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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노동운동] 1987년 9월 노스웨스트항공 파업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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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1,315회 작성일 23-08-29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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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웨스트.jpg

 

이황미 (노동자역사 한내 기획국장)

 

 

그때도, 문제는 파견제였다

 

19877~8월 타올랐던 노동자 대투쟁의 불꽃이 사그라지는가 싶던 9, 미국기업인 노스웨스트항공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서 1백일 동안 투쟁을 벌였다.

미국 항공사의 서울지사 한국인 노동자들이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에 이미 파견 노동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제기했으며, 정직원과 파견노동자가 하나로 뭉쳐서 연대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투쟁이다.

1947년 한국에 취항한 노스웨스트항공(North-West Airline, NWA)¹은 당시 국내 노동시장의 특성을 속속들이 활용해 막대한 이윤을 남기고 있었다. 물론 노동자들의 노동력 무한 착취로 가능했다.

 

 

정직원-파견직 나눈 노사관리에 반발

 

파견 노동문제는 심각했다. NWA는 해마다 신규직원 30~40명을 뽑아 1~2명만 정직원으로 채용하고 화물·여객·정비부에 합격한 사람은 아무런 설명 없이 한국산업안전주식회사(KSC)²라는 용역회사에 입사시킨 뒤 NWA로 파견했다. 결국 NWA 채용시험에 합격해 NWA 소속 직원과 똑같은 일을 NWA에서 하고 있는데도, 월급은 KSC에서 받는 이상한 구조다.

대학 졸업 후 입사한 3년 차의 경우 NWA 직원은 기본급 40만 원에 연 600%의 상여금을 받는 반면 KSC 소속 직원은 기본급 21만 원에 연 400%의 상여금을 받았다. 그나마 KSC는 임금총액의 20%를 용역료로 착취했다.

NWA는 빈번한 연발·착에 따른 연장근무 대부분을 초과근무수당이 싼 KSC 직원들에게 떠맡겼다. 사측은 파견직원들에게는 불평 없이 일하면 NWA 정직원으로 뽑아주겠다고 압박하고, NWA 직원들에게는 파견직보다 월급을 두 배나 받으면서 왜 불만이 많냐고 억압하며 교묘한 이원적 노사관리로 양쪽 노동자들 모두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한편 외국인과 임금 격차도 심했다. NWA 한국인 여자승무원 초봉은 27만 원이었지만 미국인 여자승무원의 초봉은 80만 원이었다.

정직원과 파견직원에 대한 차별은 너무도 오랜 관행이어서 1985년 여름에 NWA 노동자 전체가 집단 무단결근투쟁을 벌였지만, 불합리한 구조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공항에서 농성투쟁, 다른 외국회사로 확산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활발해지자 NWA노조도 반격에 나섰다.

노조는 91KSCNWA로 완전 흡수 기본급 50%, 상여금 100% 인상 탑승직원 해외 의료보험 실시 등 17개 요구안을 사측에 정식으로 제출했다. 그러나 사측은 답을 내놓기는커녕 일본지사에 근무하던 미국 직원과 한국 직원들을 서울로 불러들여 업무를 맡겼다.

마침내 NWA노조원들은 KSC 파견노동자들과 함께 999시부터 김포공항에서 파업농성에 돌입했다. 사측은 곧바로 농성장 전화선을 끊고, 도청장치를 설치하는 한편 조합원들이 입사할 때 추천서를 써 준 지도교수들에게까지 편지를 보내 허위사실을 유포했다.

분노한 노동자 40여 명이 914일 국제선 2층 화물과 사무실로 몰려가 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을 시작했다. 이어 17일에는 70여 명이 국제선 2층 노스웨스트 출국수속장에서 ‘2원적 노사관계 철폐를 요구하며 침묵시위를 벌였다. 조합원들은 이날 예정된 노사협의 장소와 시간을 사측이 일방적으로 변경하며 시간만 끄는 데 항의해 가슴에 ‘PRAGILE(파손주의)’라고 쓴 스티커를 붙이고 ‘X’ 표시한 마스크를 쓴 채 농성을 이어갔다.

