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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목격한 사회] 여름이 온다 - <그해 여름>, 김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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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1,389회 작성일 23-06-27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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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창원대로.jpg

 

 

왕의조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노동문학

 

문학은 눈이다. 그 눈은 문학이 현실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갈래로 호명되는데, 특히 사회적 약자의 삶을 들여다보려는 경향의 작품을 노동문학이라고 부른다. 한국의 노동문학은 1925년에 결성된 카프(KAPF)¹ 활동을 전후한 일제강점 시기와 전태일의 분신을 비롯한 1970~80년대의 독재 정권 시기에 주로 발표되었다.² 이후, 90년대를 지나면서 노동 문학 전반이 공유하고 있던 맑스주의적 세계관은 점차 기성 대중문학과의 경계를 허물어갔다. 이는 예술이 해방의 무기가 된다는 계급적 문예운동의 해체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좀 더 엄밀히 하자면 한국적 자본주의의 심화 현상이 문학 운동과 맺는 관계의 성격이 변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기성의 노동문학이 품고 있던 이념적 색채가 흐려지고 좀 더 정형화한 르포르타주 형식으로의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게 어느 쪽이든 노동문학은 시대의 상황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라 불릴 때도 있었고, 참여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범주화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작가의 인식과 문학의 내용은 언제나 당대의 맥락에서 읽어야 하는 것(동시대성)이기에, 앞선 식의 구분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문학이 어디를 들여다보고 있는가에 있다. 그 중 노동자 문예 운동의 역동기에 등장한 작품인 <그해 여름>은 한국 사회의 가장 뜨거웠던 여름을 응시하는 소설이다.

 

 

그해 여름

 

“6.29선언에는 해직교수나 제적학생들을 복직, 복교시켜 준다면서 우리들 해고노동자들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습니다. 이것은 현 정권의 반노동자적 입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 <그해 여름> , 김하경

 

1987629일 노태우는 인민을 향해 투항을 선언했다. 물론 그 선언은 비자발적이었고 강제된 것이었으며, 어떤 면에서는 혁명의 호소를 억압하는 공세적 성격을 지니기도 했다. 그리고 그해 여름. 남한의 노동자들은 3개월간의 대규모 파업 시위를 벌였다. 6월 항쟁에 이어 7, 8, 9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는 투쟁에 야당은 인민의 자제를 호소했다. 이것이 저들이 혁명과 거리를 둔 방식이었다.

소설 <그해 여름>은 그 여름의 풍경을 기록하고 있다. 노동자들에게는 자기 존엄과 권리를 관철하기 위해, 민주성과 자주성을 갖춘 상식적이고 투쟁적인 조직, 민주노조가 필요했고 그를 위해서 무엇이든 했다. 밤낮으로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선전물을 작성하거나, 주말도 없는 고된 노동을 마치고도 잠자는 시간을 쪼개어 서로를 교육하고 서로를 조직하고 서로를 선동해야만 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품처럼 갈려 나가는 서로를 구하는 것이 그들의 소명이었기 때문이다.

 

터엉- 하며 기계가 돌아가더니 탁- 하며 어딘가에 부딪히는 느낌이 손목에 전해졌다. 눈앞이 아찔해짐과 동시에 해철의 두 다리가 달랑 들려 올라갔다. 다닥다닥 무언가 감기는 소리도 들렸다. 완전히 몸 전체가 들려 올라가 반대편 기계에 머리를 부딪히면서 해철은 정신을 잃었다. 오른쪽 팔이 허전했다. 머리를 돌렸다. 팔이 보이지 않았다.” - <그해 여름> , 김하경

 

저들은 노동자를 가족이라고 부르거나 때로는 산업역군이라 불렀다. 그렇지만 노동자들이 받은 대우는 가족이라기보다는 가축에 가까웠고, 산업역군이라기보다는 산업소모품과 같았다. 80년대의 중공업식 성장에 동원된 노동자들은 일종의 한계에 이르렀고, ‘까라면 까는병영적 노사관계는 그 기능을 다 해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해 여름의 뜨거운 아스팔트는 그 모든 분노와 억압의 해방구였다.

  

 

여름이 온다

 

통일중공업의 노동자들은 수행자들보다 더 처절하게 30년 동안 매일매일 사생결단하면서, 매해매해 목숨 건 결사항전을 계속했다. 좌우 앞뒤 어디를 돌아봐도, 노동자가 처한 현실은 똑같은 장대 끝이요 똑같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 끝이었다. 그러니 뒤돌아설 수도 없었고, 무조건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중략) 죽기위해서가 아니었다. 살기 위해서였다. 살기 위해서 죽어야 했다. 뛰어내려본 사람은 안다. 산다는 것이 죽는다는 것과 같다는 것을.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것을. 이것이 통일중공업 노동자들이 사는 법이었다.” - 김하경

 

그해 여름. 참 많이도 죽었다. 박종철이 죽었고, 이한열이 죽었고, 이석규가 죽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무언가(민주)를 요구했고, 그로 인해 죽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그들의 요구는 그 누구도 위협하지 않았고, 그 누구에게도 해롭지 않았다. 오히려 절대 다수에게 이로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민주냐 독재냐. 새날은 오지 않았고, 그들의 정당한 주장은 단지 그들을 죽음으로 데려갔다.

결국 혁명은 작은 개선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어떤 이들은 이제 노동운동을 위해, 민주노조를 위해 목숨을 거는 시절은 끝났다고도 말한다. 오늘날에는 공공연히 87 체제의 종식을 이야기하는 위정자들이 판을 친다. 그런데도 그 뜨거운 여름은 계속된다. 거리에 나선 이들의 등줄기에는 소금꽃이 피고, 여름의 아스팔트는 노동의 설움을 뱉어낸다. 끝나지 않는 여름. 노동자의 여름이 온다.

 

 

[각주] 

¹ Korea Artista Proleta Federacio,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²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조세희, 1978 / <노동의새벽> - 박노해, 1984 / <파업> 안재성, 1989

  

[사진] 1989년 4월 24일 창원대로, <내 사랑 마창노련> - 김하경, 경남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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