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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내레터

[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길] 최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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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924회 작성일 23-03-08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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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규헌.jpg

 

 

인연의 시작과 끝

이승원 사무처장과의 인연은 김종배 동지 장례식을 통해서다. 그전에도 안면이야 있었지만 대화를 한 건 김종배를 보내는 장소에서가 처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후 ‘한내’를 설립하고 함께 일하면서 상호 이해의 폭이 커졌다.

특히 이승원 처장은 복직이 됐음에도 노동역사자료에 대한 열정으로 복직하지 않고 ‘한내’ 사업에 몰두했다. 꼼꼼하면서도 완벽한 성격이 업무에서도 그대로 드러났고, 일 처리도 깔끔했다. 사실 나는 대표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지만, 한 일이 별로 없었고 순전히 이승원 처장이 맡아서 했다.

그런데 그런 이승원 동지가 급작스럽게 죽었다. 그렇게 떠날 거라고 상상이라도 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움이 크고 아픔이 전율처럼 전해왔다. 몸이 아프면서도 일에 대한 열정으로 당당함을 보이던 그도 자신의 운명을 바꾸지는 못했다.

4.3항쟁 역사기행 때 휴대용 투석 기구까지 챙겨서 제주에 왔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히고. 어느 날은 얼굴이 검게 그을린 모습, 황달기가 확연한 얼굴빛, 그런 모습으로 일에 매달렸던 모습이 너무 아프다. ‘노동자역사 한내’ 사업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자신의 건강은 단단하게 챙기지 못한 채 일에 몰두했을까.

 

‘1987’ 30주년 준비하다 떠난 이승원

당시 한내에서 이승원 동지가 기획했던 2017년 사업계획은 ‘노동자대투쟁 30주년 기념’ 3대 핵심사업으로 전시회와 역사기행, 그리고 ‘책을 발간하는 것이었다. 4월 초에 사무실에서 긴급히 의논할 게 있다고 하여 회의를 했다. 4월 초까지 ‘1987 노동자대투쟁’ 원고를 받기로 했는데, 필자에게 연락해보니 못쓰겠다는데 어쩌냐는 것이다.

이승원 처장과 정경원 실장은 나보고 쓰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며 사무·전문직노동자 투쟁 부분은 도와주겠다고 한다. 나한테 쓰라고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상태에서 자신도 없고 어안이 벙벙했지만 ‘오죽 답답하면 그럴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처장이나 자료실장은 맡은 다른 원고가 많아서 그 일까지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책은 그렇게 거칠게 써졌고 이승원 사무처장은 87노동자대투쟁 전시회와 역사기행 준비에 몰두했다. 경복궁역 전시관으로 장소를 확정하고 전시를 앞둔 7월 말 어느 날, 이승원 동지는 그렇게 떠났다. ‘1987 노동자대투쟁’ 책은 이승원 동지가 나에게 맡긴 마지막 일인 셈이다.

이승원 동지는 일을 포함한 사적인 배려도 지극했고 운동에 대한 열정도 강했다. 그런 그가 부인과 딸 지연이, 그리고 우리 모두를 두고 떠났다. 그의 죽음은 의료사고라는 의심이 강하게 일었지만 진실을 규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장례는 공공연맹과 엘지유플러스노조, 한내 공동으로 치르고 동지를 모란공원에 모셨다.

장례 전날 밤, 늦도록 이승원 동지와 긴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는 말 한마디 없었다. 하관식을 마치고 생각해보니 동지는 나에게 최선을 다했는데 나는 그에게 배려한 게 없었다. 모란공원을 내려오며 지연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아빠는 나에게 많은 걸 해주고 배려했는데 나는 아빠에게 해준 게 하나도 없구나.” 사실이었다.

