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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내레터

[이달의 노동운동] 1991년 박창수열사 옥중살해 진상규명투쟁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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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1,069회 작성일 23-05-23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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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미 (노동자역사 한내 기획국장)

 

 

열사여 살아오라, 노동해방의 함성으로

 

지난 118일 민주노총 건물을 에워싼 국가정보원¹직원들은 홍보라도 하듯 단체복을 갖춰 입고 들이닥쳤다. ‘간첩을 잡으러 온 그들은 첩보영화의 멋진 정보원의 모습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음지에서 일하는 모양새는 더욱 아니었다. 윤석열 시대에 발맞춰 복원한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²는 원훈과도 달랐다.

이런 소동은 과거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시절 그들이 벌였던 살벌한 만행을 생각하면 그저 애교스러울 지경이다. 군부독재 시절 안기부는 대학가와 노동현장 일대에 상주하며 24시간 감시활동을 했다. 그들은 살인도 불사했다.

 

한진중노조, 압도적 지지로 민주파 당선

노태우 정권은 1990년 전노협 와해 공작³에 실패하자 지노협을 와해시켜 전노협을 무력화하려고 했다. 1991년 전노협 무력화 공작은 영남지역 노동운동의 중심지인 부산에서 시작됐다. 공작은 안기부 등 공권력을 동원해 부산노련의 핵심 사업장인 대우정밀노조, 한진중공업노조, 고려부산노조를 전노협에서 탈퇴시키기 위한 입체 작전으로 나타났다.

특히 1990년 말에 한진중공업노조가 민주 집행부를 구성하고 활발한 연대활동을 전개하자 노태우 정권에게는 큰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부산지역 노동운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진중공업 민주노조 집행부를 파괴해야 했다. 한진중공업노조에 탄압과 공작이 집중됐다.

19907월 한진중공업노조 조합원들은 91%라는 압도적 지지율로 민주노조 추진위원회출신인 박창수를 위원장으로 선출, 어용노조 28년 동안 강요받았던 기나긴 굴종과 침묵을 깨뜨렸다.

한편 안기부는 노조 간부를 매수하면서 지도부를 교란·약화시켜 전노협으로부터 떼어내려는 공작을 전개했다. “한진중공업노조는 조합원들의 나이가 많고, 의식이 취약하며, 노조의 집행력이 아직은 취약하므로 지도부 몇 사람만 매수하면 쉽게 무너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한진중공업노조가 스스로 전노협과 부산노련을 탈퇴하게 함으로써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공작이었다. 그러나 이런 공작은 아주 치밀한 정치적 계산하에 음지에서 진행돼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이는 1991년 상반기에 포항제철노조가 연대를 위한 대기업노동조합 회의’(연대회의)를 탈퇴하게 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진행된 공작이다.

 

구치소 수감 중 병원에서 의문의 죽음

199156일 새벽 445, 안양병원 마당 시멘트 바닥에서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박창수 위원장의 시신이 발견됐다.

앞서 5411시경 서울구치소에 박 위원장을 면회하러 간 사람이 면회를 하지 못했다. 이마에 상처를 입어 병원에 갔다는 것이다. 박 위원장은 1130분에 안양병원(현 안양샘병원)에 도착, 2층 중환자실에 입원해 X-rayCT 촬영을 했다. 뇌 손상은 없고 두개골에 길이 5cm 깊이 2mm 정도의 골절이 있어 봉합수술을 받았으며 의식은 명료했다.

도대체 구치소에서 무슨 일로 이마를 다쳤으며, 병원에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박 위원장의 입원 소식을 들은 한진중공업노조 간부들은 54, 다음날(55)에는 위원장 직무대행 이정호와 사무국장 장세군이 안양병원에 도착했다. 박 위원장의 시신이 발견된 6일 새벽에는 가족과 김형태 변호사가 현장으로 달려왔다. 경찰과 검찰도 도착했다.

