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사람들] 어느 삼부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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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부터 최익한과 그의 첫째 아들 재소(1935년 서대문형무소, 함흥형무소로 이감 후 1937년 옥사), 둘째 아들 학소(1935년 서대문형무소).
어느 삼부자 이야기
나영선(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는 형제, 남매, 부자, 부부 등 가족 단위의 참여가 적지 않았다. 권오설 오직 형제, 김형선 명시 남매, 조두원 원숙 남매, 박헌영과 주세죽 부부 등 그 사례가 매우 많다. 일제강점기의 저명한 이론가였던 최익한의 경우도 그러했다. 고향인 울진군 북면에서 그의 형제인 익래는 고문으로 불구가 되었고 두 아들인 재소와 학소 그리고 여러 조카가 갖은 고문과 옥고를 치렀으며, 큰아들인 재소는 옥사하고 말았다.
1937년 3월 6일. 최익한은 아들 재소가 옥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는 곧바로 서울 창신동 집에서 함흥교도소를 향해 달려갔다. 그가 도착한 함흥교도소에서 맏아들 재소의 시신을 마주했다. 십수 년의 세월 동안 굽힘 없이 사회주의 혁명에 헌신했던 그에게도 아들의 사망 소식은 큰 충격이었다.
일본 유학 본격적 혁명운동에 뛰어든 최익한
큰아들을 잃고 최익한은 비통한 심경을 한시(漢詩)로 남겼다. 시의 제목은 곡아이십오절(哭兒二十五絶)이다. 시는 1937년 4월 조선일보에 재직 중이던 홍기문에 의해 실렸다. 홍기문은 과거 일본 유학 시절 최익한과 함께 일월회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시에서 최익한의 큰아들에 대한 깊은 부정(父情)을 느낄 수 있다. 13세에 결혼하여 18세에 득남한 최익한은 아이를 보며 “별같이 빛나는 눈동자”는 어여뻤지만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은 게 집안 어른들에게 죄스러워 3일 동안 문안을 하지 못하였다”라는 어린 아버지의 수줍은 마음도 드러냈다.
하지만 이런 마음과 달리 최익한은 가족을 살뜰히 살피지는 못했다. 오히려 오랜 시간 가족과 함께하지 못한 아버지였다. 그의 나이 15세에 집을 떠나 멀리 거창에 내려가 저명한 유학자이자 전국의 유림을 조직하여 파리장서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인 면우 곽종석의 문하에 5년간 수학했고, 스승의 권유로 1917년 서울로 상경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그 후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책 활동을 하다 체포돼 3년 형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이후에는 일본 와세다대학으로 유학 가 그곳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거창, 서울로의 유학, 투옥, 일본으로의 유학 과정에서도 아이들은 태어났다. 큰아들 재소(1914년생)에 이어 두 살 터울인 학소(1916년생), 큰딸 분경(1919년생), 건소(1924년생)를 보았다.
아이들이 자라고 성장하는데도 아버지인 최익한은 더욱 바쁜 몸이 되었다. 일본 유학 이후 본격적인 사회주의 활동에 가담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공산당의 중요 간부가 되어 열성적으로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이감 중 대전역에서 동료 사회주의자들과 시위
최익한은 어려서 열흘 만에 천자문을 모두 암송했고, 곽종석의 문하에서도 제자 중 손에 꼽히는 재능을 보였다. 신학문을 배우러 중동학교에 진학해서는 1년 만에 전 과정을 수료했다. 이러한 그의 능력은 그가 속한 레닌주의동맹 내에서 빼어난 이론가로 성장하는 바탕이 되었다. 각별한 우정을 쌓으며 동문수학한 김규열과의 지상 논쟁에서도, 서울파의 구파 중 조선공산당에 합류를 거부한 세력이 제기한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에서 열린 상설 비상설 논쟁에서 상설론에 대한 일관된 논리로 반박해 조선공산당의 입장인 비상설안을 관철하는 데 참석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비단 최익한에 한정한 평가는 아니겠지만 당시의 회의를 시종일관 참관했던 일경으로부터 “재동경 각 단체 대의원 사회운동의 지식 정도가 상설론을 주장한 논자들을 압도하였다”는 평을 받게 되는데 일조했다. 그 후 그는 조선공산당의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하면서 당 운동 깊숙이 활동을 전개하다 1928년 2월 일경에 검거됐다.
