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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목격한 사회] 난장이 연작, 조세희처럼 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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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62회 작성일 26-09-15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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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세희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문학과지성사, 1978

 


난장이 연작, 조세희처럼 울기


왕의조(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알 수 없는 일이다. 신애는 저 자신과 남편을 난장이에 비유하고는 했다.

우리는 아주 작은 난장이야, 난장이.

(중략)

도대체 무슨 이야길 하는거요?

우리는 난장이라구요!

우리가 왜 난장이란 말예요!”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중에서, 조세희

 

신애는 어느 날 우연히 마을 수도관 독점사업을 벌이는 용역들에게 두들겨 맞는 난장이를 목격한다. 난장이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값싼 가격으로 수도관을 수리해주고 있었다. 신애는 부엌칼을 집어 들고는 난장이를 죽도록 패는 사내의 옆구리를 찌른다. 그리고는 난장이를 부축해 일으키며 말한다.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이에요

 

이것은 1970년대의 한국 사회를 표현하는 하나의 장면이다. 문학은 시대에의 감각이고, 작가는 눈을 감고 자신이 감각하는 사회를 더듬어 본 모양을 기록해 둔 셈이다. 그렇지만 이제 이 그림은 너무 납작하거나 고루해 보일 수 있다. 난장이로 집약되는, 이른바 역사적 민중은 이제 과거의 그것처럼 단면적이지가 않다. 애초에 그들은 그저 단순한 덩어리이거나 묶음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모든 사람은 필연적으로 시대를 닮기 마련이다. 인간이 시대를 닮아가는 과정은 체제가 인간을 지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체제는 반드시 폭력적인 얼굴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 때로는 감정도 의지도 없이, 그저 무심한 방식으로 인간의 생활과 관계 속에 스며든다. 오늘날 우리는 누가 나를 억압하고 있는지 묻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그 체제의 언어로 자신의 삶을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형과 나는 밥을 국에 말았다.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꼼짝도 하지 않고 식사를 했다. 영희가 이 시간에 어디서 어떤 식탁을 대하고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었다. 우리의 밥상에 우리 선조들 대부터 묶어 흘려보낸 시간들이 올라앉았다. (중략) 대문을 두드리던 사람들이 집을 싸고돌았다. 그들이 우리의 시멘트 담을 쳐부수었다. 먼저 구멍이 뚫리더니 담은 내려앉았다. 먼지가 올랐다.”

- 같은 책, 조세희

 

난장이 가족은 철거되는 집 안에서 마지막 식사를 한다. 오늘날은 철거의 양태가 조금 달라졌다. 노골적인 폭력이나 굶주림 대신, 더 긴 수명과 일정한 소비 능력, 안정된 노동과 정교한 제도를 통해 인간을 체제 안에 붙잡아 둔다. 인민들의 삶은 과거보다 풍요로워진 듯하지만, 인간은 더 자유로워지지 못했고, 더 귀해지지도 못했다.

 

요컨대 민중은 역사의 숙주와도 같은 것이다. 착취와 억압이 숙주를 필요로 하는 만큼, 민중은 비극적으로 존재한다. 어느 시대에나 민중은 고립된 정치적 경제적 공간에서 최후 같은 식사를 하고, 당대의 위정자들이나 사업가들의 호기로운 전망과 허풍을 목격하고는 알 수 없는 체념에 사로잡혀 버리고야 마는 것이다.

 

나는 형이 조판한 노비 매매 문서를 본 적이 있다. 확실히 아버지만 고생을 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식들이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를 바랐다. (중략)

나는 아버지만도 못할 것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은 그들 시대의 성격을 가졌다. 나의 몸은 아버지보다도 작게 느껴졌다.”

- 같은 책, 조세희

 

난장이의 몸은 단순히 가난한 노동자의 신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 사람이 자신의 시대를 감당하면서 점점 작아지는 감각에 가깝다. 아버지보다도 작은 몸. 그 몸에는 이전 세대가 겪은 시간과 앞으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시간이 동시에 포개져 있다. 조세희가 바라보는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시대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런 면에서 난장이 문학의 민중은 단순한 역사의 희생자도, 하나의 정치적 덩어리도 아니다. 오히려 조세희의 세계에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처지를 알아보고, 그 차이를 넘어 서로를 발견하는 순간에 비로소 의미가 탄생한다. 따라서 난장이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하나의 거대한 민중으로 묶이는 일이 아니라, 다양한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의 고통을 알아보는 순간에 있다.

 

조세희의 난장이 연작을 단지 1970년대 산업화의 풍경으로 읽는 것은 협소한 관점이다. 물론 그의 소설에는 철거민의 사정과 저임금 노동, 열악한 주거환경, 산업재해와 계급적 격차가 구체적으로 새겨져 있다. 그러나 작가는 그것을 단순한 고발문학의 형식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환상성과 옴니버스적 연결을 통해 서로 다른 인물과 사건을 겹쳐 놓고, 하나의 원인과 하나의 가해자를 지목하는 대신 인간이 어떻게 자신이 속한 세계를 인식하며 또 그것에 저항하는지를 보여준다.

 

사회운동의 윤리, 조세희처럼 울기

 

20세기 중반 샤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앙가주망(engagement), 즉 문학의 사회적 참여를 강조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세계에 개입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한국에서도 참여문학과 순수문학의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난장이 문학의 백미는 계급적 인식이나 문학의 사회참여라는 명제 자체에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극단적일 만큼 예민한 감수성에서 나온다.

 

작가는 비극적인 사물과 현상을 목격했을 때 가장 먼저 울기 시작해서 가장 늦게까지 우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감상적인 태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쉽사리 지나쳐버린 고통을 오랫동안 되새기고 응시하며, 그것을 자신의 감각 안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에 가깝다. 난장이 연작이 주는 강렬함의 정체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사회운동의 윤리도 그와 같다. 운동은 누군가의 고통을 대신 말하는 데서 시작할 수도 있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나아간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고통을 알아보는 것이다. 연민과 연대 사이에는 거대한 강이 흐른다. 전자는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이지만, 후자는 타인의 고통을 통해 자신의 위치까지 다시 바라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조세희의 소설 속 인물들이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운동가적 면모를 보이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완성된 혁명가가 아니다. 오히려 망설이고, 실패하고, 때로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완전히 눈을 감지는 않는다. 짧은 순간에도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아주 짧게나마 한편이 된다.

 

1970년대의 난장이는 비교적 선명한 얼굴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난장이들은 훨씬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누군가는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소비자이고, 플랫폼의 이용자이면서 사업자이며, 안정된 삶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끊임없이 미래의 불안과 경쟁한다. 이제 민중이라는 말 하나만으로 이들을 묶어내기는 어렵다. 조세희는 우리에게 난장이가 누구인가를 가르치기보다, 한 사람의 고통 앞에서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묻고 있다. 조세희처럼 울기. 여전히 서로 모르지만, 우리는 한편.”이라고 말하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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