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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내레터

[이달의 노동운동] 1991년 박창수열사 옥중살해 진상규명투쟁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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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996회 작성일 23-05-30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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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미 (노동자역사 한내 기획국장)

 

(에서 이어짐)

 

연이은 죽음살인정권 규탄투쟁 확산

59일에는 강경대 열사, 박창수 위원장의 타살과 연이은 학생·노동자의 자살에 분노한 민중들이 해체 민자당, 타도 노태우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와 전국 87개 시군에서 50여만 명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는 6공화국 들어 최대 규모로, 특히 대도시에서는 서울 20, 부산 7, 광주 4만 등이 집결했다. 이들 노동자·학생·시민은 조직 대오를 갖춰 도심을 완전 점령하고 최루탄과 물대포로 진압하는 경찰을 포위, 곳곳에서 무장해제시키며 밤늦게까지 투쟁을 벌였다. 전국투본의 시한부 총파업 결정에 따라 산하 98개 노조는 이날 오후 330분 일제히 작업을 중단하고 총회를 열어 노태우 타도를 위한 국민대회에 참가할 것을 결의하고 무리 지어 대회에 합류했다. 그 외 노조들도 중식시간에 집회를 하거나 잔업을 거부했으며, 전국에서 5만여 명의 노동자가 가두시위에 참여했다. 서울에서는 구로공단의 9개 노조가 파업에 돌입, 오후 2시 가리봉역에서 800여 명이 거리집회를 하고 시청 앞 국민대회에 참가했다.

511일에는 전국 14개 도시에서 5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및 원진레이온 직업병 살인규탄과 노태우정권 퇴진 결의대회를 했다. 서울지역 노동자들은 건국대에서 3천여 명이 모여 집회를 하고 오후 630분경부터 종로, 을지로, 명동 일대에서 격렬한 가두투쟁을 전개했다.

19914~5월에는 국가폭력이 극에 달한 시기로, 3명이 타살되고 8명이 분신자살했다. 426일 명지대 1학년생 강경대가 시위 중 백골단에 맞아 숨진 것을 시작으로, 여기에 항의해 사흘 뒤인 429일 박승희(전남대)가 몸에 불을 붙였고, 이어 51일과 3일에는 김영균(안동대)과 천세용(경원대)이 분신했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과 노동자 윤용하, 이정순이 앞선 대학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분신했고, 보성고 3학년생 김철수와 학교 선배 정상순도 뒤를 따랐다. 8명이 분신해 죽어가는 동안 박 위원장이 56일 타살당했으며, 525일에는 성균관대 김귀정이 시위 중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진압에 질식사했다. 연이은 죽음 속에 전개된 19915월의 노태우 정권 퇴진투쟁은 연일 전국에서 격렬하게 벌어졌다.

 

타도! 노태우” 518일 전국에서 총파업

전국투본은 515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 및 폭력통치 종식을 위한 전국노동조합 비상대표자 회의를 열어 518일 총파업투쟁을 결의했다. 이날 현주억 전노협 위원장 직무대행은 전국투본과 업종회의 대표자회의의 결의를 모은 전국 노동조합 대표자들에게 드리는 긴급 제안서를 통해 노동자들이 투쟁의 중심에 서지 않는다면 현재 노태우 정권이 부딪히고 있는 위기는 곧바로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 진영의 위기로 돌아올 것이라며 총파업투쟁을 호소했다. 비상 결의대회에 참여한 350여 개 사업장 5백여 명의 대표자와 간부들은 노태우를 몰아내는 것만이 노동자가 갈 길이라며 박수로 제안을 통과시키고 지역과 사업장별로 총파업투쟁의 결의를 밝혔다. 이 결정에 따라 각 지역에서는 515~16일 사이에 대표자회의 등을 열어 결의를 다지고 구체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518일 투쟁에는 전국적으로 총 19개 지역, 156개 사업장, 91,415명이 참여했다. 그리고 이후 ‘520일 오후 9집계를 보면 파업 중인 사업장은 4216,202, 휴무 사업장은 2045,833, 4시간 파업은 25, 2시간 파업은 38, 1시간 파업은 29, 집단조퇴는 2개 사업장이었다. 파업 돌입 이외의 모든 노조는 중식시간 집회와 잔업거부 후 동시 퇴근, 사업장별 가두행진을 벌여 지역별 광주항쟁 계승 및 폭력살인, 민생파탄 노태우정권 퇴진 제2차 국민대회와 시위에 조직적으로 참여했다.

