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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의 역사] 군산에 가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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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858회 작성일 23-05-16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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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공장 내부.png

 

근대도시문화에 가려진 군산의 노동운동

 

김미화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사라진 사람들

군산은 일제가 수탈한 쌀이 집결하는 항으로 정미업이 발전한 도시다. 일제 강점기의 정미소들은 쌀을 가공하자마자 배에 실어 나를 수 있도록 철도 변이나 항구 옆에 있었다. 정미소와 미선소 사업주는 여기서 일하는 메가리공과 미선공들의 임금을 낮추는 방식으로 이윤을 추구했고,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은 끊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오늘날의 군산시는 인천, 목포, 전주 등의 도시들처럼 근대건축물을 활용한 관광사업이 특화된 도시가 되었다. 그 중 근대미술관은 1907년 국권 침탈기에 일본으로 곡물을 반출하고 토지를 강탈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일본제18은행건물이었고, 근대건축관은 1922년 일제가 설립한 조선은행 군산지점이었다. 당시 조선은행은 일본 상인들에게 특혜를 제공해 군산과 강경의 상권을 장악하도록 하기도 했다.

군산시는 2011역사는 미래가 된다라는 기조 아래 두 건물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근대문화와 해양문화를 전시하는 근대역사박물관을 설립했으며, 특히 박물관 주변의 장미공연장은 다목적 공연장으로 탈바꿈했다. 이곳은 1930년대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창고건물로 일제가 쌀을 수탈해서 저장했던 장소였다. 그런데 군산이 내세우는 근대에는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그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근대, 노동자의 시대

1920년대에 이르러 정미소 노동자, 부두하역노동자, 철도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해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두드러진 투쟁을 살펴보면 19231월 조선정미주식회사에서 쌀을 고르는 미선공노동자(대부분 여성) 100여 명이 파업을 벌였다.

미선공들은 다른 정미소에 비해 고르는 쌀도 좋지 않고 임금도 더 적으니 임금을 인상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무시했고 이에 노동자들은 투쟁을 전개했다. 이듬해 군산 낙합정미소 노동자들은 사업주가 낮은 임금을 더 내리자 파업에 돌입했다.

더군다나 사업주가 자기들을 대신해 새로 인부들을 고용해 정미소를 돌리자 파업노동자들은 공장을 습격하기도 했다. 파업노동자들과 새로 고용된 노동자와의 싸움이 불가피해졌다. 마침내 자본과 노동의 싸움은 자본의 비열한 수단으로 인해 노동자 간의 싸움으로 변질했다. 한편 정미소노동자들은 부두하역노동자들이 십일조 폐지와 십장제 철폐를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하자 적극 파업에 연대하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투쟁과 연대로 조직과 활동은 확대됐고 군산은 노동운동의 핵심지역이 됐다. 전국에서 군산으로 온 선진활동가들과 노동자들이 노동공제회와 노동연맹회 등 전국 단위의 노동단체를 조직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군산에서 조직된 노동조합과 노동단체는 30개가 넘었다.

 

건축물에 숨겨진 노동자의 삶과 투쟁

현재 군산은 근대문화도시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곳에서 어둡고 힘들었던 식민지시기,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착취당한 노동자 민중, 그들의 삶과 투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노동조건을 바꾸기 위해 투쟁과 파업을 전개했고 민족차별에 맞섰다. 그러한 흔적과 기억들을 근대건축물을 오가는 거리 곳곳에서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근대역사 속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이해하는 과정일 것이다. 내항까지 끌어온 기찻길과 군산세관, 근대건축관, 근대미술관을 거닐 때 그 거리에서 뜨겁게 투쟁하고 살았던 노동자들의 삶을 돌이켜보자.

 

 

 

[사진] 군산 정미공장 내부. 출처: 국립전주박물관 옛 사진 속의 전북 1894~1945,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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