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보는 오늘] 부마항쟁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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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79년 10월 부산 광복동 시위 모습.
부마항쟁을 생각하며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
유신의 심장을 흔든 부마항쟁
“박정희는 물러가라” “민주주의를 되찾자”
1979년 10월 16일, 부산 남포동과 광복동이 함성으로 들끓었다. 부산대 학생들이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교문을 박차고 나오자 상인도, 노동자도, 시민도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튿날 시위는 더 거세졌고 파출소와 언론사가 성난 민심의 표적이 되었다. 불길은 마산으로 번졌다. 경남대 학생과 노동자, 시민이 3.15의거탑 앞에 모여 목소리를 높였다. 정권은 곧바로 칼을 빼 들었다. 10월 18일 부산에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특전사 공수부대가 투입됐다. 20일에는 마산·창원에 위수령이 내려져 탱크와 군대가 거리를 메웠다.
함성은 수면 아래로 잦아들었지만,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복종을 거부한 노동자·민중이 철옹성 같던 독재체제에 금을 냈다. 4.19혁명 이래 짓눌려 온 ‘민주주의’가 ‘독재’를 밀어내고 다시 떠올랐다.
성난 민심 “부산 시민 살려내라”
물가는 1978년 14%, 1979년 18%로 해마다 치솟았다. 정부는 1979년 3월 석유제품 가격을 9.5% 올리더니 7월에 또다시 59%를 올렸고, 전력 요금까지 35% 인상했다. 위기의 주범은 중화학공업에 쏟아부은 과잉·중복투자의 후유증과 2차 오일쇼크였다.
정부는 ‘4.17경제안정화종합시책’을 내놓고 시장경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성장보다는 안정’을 내세워 통화를 죄고 재정수지 흑자 기조를 지키고 수입을 늘려 물가를 잡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위기 해소 비용이 중소자본가와 도시노동자에게 전가되었고 그들의 삶을 위협했다. 중소기업이 줄줄이 쓰러졌고, 부산 노동집약적 산업의 부도율은 전국의 2.4배, 서울의 3배까지 치솟았다. ‘근대적 조세제도’라는 이름으로 서둘러 밀어붙였던 부가가치세는 자영업자와 노동자, 서민의 숨통을 더 조였다.
그래서 거리의 구호는 절박했다. “부산 시민 살려내라!” “부가가치세 철폐하라!” 세무서가 공격 대상이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억눌릴수록 단단해진 노동자의 힘
‘수출 100억 달러’ 신화로 앞에서 끌고 정치적 억압으로 뒤에서 짓누르던 유신체제는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 아래서 노동자들은 쉬지 않고 저항의 힘을 쌓았다. 평화시장에서 피어난 불씨는 동일방직, 원풍모방, YH무역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이어졌다.
부마항쟁에서 연행된 사람은 1,500명가량, 그중 학생이 아닌 대다수는 노동자·상인으로 1천 명을 넘었다. 마산에서는 수출지역 노동자들이 대거 투쟁에 나섰다. 10월 16일 부산 삼화고무 노동자들은 밀린 임금을 내놓으라며 파업에 들어갔다.
박정희 정권도 원인을 모를 리 없었다. 보도에 따르면 중앙정보부는 부마항쟁을 “조세 불만, 빈부 격차, 저임금, 정치 불신, 불황에 따른 취업난이 소요로 이어진” 것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10월 18일 이미 조직적인 배후를 의심했고, 합동수사본부와 중앙정보부는 7개 사건을 꾸려 배후를 만들어 냈다. 몇몇 사건은 북한과 연계 지목되었다. (“간첩 누명 쓴 부마민주항쟁 43주년…중앙정보부 ‘조작보고서’ 단독 입수”, MBC ‘스트레이트’, 2022.10.16)
항쟁을 훔친 사람들, “우리가 남이가”
부마항쟁은 박정희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살려냈다. 그러나 그 열매는 신군부가 가로챘다. 부마항쟁 진압을 경험한 제3공수특전여단은 1980년 5월 광주를 피로 물들였다. 신군부의 억압 아래에서 부마항쟁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 틈을 비집고 역사 왜곡이 시작되었다. 한때 YH무역 노동자들 편에 섰던 김영삼과 그 옹호 세력이 정권을 잡기 위해 손을 댄 것이다.
1987년 4.13 호헌조치를 규탄하는 마산 신민당 대중집회에서 김영삼은 “4.19혁명과 부마항쟁의 정신을 이어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자”고 외쳤다. 그런데 ‘3당 합당’ 후 치러진 1991년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앞두고 바로 그 자리에서는 “민주 대 반민주가 대립하는 시대는 갔다”라고 말했다. 이어 “김영삼 씨를 밀어줘야 부산이 발전한다”는 말이 퍼져나갔다.(“‘변절’ 김대표의 마산행”, 한겨레신문 1991.6.15)
1992년 대선을 앞두고는 급기야 법무부 장관이 지역 기관장들을 모아 “우리가 남이가, 영남 표가 결집해야 한다” “지역감정을 자극해서라도 김대중 정권을 막자”고 모의했다. (이른바 ‘초원복국’ 사건 : “지역감정 부추겨 김영삼 당선 돕자”, 한겨레신문 1992.12.16) 대선 결과 부산·경남에서 김영삼 후보는 70% 이상의 표를 쓸어 담았다.
이후 영남 정권, 호남당, 김대중 당 같은 프레임은 입법·행정 권력을 떠받치는 기둥이 되었다. ‘영남의 부마, 호남의 5.18’이라는 구도도 정치적 필요에 따라 되풀이해 만들어졌다.
분리 선택을 넘어, 민중의 역사로 잇다
부마항쟁과 5.18민중항쟁은 진압군도, 진압 후 들어선 군부 권력도 같다. 민주화를 요구한 것도, 싸운 주체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역사는 오랫동안 둘을 별개 사건으로 정리해 왔다. 7개월이라는 시간차, 시위 성격이나 피해 규모 등이 다르기 때문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마산과 광주를 이을 협의체 등을 조직해야 한다”는 제안도 되새겨 봐야 한다. (“국가 폭력 겪은 마산과 광주…‘비극 반복 않으려면 연대하고 기록해야’”, 경남도민일보 2023.11.9)
투쟁의 주인공이었던 노동자·민중 앞에는 ‘헌법 전문 공동 수록’ 대응을 넘어 두 항쟁을 하나의 역사의식으로 엮어야 할 과제가 놓여 있다.
또 다른 과제는 부마항쟁을 개인이나 특정 정치세력의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끊어내는 것이다. 부산 중구 중앙공원에 ‘YS민주역사기념관’이 첫 삽을 뜰 예정이라고 한다. “부산 민주주의 역사기념관으로 시작됐으나 박형준 전 부산시장의 공약 사업으로 추진되면서 YS민주역사기념관으로 성격이 바뀌었다.”(한국일보 2026.5.12)
이처럼 항쟁을 분리하거나 사유화해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시도는 5.18민중항쟁, 6월항쟁, 촛불항쟁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사를 제 것으로 삼으려는 권력에 맞설 때, 노동자·민중의 민주주의가 생생하게 되살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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