전노협은 518일 총파업투쟁의 여세를 몰아 이후 투쟁의 파고를 높이고자 했으나, 5월 하순 이후 완강한 투쟁을 전개하는 데 한계가 드러났다. 진상조사는 답보상태에 머물렀고 대중 동력은 침체했다.

 

공작탄압 안기부 해체 촉구 가두투쟁

활동이 지지부진하던 5월 하순에 전국노대위는 투쟁이 힘있게 전개되지 못하는 원인에 대한 총괄 평가에 기초해 6월 투쟁계획을 마련했다. 노동운동·민중운동 탄압 규탄 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면서 현장 중심의 진상조사 투쟁을 강화하고 안기부에 대한 정치공세를 집중키로 방향을 잡았다. 이러한 투쟁을 성과 있게 조직해 장례투쟁을 준비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노동운동에 대한 안기부 등의 공작탄압 분쇄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고, 범노동운동과 민중운동권의 동참을 광범하게 조직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해 전국투본은 525일 회의를 열어 전국노대위 구성과 활동이 조합원을 중심에 놓는 실천이 되지 못했다는 반성과 함께 지속적이고 완강한 규명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조문단을 조직하고 영안실 규찰을 조직적으로 책임지기로 했다.

이에 따라 5월 말에는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신민당사 점거농성과 안기부 항의방문, 그리고 노동자들의 항의 규탄집회가 잇달았다. 62일 부산에서는 부산을 비롯해 마산, 창원, 울산, 대구, 구미 등지에서 모여든 노동자들이 부산대 운동장에서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해 주범 안기부 해체, 91년 임금인상단체협약 갱신 투쟁 승리, 노태우정권 타도 전국 노동자·학생 결의대회를 했다. 대회에 참석한 3만여 명의 노동자와 학생들은 집회를 마친 뒤 동래구 내성로타리에서 부산진구 하마정까지 가면서 박창수 위원장 공작살해 안기부를 해체하라!’ ‘민생파탄 폭력살인 노태우정권 타도하자!’, ‘노동운동 탄압하는 노태우정권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고 밤늦도록 가두투쟁을 전개했다.

이날 서울에서도 수도권 노동자 25백여 명이 백병원 맞은편 명동성당 앞길에서 결의대회를 하고 안기부 남산 분실로 항의행진을 했다. 노동자들은 박 위원장의 영정 11개와 박창수 위원장 살해 주범 노태우를 타도하자!’ 등의 현수막을 앞세우고 행진을 벌인 뒤 종로2가에서 열린 국민대회에 합류하여 투쟁을 전개했다. 65일에도 지역별로 투쟁이 벌어졌고 서울지역에서는 안기부 항의방문도 전개했다.

투쟁의 집중과 더불어 진상조사단의 활동도 재개돼 가족 진술과 병원에 대한 재조사를 활발히 전개했다. ‘장세군 체포조를 조직해 부산에 파견하기도 했다. 5314차 기자회견에서는 안기부원 홍상태의 개입 사실, 장세군이 72평 초호화 아파트를 분양받은 사실 등을 구체적으로 폭로하기도 했다.

 

정원식 달걀 세례 후 전선 퇴조

그러나 6월 초순까지 집중투쟁을 벌였음에도 진상규명 활동이 답보상태에 머무르는 가운데 613일 한국외국어대학에서 발생한 정원식 총리에 대한 달걀 세례 사건을 계기로 정세는 급격히 불리해지고 있었다.

전국노대위는 정세퇴조에 따라 집중적으로 강화되는 노동 탄압을 저지하며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당면 전선을 유지한다는 기조 아래 대우정밀, 한진중공업, 태평양화학 등 파업 사업장을 중심으로 상경 집중투쟁을 계획했다. 그러나 상경투쟁에 파업 사업장이 동참하지 못하고, 노동운동 탄압 저지 전선 구축이라는 투쟁의 의의를 살리지 못한 채 한진중공업노조 중심의 진상규명 투쟁으로 전개됐다.

