 그런 나를 조용히 불러 세운다.
연표의 숫자가 사람의 시간으로 보일 때
지난해부터 부산울산경남 노동역사관 전시기획팀에 함께하고 있다. 최근 노동자 투쟁의 연표를 정리하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 날짜와 사건, 파업과 농성, 구속과 해고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연도와 숫자들이 더이상 숫자로 보이지 않는다. 그 안에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견뎌야 했던 시간이 보인다. 특히 국가와 자본이 노동자들을 탄압했던 기록 앞에서는 쉽게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 없었다.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쏟아졌던 차마 입에 다시 담을 수 없는 폭언들, 몸을 숨긴 노동자를 찾아내겠다며 현장을 샅샅이 뒤지고 삼지창으로 구석구석을 찔러댔다는 기록, 짧은 문장 몇 줄만으로도 당시의 폭력이 얼마나 집요하고 잔혹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노동자의 이름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사람들은 그렇게 오랜 시간을 견뎠다. 그들의 고통은 연표에 몇 개의 문장으로 남아 있지만, 그 문장 안에 들어 있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연표를 정리하면서 나는 자꾸 생각했다.
그 시절의 폭력은 정말 끝난 것일까.
그 질문을 품은 채 병원과 노동현장을 오가던 어느 날, 또 다른 노동자의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열처리 작업장에서 일하던 한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다 건강을 잃었지만, 치료를 받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체류 자격 때문에 치료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의사는 사업주의 지원이 없다면 치료비 마련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나는 현장 노동환경과 노동강도을 확인하기 위해 동료 노동자에게 기기 체크를 부탁했다. 하지만 부탁하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사업주와의 마찰이 생기거나 그 일로 불이익을 받거나, 불안정한 신분으로 인한 피해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담이 되거나 불이익이 생길 것 같으면 거절해도 괜찮다고 했다.
잠시 뒤 돌아온 대답은 뜻밖에도 아주 담담했다.
“친구에게 도움이 되면 됩니다. 나는 이 공장에서 일하지 않아도 돼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는 사람이 자신의 일보다 친구를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제도와 법이 사람을 ‘미등록’이라는 이름으로 구분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곁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고통받는 사람을 혼자 두지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그곳은 지옥이었어요”라는 말 앞에서
8월 25일 창원지방법원 215호 법정에 자신의 권리를 요구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선 거통고조선하청지회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법을 어긴 적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김형수 전 지회장은 법이 세상의 모든 약자를 구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차별받고, 수배당하고, 목숨을 걸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조선소에서 하청노동자들이 왜 죽어가는지조차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오래전 연표 속에서 만났던 노동자들의 목소리와 겹쳐졌다.
법과 제도가 언제나 노동자의 삶을 지켜준 것은 아니었다. 때로 노동자들은 법이 보장한다고 쓰여 있는 권리를 실제 현장에서는 행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자신이 처한 현실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야 했다.
유최안 동지는 노동조합에 가입한 이유를 이야기하며 아들을 떠올렸다. 아들에게도 자신의 지금처럼 똑같이 살아가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고 했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나 하청업체에서 노동조합을 한다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는 다음 사람은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말 앞에서 한참을 멈추게 된다.
누군가에게 노동조합은 단순한 조직의 이름이 아니다.
내 아이에게는 나보다 나은 삶을 물려주고 싶다는 마음. 내가 겪은 일을 다음 사람은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적어도 자신이 일한 만큼 임금을 받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
그 마음이 노동조합의 문을 두드리게 했고, 때로는 한 사람의 삶 전체를 흔드는 싸움으로 이어졌다.
같은 현장에서 같은 배를 만들면서도 하청노동자라는 이유로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 사용자와 교섭할 수 없는 현실. 책임은 위로 올라가지만 교섭은 아래에서 멈추는 구조, 그 구조 속에서 하청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조건을 결정하는 사람과 직접 마주할 수조차 없었다.