NWA와 같은 노사관리체제를 채택해 64명의 KSC 파견직원들을 쓰고 있는 일본항공(JAL) 한국 직원들도 ‘2원적 노사관계 철폐7개 항을 요구하며 918일부터 동조파업에 돌입했다. 다른 외국기업인 플라잉타이거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도 격려금을 보내왔다. NWA에서 벌어지는 노동 탄압은 다른 외국인 회사에서 일하는 한국 노동자들도 똑같이 당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공감한 것이다. NWA에 이어 JAL 파업까지 장기화하자 한국에 취항하고 있는 다른 외국 항공사들에서는 그동안 금기해온 노조결성을 허용하는가 하면 처우개선을 약속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1960년 서울 취항 이래 노조를 인정하지 않았던 캐세이퍼시픽항공(CPA) 서울지점은 한국인 직원들의 노조창립을 용인했고, 유나이티드항공(UA) 서울지점도 초과근무수당 신설과 함께 임금인상을 본사에 건의했다.

 

 

보복조치 맞서 재파업전조합원 단식까지

 

한편 925일부터는 사측의 탄압이 더욱 노골화됐다. NWA는 항공기 취항을 전면 중단했으며, 직원 급여의 3분의 1만 지급하고 상여금 지급도 중단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흔들림 없이 투쟁을 이어가 109NWA에서 일하는 KSC 직원 34명에 대해 19명은 1987년 연말까지, 15명은 1988년 말까지 정직원으로 채용키로 합의를 이뤄냈다. 이보다 앞서 107JAL 노사도 63명의 KSC 직원을 1989년 말까지 단계적으로 정직원으로 채용키로 합의했다. NWAJAL이 합의에 나선 것은 1988년 올림픽 특수를 앞두고 서울 황금노선을 단념하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풀이됐다. 특히 NWA는 그해 12월 취항 예정인 델타항공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합의한 지 사흘도 되지 않아 NWA는 파업농성에 참여했던 여객부 정식직원 13명 전원을 화물부로, 화물부의 KSC 직원 4명은 여객부로 인사 조처해서 여객부에는 KSC 직원 28명만 남도록 했다.

NWA노조는 즉각 반발했다. 노조는 1015일 사측에 보복조치에 대한 시정요구서를 발송, 정식으로 업무 구분을 요청했다. 내용은 보복인사 13명 여객부 환원 배치 차후 이러한 분규의 예방조치로써 명확한 업무 구분 개인 인사는 당사자의 의견 최대한 존중해 업무 가능한 분야로 배치 재파업에 대한 불이익 금지 등이다.

요구에 회사가 응하지 않자 NWA노조는 1027일 임시총회를 열고 KSC 직원대표와 함께 5명이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115일부터는 조합원 133명 전체가 단식농성에 합류했다. 한편 농성장 중앙에 대형태극기를 내걸자 정부 관계자가 와서 태극기는 기쁠 때만 게양하게 되어있는데 사적인 문제로 태극기를 쓰면 법에 걸린다너희들이 독립운동가냐는 조롱과 함께 태극기를 떼어버리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단식 10일째가 넘어서자 조합원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때 대학을 갓 졸업하고 입사해 일본에서 연수를 받던 14명이 귀국해 단식농성에 동참함으로써 사기는 다시 높아졌다. 그러나 사측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NWA는 교섭은 전면거부한 채 운항 중단조치를 11월 말에서 12월 말까지로 연장하는 한편 농성을 중단하면 곧바로 임금을 주겠다고 회유했다.

임금을 전혀 받지 못한 채 투쟁을 이어왔지만 12월 들어 파업 이탈자가 하나둘 생겨나자 농성단은 결단을 내렸다. 노조는 1218일 사측과 KSC 직원을 1988년 말까지 단계적으로 전원 흡수 임금은 17~25% 인상(하후상박)에 합의하고 파업을 종료했다. 또 회사는 파업투쟁을 이유로 보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1차 파업 기간 임금도 지급하기로 했다. 재파업에 들어간 주요 원인이었던 업무 구분 명시화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스웨스트항공 노동자들의 투쟁은 외국기업들의 관행처럼 굳어진 고압적이고 일방적인 노무관리에 일격을 날림으로써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노스웨스트항공을 비롯한 시티은행, 후레아패션 등 40여 개 외국투자기업 노조들은 이후 19881211일 전국외국기업노동조합협의회를 결성해 조직적인 권리보장 투쟁에 나섰다.

 


1 NWA1926년에 설립, 2010년 델타항공에 합병된 미국 항공사.

 

2 KSC19757명의 경비전문 용역업체로 출발, 1987년에 직원이 2천 명가량으로 늘어나 신한은행, 동서식품, 주한미대사관 경비용역을 맡았다. 사장 황헌신은 육군 예비역 소장 출신에 NWA 한국지점장을 지낸 바 있다.

 

[사진] 경향신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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