한진중공업노조는 박 위원장이 의문사한 지 40여 일이 지나도록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전 조합원의 결의를 모아 서울에서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기로 했다. 612일 새벽, 다섯 대의 버스로 상경한 1천여 명의 조합원들은 성균관대학교에 모여 시위 진압과정에서 숨진 김귀정 열사의 장례식에 참가한 뒤 장례행렬과 함께 거리로 나가 유인물 2만 부를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산 안기부 앞에서 항의규탄집회를 했다. 613일에는 한진그룹 본사 항의방문을 하다가 참여한 조합원 전원이 연행되고 말았다. 경찰은 조합원들을 전경버스에 태워 서울 각지에 분산시켰지만, 조합원들은 성균관대학교로 재집결해 16일까지 본사 항의방문 투쟁을 이어갔다.

회사측은 상경투쟁을 막기 위해 조합원 개개인을 만나 올라가면 해고하겠다며 협박했고, 부산에서 출발하는 날에는 관리자들이 부산역에 나와 상경을 만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박창수 위원장 사인규명, 임금인상 투쟁 완전 승리만이 민주노조와 전노협을 사수하는 길이라는 굳은 결의로 파업투쟁을 계속했고, “확실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결코 내려오지 않겠다는 결의를 모아 입장을 발표했다.

 

629~30일 전국노동자장 엄수키로

한편 국민회의¹는 전국노대위의 제안에 따라 체계를 확대 개편하여 618, 산하에 노동열사 박창수 위원장 전국노동자 대책위원회’(장례대책위)를 구성했다. 대책위원장에는 백기완 전노협 고문, 집행위원장에는 문성현 전노협 중앙위원을 선임했다. 그리고 장례대책위 산하에 교섭단을 구성해 한진중공업 회사를 상대로 한 막바지 교섭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기획회의를 둬서 장례도 준비해 나갔다. 투쟁 과제로는 철저한 진상규명 유가족 생계대책 및 보상 한진중공업노조의 임단협 갱신 진상규명 투쟁 기간 중의 임금 지급 및 고소·고발 취하 등이 제기됐다.

장례대책위는 단기적으로는 결정적인 진상규명의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다른 투쟁 요구 등을 해결하기 위해 교섭을 진행했다. 장례대책위의 노력도 결국 투쟁이 뒷받침되지 못함으로써 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622, 안양에서 투쟁하던 한진중공업노조 조합원들이 독자적인 해결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대의원대회와 조합원 총회에 참석하려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623~24일 대의원대회에서는 조합원들의 의견에 따라 조업 재개를 포함한 방안들을 검토할 예정이었다.

장례대책위는 622일 밤에 회의를 열어 많은 현안 해결과제 가운데 한진중공업노조의 임단협 갱신 요구는 노조에서 독자적으로 해결토록 하고 장례대책위는 유족 보상문제와 진상규명 투쟁과 관련된 파업 기간 중의 임금 지급 및 고소·고발 취하, 그리고 장례문제로 한정하자고 확인하고 유족과 한진중공업노조가 동의한다면 629일 장례를 치르자고 내부방침을 결정했다. 논란을 벌인 끝에 장례대책위는 최소한의 요구인 유족 보상이 관철되지 않을 시 연기할 수도 있다는 단서를 달아 625일 기자회견에서 장례 일정을 629~30일로 발표했다.

박창수 위원장 전국 노동자장 장례위원회는 재야원로를 고문으로, 국민회의 상임 공동대표들을 장례 부위원장으로 해서 각계각층을 망라해 구성했다. 장례는 전국노동자장으로 하되 장례위원회는 범국민적으로 구성한다는 방침에 따른 것이다. 전국의 단위노동조합 위원장과 간부들이 장례위원을 맡았다.

 

창수야, 내 아들아! 일어나 싸워라!”

629일 새벽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오후 2시로 예정된 발인식을 앞두고 유족 보상과 한진중공업노조 간부에 대한 고소·고발 취하, 파업 중인 한진중공업노조 조합원에 대한 임금보장이 있기 전까지는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가족들의 입장에 따라 장례가 연기되는 듯했으나 장례와 투쟁을 병행키로 했다.

