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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노동운동] 1985년 6월 구로동맹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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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1,547회 작성일 23-07-04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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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미 (노동자역사 한내 기획국장)

 

  

노동자들의 동맹 들불처럼 번져

 

 

19866, 구로지역 노동자들이 6일 동안 동맹파업을 벌였다. 2,500여 명이 참여한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정치파업이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수출주도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했다. 구로공단은 정부가 계획해서 만든 수도권의 대표적인 수출공업 산업단지였다. 구로공단에 있는 기업들은 낮은 임금을 기반으로 섬유, 봉제, 가발, 전기·전자 제품을 만들어 미국과 일본으로 수출하며 떼돈을 벌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삶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구로지역에 노조가 결성되기 이전인 19846월 대우어패럴 여성노동자 초임이 일급 기준 양성공 2,040, 본공 2,400원이었다. 1985년 전국 평균 짜장면값이 616원이니, 고작 짜장면 세 그릇 값이다. 다른 사업장도 사정은 비슷해 월급으로 따지면 72,000~75,000원 수준이었다. 198410월 산출한 여성노동자 최저생계비 160,128원의 절반도 안 된다. 저임금은 장시간 노동으로 이어졌다. 대우어패럴의 경우 정상근무 10시간에 12~8시간의 잔업과 철야로 월평균 80여 시간 초과노동을 했다. 최고 110시간 이상 초과노동을 하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노동자들에게는 단결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1983년 초 전두환 정권의 일시적인 유화조치를 계기로 노동자·학생 등 민주세력이 다시 결집하고 있었다. 노동조합 결성과 연대의 분위기도 무르익어 갔다. 구로지역 노동자들도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했다.

198468일 가리봉전자를 시작으로 대우어패럴(69)에 이어 효성물산(611), 선일섬유(78)에 노조가 결성됐다. 비슷한 시기에 결성된 구로지역의 노조들은 일상적인 연대 활동으로 동료의식을 높여 나갔다. 1985년 임금인상 투쟁을 거치면서 노동조합 활동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유화조치는 오래 가지 않았다. 노동자·민중의 투쟁이 격화되자 전두환 정권은 다시 강력한 탄압정책으로 돌아섰다.

 

 

민주노조파괴, 또 당할 수 없다

 

1985622일 오전 11시에 대우어패럴노조 김준용 위원장, 강명자 사무국장, 추재숙 여성부장이 연행·구속되고, 간부 8명이 불구속 입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두 달 전 임금인상 투쟁 때 파업농성을 주도하며 집시법과 노동법을 위반했다는 게 이유였다.

소식을 듣고 분노한 조합원들은 즉각 작업을 중단했다. 100여 명이 회사 총무과에 몰려가 고발 취소를 요구하며 오후 5시까지 농성을 벌였다. 이후 간부들은 밤을 새워 대책회의를 하고, 이튿날(23) 대의원 전체가 모여 총파업을 결의했다.

대우어패럴노조 간부 구속은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전면적 탄압의 신호탄이었다. 대우어패럴노조는 구로공단에서 민주노조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었다. 다른 민주노조들은 다음은 우리 차례라는 위기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민주노조 파괴 과정을 다시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23일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청계피복 노조 위원장이 모였다. 대책회의 결과 624일부터 구속자 전원 석방 노동운동탄압 중지 악법 철폐 노동부장관 사퇴를 요구하며 동맹파업 농성에 돌입하기로 결의했다. 구로동맹파업 투쟁의 막이 오르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624일 오전 8, 대우어패럴 조합원 350여 명이 관리자들의 방해를 뚫고 1공장 2층 생산과 작업실에 집결해 우리의 결의문을 낭독하고 파업농성에 돌입했다. 오후 2시가 되자 마주 보는 건물에 있는 효성물산노조 조합원 400여 명이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에게 손을 흔들며 파업에 동참했다. 같은 시각, 가리봉전자 구로공장과 독산공장 500여 명과 선일섬유 노동자들까지 농성을 시작했다. 3개 사업장 사측은 곧바로 물과 전기를 차단해버렸다. 경찰 150여 명은 신일섬유 농성장을 봉쇄했다.

625일 남성전기노조 조합원 300여 명이 오후부터 농성을 시작했다. 세진전자노조 조합원 250여 명도 오후 530분부터 11시까지 회사 운동장에서 지지농성을 했다. 롬코리아도 2층 식당에서 100여 명이 철야농성을 전개했다. 이렇게 연대투쟁은 하루 만에 7개 사업장으로 확산했다.

이날 구로공단과 주변 주택가 곳곳에는 구로지역 20만 노동자여! 다함께 일어나 싸워나가자!’라는 제목의 유인물이 살포됐다. 구로지역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연합·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청계피복노조 명의의 유인물은 626일 오후 830분 가리봉오거리에 총집결해 전두환 정권의 노동자 탄압을 규탄하는 궐기대회를 벌이자고 호소했다. 같은 날 노동부는 농성 강제해산과 가담자 징계처분 방침을 발표했다.

 

 

10개 사업장 2,500명이 함께 맞섰다

 

626일 대우어패럴 농성자 9명이 허기와 갈증으로 실신해 병원으로 실려 갔다. 환자가 속출했지만 농성장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져 갔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등 22개 단체 50여 명도 오후 2시부터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에서 지지농성에 돌입했다. 오후 640분에는 대학생 2명이 대우어패럴 맞은편 협동봉제 공장 굴뚝 중간지점에 올라가 구속노동자 석방구호를 외쳤다. 그때부터 200여 명의 노동자·시민·학생이 경찰의 살벌한 경계를 뚫고 가리봉오거리와 구로공단역 등지에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저녁 9시까지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82명이 구타당하며 연행됐다.

