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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의 역사] 군산에 가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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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1,190회 작성일 23-07-11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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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화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옥구의 이엽사

 

옥구는 군산의 옛 이름이다. 전라북도 옥구군은 1894년까지 전주부 관할이었으나 1899년 군산항이 개항되고 군산부가 창설되자 군산부에 편입됐다.

전북 군산시 서수면 항쟁로 138에는 임피중학교가 있다. 도로명이 항쟁로인 것은 중학교 교정에 세워진 옥구농민항일항쟁기념비와 관련이 있다. 옥구농민항일항쟁은 1927년 옥구군 서수면에서 벌어졌던 옥구 이엽사농장 소작쟁의를 가리키며 그 농장 터가 지금의 임피중학교다.

이엽사농장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대지주들이 공동으로 경영하던 전형적인 식민지 농업회사였다. 일본인 농장주들은 일찍부터 옥구지역을 관개사업의 거점으로 이용했다. 19082월에 설립된 옥구서부수리조합은 전북은 물론 조선 최초의 수리조합이었다. 일본으로 쌀을 수탈하려는 일본인 지주들은 1926년 협동농장 이엽사를 설립하고 본점을 전주에 두었다. 1927년 즈음 이엽사는 전주의 삼례농장, 익산군의 황등농장, 옥구군의 서수농장 등에서 약 1,200정보(360만 평, 여의도가 265만 평)를 소유하고 1,700여 명의 소작농을 거느린 대규모 농장이었다.

 

 

수탈에는 상한선이 없다

 

1927년 추수가 끝나자 이엽사농장은 추수한 농작물의 75%를 소작료로 내놓으라고 했다. 이러한 소작료는 당시 전국 평균 소작료율 48%, 전북지역 평균 소작료율 45%에 비해서도 너무 높았다.

장태성, 김행규, 박상호 등 농민조합 간부들은 여러 차례 농장을 방문해 소작료를 다른 농장들처럼 45%로 내릴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농장주들은 이들이 농장과 상관없는 사람들이라며 농민조합 상근자로 인정하지 않고 소작료 인하 요구를 거부했다. 결국 농민조합과 조합원, 소작농들은 19271124일 임시총회를 열고 소작료를 인하할 때까지 소작료 거부 투쟁을 결의했다.

이엽사농장은 공권력을 동원해 조합원들을 탄압했다. 늦은 밤 경찰은 임피역 앞에서 장태성을 체포해 군산경찰서로 압송하려고 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조합원들은 즉각 징을 쳐서 소작인 300여 명을 모았고 곧바로 이들은 주재소를 습격해 갇혀있던 장태성을 구출했다.

이 사건을 주시하던 일제 당국은 즉시 주모자들과 조합원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1126일 밤까지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 간부인 김행규, 장태성, 박상호를 비롯하여 조합원 80여 명이 검거됐다. 이들의 죄명은 소요, 구금자 탈취, 협박, 도주 등 소작료 투쟁과는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고려공산청년회와 옥구 야체이카

 

1920년대 들어서면 사회주의 사상이 청년들에게 넓게 퍼졌다. 군산 옥구지역의 청년들도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노동자·농민이 주인되는 신세계를 건설하겠다는 결의를 다져갔다. 군산에서 노동자를 중심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하는데 적극적인 활동을 했던 지역 청년들은 이번에는 소작농을 중심으로 농민조합을 조직했다. 1926년 옥구농민조합, 1927년 서수농민조합이 결성됐다. 청년활동가들은 농민조합 지부장과 간부를 맡고 농민과 소작농들을 교육하고 조직했다. 농민과 소작농들의 소작쟁의는 일제 강점기 전인 조선시대에도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그런데 옥구 소작쟁의의 다른 점은 고려공산청년회(공청) 옥구 야체이카(세포조직)가 배후에 있다는 것이다.

ML파 조선공산당 전라북도당은 1927년 봄 임혁근을 당 책임비서로, 이평권을 공청 책임비서로 하여 출범했다. 이들은 전라북도 지역의 청년단체와 노동단체를 조직하고 지도하며 농민조직 결성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들이 고려공산청년회 소속이었다는 것은 이들이 사회주의자이거나 사회주의 사상을 신념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발적 소작쟁의가 아니라 의식화된 농민들이 조직적으로 쟁의를 일으켜야 한다는 목표로 농민조합을 건설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옥구 소작쟁의는 조직적이고 목적 의식적인 항일농민항쟁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면 농민운동은 일제의 강력한 탄압과 해산 강요, 조직결성 금지 등의 탄압으로 거의 모든 합법적 농민조직이 해체됐다. 이에 따라 농민조합은 지하로 잠복해 갔으며 비합법 투쟁 형태로 농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 노동자, 농민을 주축으로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하려는 활동가들과 결합하면서 1930년대에는 혁명적 농민조합이 활성화되었다.

 

  

[사진]

옥구 소작쟁의, 1927.11.30, 동아일보

 

[참고자료]

최은진, 1920년대 후반 전북 옥구 이엽사농장 소작쟁의의 전개과정과 성격, 사학연구142, 한국사학회, 2021

김민영, 1920년대, 군산 옥구지역의 농촌사정과 옥구소작쟁의, 군산대학교 논문집Vol 24, 1997

이준식, 조선공산당 성립과 활동, 독립기념관, 2009

조중곤, 1920년대 군산 옥구지역에 대한 일본의 토지수탈, 원광대학교 석사논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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