안양병원 앞에는 12백여 명의 경호대가 창수야, 내 아들아! 일어나 싸워라!”라는 문구가 새겨진 흰옷을 입고 장례행렬 인도를 준비하고, 3천여 명의 노동자·학생·시민이 늘어섰다. 시신을 탈취하려고 경찰이 뚫었던 구멍이 그대로 남아있는 영안실 옆 안치실에서 50여 일 만에 오후 4시부터 염이 시작됐다. 꽁꽁 언 몸에 흰 삼베가 총총 감기고 발엔 꽃신이 신겨졌다. 옮기는 도중 시신이 부패할까 봐 드라이아이스로 관을 채우고, 전노협 깃발로 관을 덮었다. 한진중공업노조 조합원들이 관 덮개 위에 한반도를 수놓은 모양으로 국화꽃을 놓았다. 오후 5, 영안실 앞에서 발인제가 거행됐다. 모두의 오열 속에 박 위원장의 부인은 아들 용찬이와 함께 절하며 여보, 우리 용찬이 잘 키울게라며 흐느꼈다.

운구는 안양병원을 떠나 벽산쇼핑 앞으로 향했다. 대형 태극기가 앞장서고 가족, 장례위원, 노동자, 시민이 뒤따랐다. “동지여 나를 땅에 묻지 말고 그대 가슴에 묻어 주오” “깨어나라 투사여 일어나라 동지여” “아가야 아빠는 자랑스러운 노동자였다라고 쓴 만장 1백여 개와 깃발이 뒤를 이었다.

610, 운구는 벽산쇼핑 앞 사거리에서 3만여 명의 노동자·학생·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를 지냈다. “박창수 위원장은 공동묘지에 묻히러 가는 것이 아니라 개돼지만도 못한 노태우 정권을 땅에 파묻으러 간다는 백기완 장례위원장의 개식사에 이어 추모시가 낭독됐다. 단병호 전노협 위원장의 박창수 위원장의 죽음 앞에서 민중의 아픔과 고통을 우리 손으로 씻고 자유와 평등의 길을 열 것을 맹세하자는 비장한 추모사와 권영길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위원장, 이대수 목사 등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이어 추모공연이 시작됐다. “죽여라! 죽여!” 영안실을 깨부수며 난입한 백골단의 고함, 최루탄 터지는 소리, “여보 당신은 죽어선 안 돼, 일어나부인의 절규가 효과음으로 나오고 문화선동대의 춤사위가 이어졌다. 조객들의 한숨 소리가 들리고 열사의 동생은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흘렸다. ‘단결투쟁가가 흘러나오고 한진중공업노조 깃발이 나와 춤추며 동지여 복수다!”라는 외침이 터졌다. 시민들까지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는 가운데 공연이 끝나고 장례행렬은 벽산쇼핑 앞을 떠났다.

서울구치소로 갈라지는 인덕원 사거리 앞까지 이어지는 행렬의 도로 양편에 가득 찬 시민들은 함께 슬퍼하며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음료수를 한 보따리씩 사 와서 장례위원들에게 전해 주는 시민들도 있었다. 1040분 인덕원 사거리에서 간단한 추도식을 한 뒤 장례행렬은 24대의 차량에 나누어 타고 30일 새벽 120분 서울구치소 입구에 멈췄다. 전경들이 수십 대의 쓰레기차로 입구를 철통같이 막아놓고 늘어서 있었다. 서울구치소 앞 추모식을 죽어도 허용할 수 없다는 경찰의 입장에 유족과 노동자들은 격분해 방패를 부수고 쇠파이프로 내려치는 등 격렬한 항의투쟁을 전개했다.

 

71일 새벽, 솥발산에 열사 잠들다

한진중공업노조와 부산대에서는 6천여 명의 노동자와 학생들이 29일 추모제를 열며 장례행렬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양에서 출발한 장례행렬이 30일 아침 9시 통도사 입구 요금소에 도착하자, 새벽 6시부터 마중 나와 있던 한진중공업노조 조합원과 경호대들이 같이 차를 타고 한진중공업노조로 향했다.