630분경 유족과 변호사가 검사와 이야기하는 도중에 경찰이 일방적으로 시신을 병원으로 옮기다가 유족과 노조 간부들이 가로막자 시신이 복도에 안치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10시경 전경 1백여 명은 병원 복도에서 시신을 둘러싸고 출입을 봉쇄했고, 전경 1백여 명은 병원 밖에서 출입을 통제했다. 소식을 들은 노동자와 민주인사들이 속속 병원으로 달려왔다. 11시경에는 ‘12시에 부검을 강행한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이에 12시경 임석순 전노협 부위원장와 백기완 선생, 박 위원장 부친, 김형태 변호사 등이 병원 3층 원장실 옆 회의실에서 박종환 검사, 안양경찰서장, 안양병원장 등과 회의를 하고 병원에서 경찰 철수 시신은 병원 영안실로 옮기고 분향 자유롭게 실시 사체에 대한 CT촬영·부검 등은 이후 양측 합의해 실시키로 하는 등 사태를 순리적으로 풀기로 합의했다.

 

안기부의 개입전노협 탈퇴 압박

합의에 따라 오후 1시경 경찰이 병원에서 철수하고, 시신을 영안실로 옮겨 분향소를 설치했다. 저녁 730분경 병원 앞에서 노동자·학생·시민 4백여 명이 고 박창수 위원장 구속·살인 규탄대회를 열었다. 여기에 박 위원장의 모친이 참석해 진상규명을 호소했다.

박 위원장이 구속돼 서울구치소에 갇힌 때는 2월이다. 213일 대우조선 파업에 대한 지원방안을 논의했다는 이유로 전노협과 연대회의 간부 7명이 제3자개입 혐의로 구속되면서다. 그리고 425일 부산 대연동 카페에서 안기부 조정관이라는 자가 장세군, 조직부장 한재문에게 전노협 탈퇴와 해고자 복직을 맞바꾸자라는 제안을 한 바 있다. 4월 말에는 장세군이 이정호에게 구속된 박 위원장 조기 석방을 위해 안기부 직원을 만나보자라고 제안해 부산 민락동 횟집에서 안기부 직원을 만났는데 이때 안기부 직원이 또다시 전노협 탈퇴를 제의했다.

조사결과 드러난 바에 따르면 박 위원장이 입원한 5일 오후 7시에도 장세군은 박 위원장 옆에서 병원 공중전화로 안기부 요원과 통화했고, 15분 뒤에 안기부 요원이 병실로 전화를 걸어와 장세군이 받았다. 1940분경 안기부 요원이 병실로 또다시 전화를 걸어왔고 박 위원장의 부친과 장세군이 받아 통화했다. 이날 저녁 8시경 박 위원장이 부인에게 일이 자꾸 꼬여간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영안실 난입 시신탈취에 맞선 투쟁

57일 안양병원에 경찰병력이 증가하고, 검찰은 사체를 부검하겠다는 안내장을 배포했다. 경찰 차량은 20여 대였고 노동자와 학생으로 구성한 사수대는 2백여 명이었다. 새벽 5시경 경찰이 소화기를 쏘며 바리케이드를 뚫고 안양병원 내로 진입했다. 경찰은 시신을 탈취하기 위해 최루탄을 쏘며 영안실까지 들어왔다. 민족민주운동 진영은 하루 전의 합의사항을 어기고 병력을 투입한 데 항의했으나 도경국장은 내 소관은 이미 떠났다고 했다.

오후 130분경 백골단이 영안실 뒷벽을 해머로 부수고 최루탄을 쏘면서 난입해 사람들을 끌어내고 시신을 탈취했다. 이 과정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시신을 지키기 위해 영안실에 끝까지 남아있던 노동자·학생·시민 총 142명이 연행됐다. 영안실을 침탈당하자 7백여 명은 병원 앞 차도를 점거하고 경찰과 대치하며 농성을 벌였다.

오후 230분경 박종환 검사의 지휘 아래 일방적으로 한 시간 동안 부검을 강행했다. 검찰측은 투신으로 인한 신장·간장 파열, 척추 골절로 보이는 추락사라고 발표했고, 정확한 사인은 다음 날 오전에 발표하겠다고 덧붙였다. 오후 4시경 유족이 병원 4층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시신탈취와 강제부검 등을 비난하며 공개사과와 사인규명을 요구했다. 시신을 탈취당했다는 연락이 전해지자 분개한 노동자·시민·학생들이 병원 주변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벽산쇼핑(2001아울렛) 앞과 병원 앞, 주변 거리에서 5~6백 명이 투쟁을 벌였고 그 수는 점점 늘어났다. 이날 부산에서는 한진중공업노조 조합원 2천여 명이 작업을 거부하고 박창수 열사의 영정을 앞세워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검찰은 강제부검 후 추락사로 발표

58일 경찰은 안양병원 주위를 포위한 채 출입을 봉쇄했다. 가족들의 식사와 음료 공급까지 차단했으며 병원 안에 있는 모든 공중전화까지 끊어버렸다. 병원은 셔터를 내리고 응급실만 가동했다. 유가족과 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은 병원 6층 병실에 감금됐다.