1932년 최익한은 6년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하다가 대전형무소로 이감 중 대전역에 도착했다. 그는 형무소로 가는 길인 조선인 시장 부근에서 목소리를 높여 선창한다. 그는 “조선공산당 만세” “조선민족해방 만세” “조선민족독립 만세”등의 구호를 소리높여 외쳤다. 그의 선창에 함께 이감 중이던 동료 사회주의자들도 따라 외쳤고, 이어 목소리 높여 ‘적기가’를 함께 불렀다.
그날 이 자리에서 함께 시위에 참여한 사회주의자들은 여러 사건으로 구속된 이들이었다. △간도공산당 사건 최원택·안기성 △간도 5·30 폭동 사건 소병화·양봉래·나종극·장룡석 △3차 조선공산당 사건 최익한·김병일 △4차 조선공산당 사건 윤택근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 사건 조두원·권오직·김응기 △조선공산당재조직중앙간부 사건 한빈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조직을 위한 열성자대회 사건 정헌태 △조선학생전위동맹 사건 한경석 등 20명이 넘는 정치범들이 시위에 함께한 것이다. 이들은 투옥되기 전에는 서로 간에 조직노선, 정치노선 등의 차이를 보이며 분파주의라는 오명을 받을 정도로 경쟁 관계였지만, 감옥이라는 공간에서 맺어진 동지적 관계와 모두가 공유하는 혁명적 신념이 이감의 순간에 하나의 집단적 행동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시위를 벌인 이들의 대가는 쓰라렸다. 추가적인 조사에 이어 주동자인 최익한의 징역 1년 형을 시작으로 징역 8개월, 징역 6개월 형에 이르는 추가 형을 받게 된다.
아버지 구속 중 두 아들도 사회주의 운동으로 체포
이렇게 최익한이 구속돼있는 동안 그의 두 아들과 조카들은 울진에서 ‘울진적색농민조합’을 결성하고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특히 큰아들 재소는 혼례를 올리고 결혼 초행을 다녀오는 길에 체포되어 신혼의 기쁨조차 누리지 못했다. 더구나 훗날 재소가 죽어 그의 처는 청상이 되었는데 시댁의 재가 권유에도 하지 않았다. 최익한은 애잔한 마음과 자신의 길을 이어준 아들들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시에 남겼다.
듣건대 그대 그 시절 병들어 몹시 파리했다는데
온갖 형벌과 고문을 마치 아무것도 아닌 양 초연하게 견뎌냈으니
목숨을 버려 의리를 취함은 입과 귀로만 하는 학문이 아니니
천년토록 나약한 선비들이 부끄러워 죽게 만드는구나
- 송찬섭, 『만시(輓詩)에 담긴 가족사 – 최익한의 ‘곡아이십오절’』, 역사연구 56호, 2026에서 인용
1935년 12월 최익한은 7년 형을 모두 채우고 만기 출소한다. 출소 후 아픈 몸을 이끌고 서울과 김천으로 두 아들을 면회하러 다녔고, 앞으로의 면회를 위해 집을 경성 창신동으로 옮겼다. 그런데 불과 1년이 되지 않아 큰아들은 함흥으로 이감됐고,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옥사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함흥형무소 앞에서 아들의 시신을 넘겨받아 화장하고 손주를 아껴주던 부모의 산소 아래 아들을 묻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인간 세상 온갖 일이 비록 뒤바뀌는 일이 많다지만
내 생전에 네가 먼저 죽을 줄을 어찌 짐작이나 했겠느냐?