이승원 동지와 이별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은 정말 빠르다. 한내 사업 전부에는 이승원 동지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난다. 그래서 그가 더욱 그리워지기도 한다. 나는 시간이 갈수록 모란공원이 싫어진다. 물론 모란공원을 좋아서 찾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성범(1968~1999, 전노협), 김종배(1963~1999, 공공연맹), 김명환(1968~2000, 안산 신흥노조), 한경석(1962~2002, 부노협), 이승원 동지 등 너무 빨리 이승과 작별을 하지 않았는가. 젊은 그들, 그리고 나이 든 나. 고인이 되어버린 그들은 한결같이 나에게 깊은 애정을 쏟았는데 나는 그들을 무엇으로 어떻게 사랑했을까.

노동자역사 한내는 경복궁역 전시관에서 1987 노동자대투쟁 전시회를 열고 북콘서트도 했으며 재정을 마련하려고 그림전시도 했고, 2019년 초 고양시로 사무실을 옮겼다.

  

전노협 정신의 복원…고통스러운 역사도 되새겨야

단병호 위원장(국회의원 시절에도 나는 단위원장으로 불렀다)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노협 30주년인데 한번 모여야 하지 않겠냐며 참가 범위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는데 난감했다. 위원장, 사무총장, 직무대행과 지도위원, 후원회를 맡으셨던 교수님 정도가 모여 저녁 식사를 했다. 그날 모임에서는 조발전망에 관한 논의도 없었고 투쟁방안에 관한 토론도 필요 없었다. 오로지 오래된 지인들 사이의 반가움만 있을 뿐이었다. 수십 년 전에 전노협을 건설하고 사수하기 위한 결기는 아련하게 흐려지는 세월 속에 묻어갈 뿐이었다.

지금도 혹자들은 전노협 정신을 얘기하며 지난날의 투쟁을 평가하는데 전노협 창립 30주년이라고 모인 이들은 가는 길이 달랐다. 세월은 한 세대를 보냈고 모든 사물은 변화발전 한다는데 객관적으로 어떤 것을 발전이라고 하는지 궁금하다. 내가 흐르는 세월에 적응 못 하는 아둔한 존재이고, 다른 길을 걷는 자들이 현실을 올바로 직시하는 출중한 능력을 갖췄는지 모른다. 그러나 보다 분명하게는 역사를 누가 어떻게 기술하며 어떻게 평가하든 운동적 관점의 유무에 달려 있을 것이다.

노동자역사 한내는 ‘전노협 건설 30주년’을 맞아 전시회를 야심차게 준비했으나, 코로나19 때문에 개별참여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전노협 30주년을 기념하는 이유는 한 세대를 돌이켜 본다는 의미보다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을 계승 발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강하다. 전노협은 70~8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성과를 축적했고,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성과로 만들어졌으며 투쟁성을 바탕으로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자주, 민주, 계급, 투쟁, 변혁지향)을 공식화시켰다. 나아가 전노협은 민주노총을 건설하는 기반이자 원동력이었다. 다시 말하면 민주노총 역사의 중심이 바로 전노협이었다는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에서 전노협과 그 정신을 복원하지 않으면 민주노총은 한국노총 외에 또 하나의 중앙조직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 민주노조운동은 역사적으로 운동의 연속성으로 그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다. 자본과 권력에 대한 투쟁 의지와 노동해방 이념을 정해진 틀에 가두지 않고 끊임없이 노동자계급의 심장에 순환시켜 내는 것, 그것을 민주노조운동의 일상사업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지금도 ‘한내’ 1층 자그마한 전시실에는 30년 전에 건설하고 사수했던 전노협의 역사가 빛바랜 전시물로 놓여 있고 2층 서고에도 전시되고 있다. ‘한내’ 2층 서고로 가는 계단에는 사진이 걸려 있다. 김진균, 김종배, 이승원, 이정원. 나는 계단을 오를 때마다 고인이 된 이 사진들을 보는 것이 싫다. 그러나 떼자고 하지는 못한다. 한내의 숨결이고 역사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워도 어쩔 수 없다. 역사는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역사도 마주하며 고통 속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야 하니까.

 

* ‘양규헌의 살아온 이야기’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분량 때문에 생략했던 내용까지 담아 2023년 이내에 종이책으로 출판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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