이김춘택 동지는 조선업이 호황이라는 말과 하청노동자들의 현실 사이에 놓인 간극을 이야기했다. 산업이 성장하고 기업이 막대한 이익을 내는 동안에도 저임금과 임금 동결, 임금 체불의 문제는 여전히 현장에 남아 있다고 최후진술을 이어갔다. 호황이라는 말이 정말 누구의 몫이었는지, 나는 되묻게 되었다. 그가 한 말이 오래 남는다.
“저희 조합원들이 서 있어야 할 곳은 이곳 법원 재판장이 아니라 진짜 사장 원청과의 단체교섭 자리였으면 좋겠습니다” 그 한마디가 지금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노동자가 자신의 삶과 노동조건을 이야기하기 위해 마주해야 할 곳은 어디인가. 교섭의 자리인가. 아니면 피고인의 자리에 앉아 자신의 행동을 해명해야 하는 법정인가.
그리고 이어진 한 조합원의 최후진술에 나의 모든 감각이 멈추어졌다.
“아까 영상을 보니까 물 뿌리고 소화기 뿌렸다 해서 나의 업무방해 혐의를 고소하신 것 같은데, 사실 그게 전부 그 영상이 전부가 아니고요.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그곳은 지옥이었어요. 원청 임직원 300명이 와가지고 한 사람에게 네다섯 명씩 달라붙으면서 온몸의 사지를 비틀고, 여성 조합원들도 있고 그랬는데 거기 천막 치고 그것을 피해서 있는데 칼로 다 찢어가면서, 사람이 들어앉아 있는데 그 밑에 막 비명소리가 난무했고 그날 그랬는데… 그 동영상 자체만 놓고 보면 사람들은 아마 내가 무지막지한 짓을 했다고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사실은 알고 보면 그 사람들이 사람을 죽이려고 달려들어가지고 내가 그 사람들을 말리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에 불과하지, 그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피해를 주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쉽게 지나치지 않고, 더 천천히 보고, 더 오래 듣고
몇 개의 단어와 날짜만으로 기록되고 기억되는 사건들. 그러나 그 한 줄의 기록 안에는 누군가의 몸이 있고, 두려움이 있고, 가족이 있고,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있다. 그리고 그럼에도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가 있다.
1980년대의 노동자들과 오늘의 이주노동자들, 그리고 법정에 선 오늘의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은 서로 다른 시대와 서로 다른 현장에 서 있다. 하지만 그들이 던지는 질문은 닮아있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가. 다치고 아팠을 때 보호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노동하는 사람으로서 존엄하게 대우받을 수 있는가.
어쩌면 노동의 투쟁은 결국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나는 여기 있다. 나도 사람이다. 나의 노동에도 존엄이 있다.
그리고 지금도 그 투쟁은 이어지고 있다. 법정에서 자신의 삶을 설명해야 하는 조선소 하청노동자의 목소리 속에도 그 시간이 있다. 동료를 위해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이주노동자의 목소리 속에도 그 시간이 있다. 자신의 아이에게만큼은 같은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노동자의 목소리 속에도 그 시간이 있다.
“그곳은 지옥이었어요”라던 한 조합원의 목소리를, 나는 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
『딸기이론』을 읽으며 한 문장을 쉽게 넘기지 못했던 것처럼, 나는 요즘 자꾸 멈춰 선다.
연표의 한 줄 앞에서 멈추고, 한 사람의 이름 앞에서 멈추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 앞에서 멈춘다. 아마도 그 안에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숫자로 기록된 사건에도, 법정에서 오가는 말에도, ‘미등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에게도, 내가 쉽게 지나쳐서는 안 될 삶이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동안 많은 것을 알고도 지나쳤고, 보면서도 모른 척했고, 불편한 이야기는 애써 멀리했다. 바쁘다는 이유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이유로, 때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멈추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나쳐버린 것들을 다시 바라보기 위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을 보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람의 고통을 바라보는 나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
아직도 나는 많은 것 앞에서 쉽게 지나친다. 그래서 앞으로도 자꾸 멈출 것 같다.
한 문장 앞에서, 한 사람의 이름 앞에서, 누군가의 목소리 앞에서.
조금 더 천천히 보고, 조금 더 오래 듣고, 쉽게 지나치지 않는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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