1030분 한진중공업 정문 1앞에서 내린 운구행렬이 노동조합으로 향했다. 한진중공업 정문에는 열사여 살아오라 노동해방의 함성으로라는 검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박 위원장은 생전에 앉아 일하던 위원장실에 머물렀다. 한진중공업 단결의 광장에는 박 위원장을 마지막으로 보내기 위해 4천여 명의 노동자와 시민이 가득 모여 있었다. 광장 왼쪽 도크에는 박 위원장이 만들던 거대한 화물선 한진 엘리자베스 호가 작업이 중단된 채로 서 있었다.

이때 장례위원으로부터 갑자기 장례 연기 결정이 전달됐다. “유가족 보상, 노조원들의 50여 일간의 진상규명 투쟁 중의 임금 지급, 간부 6명에 대한 고소·고발 취하가 해결되지 않은 채 박창수 위원장을 묻을 수 없다는 조합원들의 의견이 장례위원회에 전달됐다. 노조 대표는 교섭에 들어갔고 규탄집회가 시작되었다. 오후 535분 교섭은 결렬되고, 6시에 다시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오후 7, 노조 사무실에서 발인제가 열렸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1천여 명의 경호대 사이로 박 위원장이 들어왔다. 박 위원장이 죽음으로 사수하고자 했던 전노협의 단병호 위원장은 박창수 위원장은 임금 몇 푼 더 올리려 싸운 것이 아닙니다.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 노동해방을 위해 싸우다 갔습니다라고 했다. 열사 부활 굿을 끝으로 장례행렬은 한진중공업을 떠났다. 작업복을 입은 60여 명의 늙은 노동자들이 위원장 운구에 나섰다. 그 앞뒤로 경호대, 방송차량, 선도차량, 태극기, 영정, ‘노동해방의 불꽃대형 만장, 유족, 장례위원, 열사부활도, 만장, 깃발, 추모대열 순으로 1에 달하는 긴 행렬이 부산 시내로 향했다.

10시 부산시청 앞 노제에는 1만여 명의 시민이 참여했다. 1120, 장례행렬이 부산역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부산노동자연합 김진숙 의장, 부산 국민연합 배다지 의장, 강경대 열사의 아버지 강민조, 권영길 언론노련 위원장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71일 새벽 1시 장례행렬은 장지로 향했다.

새벽 5, 장례행렬이 안양병원에서 출발한 지 이틀 밤이 지나서야 양산 솥발산 공원묘지에 도착했다.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이 관을 땅에 묻었고 유족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백기완 장례위원장은 박창수 위원장이여 눈에 흙이 들어오더라도, 천년 동안 눈을 번쩍 뜨고 있으시오. 당신의 씨앗이 해방의 세상을 꽃피울 때까지, 네 원수를 갚는 그 날까지 산자가 따르리니라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이어 아들 용찬이와 박 위원장의 부인이 울부짖으며 관 위로 흙을 뿌렸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장례에 참여한 사람들은 눈물을 훔치며 투쟁을 다짐했다.

부산과 안양에서는 매년 열사의 기일에 즈음해 추모식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 512일에도 안양역에서 박창수 열사 32주기 추모식을 진행한 뒤 안양샘병원까지 행진했다. <>

 

[참고자료] 전노협백서발간위원회, 전노협백서 4죽음으로 사수한다! 전노협(1991)(2003)

 

[사진설명] 630일 한진중공업 공장 안에서 진행한 영결식. 왼쪽에 박 위원장이 만들던 한진 엘리자베스 호가 보이고 그 앞에 열사의 영정이 있다.

 

[각주]

9 달걀 세례 사건 문교부(현 교육부)장관 재직 당시 전교조 교사들을 모두 해임·파면하고, 해임교사들에 대한 복직 요청도 단호하게 거절한 바 있는 정원식이 199163일 한국외국어대에서 강의를 마치고 나오자 대학생들이 밀가루와 달걀을 퍼부었다. 언론이 총리 서리가 밀가루를 뒤집어쓴 사진과 함께 운동권은 스승을 공격하는 패륜아들이라고 맹공격하면서 학생운동에 대한 여론이 차갑게 돌아섰다.

10 국민회의범국민대책회의는 김귀정 열사 장례식이 끝난 뒤 615일 상설기구인 국민회의로 전환, 지속적인 대정부투쟁을 벌여나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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