이날 오전에 범국민대책회의산하에 박창수 위원장 사인규명을 위한 진상조사단(진상조사단)’을 구성했다. 진상조사단이 병원에 도착해 유족과 병원관계자 면담 조사를 요구했으나 경찰이 가로막아 들어가지 못했다. 오후 4시경 양길승·김종구 등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소속 의사들이 병원에서 서병화 병원 부원장과 면담을 했는데 부원장은 유족 등이 있는 6층 병실에 공권력 배치를 요청한 적이 없다고 했다.

오후 4시경 검찰이 유족에게 사체 인수증을 받고 시신을 넘겨주었으며 623호 병실에 감금됐던 유족과 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영안실로 내려왔다. 그런데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영안실에 경찰이 다시 난입, 6층에서 내려온 대책위원회 관계자 8명을 강제 연행했다.(4명 구속) 한편 오후 8시경 연세대에서 대책위원회 관계자들과 면담을 하고 나간 한진중공업노조 사무장 장세군은 이후 행방불명됐다.

이날 오후 수원지검은 추락사라는 사건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진상조사와 함께 전국노대위 활동

전노협 중앙위원이기도 한 박 위원장이 공작탄압으로 살해된 199156, 노동운동 진영은 박창수 위원장의 죽음은 노동운동 탄압의 집약적 표현이라고 규정했다. 곧바로 한진중공업노조를 비롯한 전노협, 연대회의,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전국노동단체연합준비위원회 등 6개 노동단체로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과 노동운동 탄압분쇄 전국노동자 대책위원회’(전국노대위)를 구성했다. 전국노대위는 연세대와 안양, 그리고 전노협 사무실에 상황실을 두고 집행위원회를 구성했으며, 57일 사건의 성격과 요구, 이후 투쟁계획을 발표했다.

전노협은 전국노대위의 투쟁방침에 따라 전국투본의 투쟁 일정을 발표했다. 59일 오후 총파업 돌입 후 국민대회에 적극 결합 59일 이후 원진레이온 집중 규탄투쟁59일 이후 전국노동조합비상대표자회의 소집 515~18일 사이 최고 수위의 투쟁 전개 등이다. 이와 함께 살인정권 노태우정권 퇴진 구속노동자 석방 동지의 억울한 죽음 진상규명 등을 요구하며 구체 실천지침도 하달했다.

58일부터 곧바로 진상조사단의 활동과 전국노대위의 사업이 전개됐다. 권영길 업종회의 의장을 단장으로 하는 진상조사단은 581차 모임을 하고,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510일 기자회견을 열어 박창수 위원장이 안양병원에 입원해 있을 당시 안기부 요원이 몇 차례 전화하고 방문한 사실을 폭로했다. 이에 따라 전국노대위는 투쟁 요구에 안기부 개입 진상규명 안기부장을 비롯한 책임자 처벌 등을 추가하고 선전과 투쟁에 집중했다.

 

노조마다 분향소 설치, 철야농성

박 위원장의 죽음이 알려지자 투쟁은 전국으로 확산했다. 지역마다 56일 오후부터 전국노대위와 함께 살인정권 규탄대회를 여는 등 즉각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부산노련은 56일 오후 1시 한진중공업·대우정밀 등 8개 노조를 중심으로 대표자회의를 소집해 결의를 모은 뒤 곧바로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부산노련 소속 노조들은 리본 달기, 대자보 붙이기를 긴급 조직하고 지역 속보도 발간했다. 당시 휴무 중이던 한진중공업노조는 특근자를 중심으로 비상연락망을 가동해 소식을 알렸다. 조합원 120명은 시신 사수와 진상규명을 위해 안양병원으로 올라갔다. 회사는 조합원들이 대책을 논의하려 하자 바로 귀가 조처했지만, 노조는 굴하지 않고 이날부터 100여 명이 비상대기하면서 농성을 벌였다. 57일 오전에는 다대포 2공장에서도 규탄대회를 열고 전 조합원이 분향했다.