원숭이 울음소리에 창자가 끊어지던 그곳을 길이 기억하노니
- 송찬섭, 위와 같은 글에서 인용
박헌영의 뒤를 이어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 비서를 지내다 옥사한 권오설 아버지 권술조의 기나긴 제문도 최익한의 그것을 닮았다. 혼례를 치렀으나 남편을 제대로 보지 못한 며느리, 의로운 일을 했으나 애통하게 돌아간 자식에 대한 그리움이 그렇다.
큰아들 재소는 옥사, 둘째 아들 학소는 활동 지속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최익한은 해방 전까지 국학 연구에 몰두한다. 이 시기 최익한은 운동 일선에서는 멀어졌다. 생계의 문제도 있었지만, 운동의 휴지(休止) 분자라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해방 후 자신의 행적을 변호하고 반성하는 글인 ‘변백장(辯白狀)’에서 “본인의 전후, 삼도 수형과 십수 년 수역(囚役)이란 정치범적 경력과 양자(兩子) 제질(諸侄)의 적색농조학생사상사건 등, 연속 관계한 가정적 환경이 경찰의 특별감시를 극도로 받게 되어 지하활동 혹은 국외 망명이 본인으로서는 말할 수 없는 난문제이었으며, 이 반면에 자유 구직과 자력 생계가 그때 우리들의 처세상, 적의 사상적 공세에 대한 중요한 방어전법이었다”라고 말한다.
글에서는 저렇게 밝히지만, 둘째 아들인 학소는 적색농조 사건으로 형을 마치고 나와 지속적으로 울진의 사회주의 운동에 관여한다. 바로 적색농조를 잇는 창유계 활동을 하고, 해방 이후에는 이 활동에 근거해 ‘농민조합 조직론’이라는 문건을 작성한다. 아마 작은아들이 활동을 지속하는 과정에서 그 보안을 위해서라도 최익한은 활동을 자제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최익한은 해방 이후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대회파에 속했다. 박헌영의 노선에 날카로운 비판자였고 비주류였다. 최익한은 건국준비위원회와 민전에서 활동하지만, 곧 당에서 탈당하고 사로당을 거쳐, 남로당에서 분당하고 나온 여운형의 근로인민당에서 활동한다. 하지만 남한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이 갈수록 더해지면서 1948년 남북연석회의가 열렸을 때 월북하고 직계 가족도 이즈음 월북했으리라 추정된다.
월북 이후 최익한의 정치활동에 관한 흔적은 찾기가 어렵다. 대신 그는 국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와 집필을 이어갔다. 다만 큰딸 분경의 남편인 사위 이청원이 1946년 월북해 활동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활동한 이청원은 1956~1957년경 최창익, 윤공흠 등의 8월 종파사건에 연루돼 숙청된 것으로 나오는데 이 시기 이후 북한에서는 최창익, 이청원에 대한 비판의 수위가 높아졌고, 1957년 ‘정다산선집’ 발행을 끝으로 최익한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참고자료]
○ 인터넷자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front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aver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https://nl.go.kr/newspaper/
국토정보플랫폼 https://map.ngii.go.kr/mn/mainPage.do
공훈전자사료관 https://e-gonghun.mpva.go.kr/user/index.do
독립운동판결문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Main.do
울진의독립운동사 https://www.nculture.org/lib/libraryDetail.do?contentId=68210
임경석의 역사극장 https://h21.hani.co.kr/arti/COLUMN/2273
강릉최씨대종회 https://blog.naver.com/sycjs/30019397180
○ 논문
송찬섭, 『일제강점기 최익한(1897~ )의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과 활동』 역사학연구 61집 ; 『1927년 조선사회단체 중앙협의회 창립총회와 최익한』 역사연구 50호 ; 『해방후 최익한의 사회주의 운동과 ‘변백장’』 역사학연구 66집 ; 『월북 이후 최익한의 학문과 집필활동』 역사학연구 70집 ; 『만시(輓詩)에 담긴 가족사 – 최익한의 ‘곡아이십오절’』 역사연구 56호 ; 『조카가 작성한 최익한(1897~ ) 연보』 역사연구 20호
○ 도서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조선공산당문건자료집』, 한림대학교 출판부,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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