대우어패럴 농성노동자들에 대한 압박이 더욱 극심해졌다. 27일 음식 반입까지 가로막힌 가운데 탈진한 노동자들이 실려 나가고 남은 농성자는 100명 남짓으로 줄었다. 그런데도 회사는 비조합원 300여 명을 강제 동원해 농성장 앞 운동장에서 4시간 동안 노조를 비방하는 구호를 외쳐대는 등 방해 책동에 열을 올렸다.

한편 효성물산노조가 회사로부터 보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26일 밤 11시에 농성을 해산했으나 회사는 73일까지 휴업공고를 냈다. 효성물산과 청계피복 조합원 100여 명은 27일 오후에 노동부장관 면담을 요구하며 노동부 중부지방사무소에서 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강제 해산당한 것은 물론 청계피복노조 사무장과 효성물산 노조 위원장 등 7명이 구속되고 말았다.

27일에는 성수동에 있는 삼성제약 노동자 250여 명이 중식을 거부하고 투쟁에 동참했다. 청계피복노조 사무실 농성에 이어 기독교회관, 가톨릭노동청년회, 민중불교운동연합에서도 농성에 돌입, 627일까지 7곳에서 350여 명이 지지농성을 벌였거나 진행하고 있었다.

28일 부흥사노조 120여 명이 출근과 동시에 3층 작업장에서 구속노동자 석방을 요구하며 연대투쟁에 동참했다. 그러나 관리직 남성들이 쇠파이프와 몽둥이를 휘두르며 난입해 오후 430분경 해산당하고 말았다. 회사는 해산 이후 공갈, 협박, 폭행으로 80여 명에게 사직서를 쓰게 하고 29일부터 무기한 휴업에 들어갔다. 이날 대우어패럴에서는 130분경 노사가 처음으로 만났으나 구속자 고소취하 노동부장관 면담 주선 음식 반입 파업에 대한 보복 금지 등 노동자들의 요구를 회사가 거부해 협상은 30분 만에 결렬됐다.

27일에 농성을 해산한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등에서는 보복조치로 농성주동자들에 대한 폭력이 난무했다. 대우어패럴 농성장 노동자들도 굶주림에 지쳐가고 있었다. 629일 오전 8시경 대학생 18명이 빵과 우유, 의약품을 짊어지고 지붕을 타고 넘어 합류했다. 농성장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다급해진 회사는 깡패 500여 명과 사복경찰을 동원해 벽을 뚫고 진입했다. 그들은 벽돌을 던지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등 폭력적으로 농성을 강제 해산시켰다.

농성을 풀었다가 신민당사에서 다시 농성을 벌이던 효성물산노조 조합원 36명도 30신민당이 노동운동 탄압과 폭력사태를 막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약속(성명 발표)을 받고 농성을 풀었다.

 

 

1970년대 성과 계승해 1987년 대투쟁으로

 

이렇게 6일간의 구로동맹파업은 끝났다. 624일부터 29일까지 5개 사업장(6개 공장)에서 동맹파업을 벌였다. 5개 사업장에서는 잔업 거부 후 농성, 중식 거부로 함께 했다. 구로공단 곳곳에서는 동맹파업을 지지하는 가두시위가 벌어지고 선전물이 배포됐다. 노동운동단체를 비롯한 민중운동 세력도 지지농성을 벌였고, 동맹파업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에서 지지성명이 잇달았다.

그러나 투쟁이 끝난 뒤 자본과 정권의 보복조치로 43명이 구속되고, 38명이 불구속됐으며, 47명 구류, 7백여 명이 해고 또는 강제사직 당하는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희생은 가혹했으되, 구로동맹파업이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매우 크다. 무엇보다 구로동맹파업은 단절될 뻔한 노동운동의 역사를 이어 새로운 역사로 발전해 나가는 수레바퀴 역할을 했다. 지역 차원의 연대투쟁은 과거 군사정권의 제도적·물리적 탄압 아래서도 현장 대중과의 결합을 토대로 강력한 저항을 수행했던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노동조합이라는 대중적 근거지를 확보한 상황에서 조합주의와 기업별주의를 극복하고 연대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그리고 자본과 정권에 맞선 연대투쟁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폭력경찰 물러가라’, ‘노동악법 폐지하라등의 구호를 외침으로써 정치적 요구를 드러냈다. 사업장 안의 노동조건을 뛰어넘어 전체 노동자·민중의 요구를 담아낸 것이다.

무엇보다 구로동맹파업은 한국 사회에서 노동운동의 위치를 분명히 하고 노동자가 변혁운동의 주체임을 각인시킨 사건이다. 군사독재정권에 정면으로 맞선 구로지역 노동자들의 정치동맹파업은 폭압 통치로 위축됐던 민주화운동진영의 사기를 끌어 올렸다. 전두환의 유화조치는 다시 강경탄압 기조로 돌아섰지만, 노동자들은 불굴의 투쟁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흐름은 마침내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불붙어 노동자계급이 한국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가 된다.

 

 

[참고자료] 전노협백서발간위원회, 전노협백서 1권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1987~1988)』 (2003) 

 

[사진] 1985년 6월 24일 농성하는 대우어패럴 노동자들 모습, 구동파20주년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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