울산에서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6일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현대정공 등 6개 노조 대표자가 모여 현총련 대표자를 서울에 있는 전국노대위로 파견했다. 이와 함께 9일까지 울산 전교조 사무실에서 노동단체들과 함께 농성, 성명서 발표, 조합원 홍보 강화 등을 실천키로 결의했다. 마창노련도 오후 2시 대표자 회의를 소집해 단위사업장별로 분향소를 설치하고 59일까지 중식집회, 59일에는 총회투쟁 및 집단조퇴 등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대구노련은 576시 계명대에서 살인정권 퇴진 총력투쟁 결의대회를 했고 대우조선노조에서도 56일 간부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수도권에서는 경기노련 안양지구를 선두로 검찰의 시신탈취를 막기 위해 안양병원으로 집결했다. (로 이어짐)

 

박창수 열사 약력

1960728일 부산시 중구 부평동 135번지 출생

1979년 부산 기계공고 졸업

197931()진양기계 2공장 입사

1980730()진양기계 2공장 퇴사

198091일 영진설비공사 입사

1981530일 영진설비공사 퇴사

1981101일 대한 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에 배관공으로 입사

1987년 노동조합 활동 시작

1990728일 한진중공업노동조합 위원장으로 당선

1991210일 대우조선노조 파업투쟁 지원을 연대회의 지도자들과 함께 논의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

199154일 구치소 내에서 이마에 상처를 입고 안양병원으로 옮겨짐

199156일 새벽 445분 안양병원 앞마당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

 

[참고자료] 전노협백서발간위원회, 전노협백서 4죽음으로 사수한다! 전노협(1991)(2003)

 

[사진설명] 노동자역사 한내, 백골단이 영안실 벽을 해머로 부수고 들어와 박 열사의 시신을 탈취했다. 벽에 구멍이 뚫린 모습.

 

[각주]

1 국가정보원 19615.16 군사정변 직후 박정희정권에서 중앙정보부로 출발, 197910.26 이후 전두환 집권 후 1980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개편, 김대중정권 시절 1999년에 국가정보원으로 개편했다.

2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국가정보원 원훈으로 1961년 초대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종필이 지어 1998년까지 썼으며, 이후 정권마다 바뀌다가 20226월에 다시 이 원훈으로 복원했다.

3 전노협 와해 공작 국가권력과 자본은 전노협에 대한 이데올로기 공세와 지도부 구속, 무노동 무임금 적용 등 가능한 탄압수단을 모두 동원했다. 정부의 전노협 와해 대책은 크게 지노협과 단위노조를 지원하는 행위를 제3자개입금지 위반으로 엄벌 전노협 건설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인물들을 다양한 이유로 사전에 사법처리 전노협 가입노조에 대대적인 업무조사를 실시해 전노협에 기금을 낸 것이 밝혀지면 사법처리 전노협과 관련된 행사·대회·집회 원천봉쇄 및 각종 유인물 배포 사전 차단 등 4가지 방향으로 진행됐다.

4 부산노련 부산·양산·김해 등 부산 인접 지역 민주노조들을 포괄해 1989930일 창립한 부산지역노동조합총연합.

5 백골단 1980~1990년대 시위대를 진압하고 체포하기 위해 구성된 체포조. 무술 유단자와 특전사 출신으로, 일반 전투경찰과 구분되는 청색 재킷과 흰색 헬멧 때문에 백골단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6 범국민대책회의 1991426일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집단구타당해 사망하자 이튿날 제 민주단체가 모여 구성한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

7 전국투본 1991329일 전노협과 연대회의가 구성한 임금인상과 물가폭등 저지 및 노동기본권 수호를 위한 전국 노동조합 공동투쟁본부’.

원진레이온 집중 규탄투쟁원진레이온에서 1977년부터 일하다 1983년 직업병 증상이 나타난 김봉환씨(1938년생)가 1991년 1월 5일 사망전노협을 비롯한 32개 민주단체가 장례위원회를 구성해 인정투쟁을 벌였다. 5월 21일 직업병 피해자 고 김봉환 산업재해노동자장을 엄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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