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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오늘] 예술과 이념은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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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1,296회 작성일 23-09-05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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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JPG

 

정경원 (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

 

 

해금

 

198877일 노태우 대통령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 선언을 해 남북한 관계 개선과 사회주의권과의 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를 표현했다. 그해 1027일 정부는 납·월북 음악인 미술인으로 분류돼 그동안 작품 공연이나 음반 제작, 전시가 금지됐던 작품 중 정부 수립 이전에 발표된 예술 작품들을 해금하기로 했다. 바로 그날 방송인 김세원이 초혼’, ‘산유화의 월북 작곡가 김순남의 딸임을 밝히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누구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온 것은 작게는 우리 가족의 불행이지만 실제는 민족 전체가 겪는 비극이 아니냐.” (동아일보 1988.10.27.)

1988년 말 출판계 10대 뉴스 중 으뜸은 납·월북 작가 해금과 전집 발간이었으며, 해금 예술인들의 작품 전시회도 열렸다. 그들의 시와 소설이 교과서에 실리고 대학입시 단골 문제로 등장했으며 시에 곡이 붙여져 대중에게 알려지기도 했다. 우리는 한국전쟁 전후 북으로 간 수많은 예술가의 작품을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율성

 

정율성은 중국에서 가장 저명한 한국인 중 하나이다. 동아일보는 북방의 한인들이란 제목으로 그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동아일보 1989.4.21.) “전 중국적으로 유명한 한민족 출신 음악인으로 “86년 작고한 작곡가 정율성은 그의 작품만으로 이듬해 추모음악회를 열만큼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고 했다. 이후 소수민족 애환을 담은 3백여 곡 작곡, 인민군가 작곡 정율성 인생이라는 타이틀로 그의 일대기를 정리해 보도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1990.9.26.) 기사에 따르면 조선족이 많이 살고있는 연변에서는 정율성 작품연구회가 조직돼 있고 매년 그의 기일에 추모행사를 지내고 있단다. 정율성이 작곡한 팔로군 대합창1940년 초에 연안 중앙대극장에서 초연되었는데 그중 한 곡인 팔로군 행진곡이 항일 전쟁 중 인민들에게 인기가 많아 군가로 채택됐고, 194910월 중국건국과 함께 정식 인민해방군가로 정부의 비준을 받았다고 한다. 이 곡은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개막식 첫 프로그램으로 연주되었으며 중국건국 70주년 기념식에서도 연주되었다.

정율성이 와호장룡 급의 음악가들을 제치고 불후의 군가를 남긴 것은 항일정신, 깊은 서정성 등이 인민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디어오늘, 2012.1.23.) 1940년대 중국에서 한국인들이 중국군과 함께 일본 제국의 침략에 저항해야 한다는 공동과업을 잘 드러내는 것이었다. (한겨레 1998.11.10.) 그래서 그의 곡은 힘차고 결기가 느껴진다. 지금도 정율성은 천재작곡가로 중국에서, 한민족의 자존심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념을 넘는 이해관계

 

1992824일 한국과 중국은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간의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988년 말부터 노태우 정부가 빠른 속도로 추진한 북방외교가 이어진 결과다. 한중수교 전에 이미 실질적 교류가 시작되어 한국에게 중국은 미국, 일본 다음가는 교역 상대국이었다.

1992928일 한중 정상회담이 열렸다. 한국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북경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과 양상곤 주석의 회담은 애초 30분 정도 진행 예정이었지만 1시간 20분간 이어졌다. 당시 조선일보는 그 과정과 성과를 크게 보도했다. 핵심은 노태우 대통령이 근세 들어 불행했던 단절 기간을 극복하고 선조들이 발전시켜 온 우호 협력 관계가 회복되기를 기대한다.”고 했고 이에 중국 측도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1992.9.29.)

회담 후 이어진 만찬이 끝날 무렵 88서울올림픽 지정곡인 손에 손잡고가 연주되었는데 그때 중국 대사 부인이 우리 측 외교 담당자에게 중국 국가의 기원에 관해 설명해줬다고 한다.

항일 전쟁 때 당시 한국출신 작곡가 정율성이 군가로 작곡한 노래가 인민들에게 애창되어 널리 퍼졌고 국가로 선정했다.”

이후 1996108일에는 서초동 국립국악원 소극장에서 정율성의 작품 발표 연주회가 있었고 그때 남편의 작품 연주를 보기 위해 그의 부인이 한국에 오기도했다. 그리고 부인은 정율성이 소장했던 조선 궁중 악보를 한국정부에 기증하기도 했다. (1996.10.9. 경향신문)

 

 

예술과 이념은 억울하다

 

당시는 세계자본의 질서가 새롭게 재편되던 시기였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는 주변국의 시장 개방, 자본의 자유로운 진출을 강요했다. 아시아 태평양지역에도 분업체계가 새롭게 만들어졌으며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_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가 형성되었다. 이후 한국과 중국의 교역 범위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그 물꼬를 트는 데 민간외교관으로, 한국과 중국의 우호관계를 상징하는 인물로 정율성이 불려온 것이다.

한국전쟁 후 예술가들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했다. 박정희 정권은 출판물 및 인쇄소 등록법, 공연법, 영화법, 방송법 등을 제정해 예술가들의 사상을 관리했다. 해외에 거주하는 문화예술인이 간첩으로 몰리기도 했다. 노동자 민중의 사상과 감성이 자본주의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이들에 의해 통제당한 것이다.

결국 이념이나 사상은 자본에 필요에 의해 활용되었다. 때로는 반국가적인 이력이 되었다가도, 국가적 외교의 마중물이 되기도 했다. 예술은 정직했고 이념은 잘못이 없었지만, 그들은 사회가 마주한 국면에 따라 이리저리 불려다녔다. 이해관계는 불분명하고, 예술과 이념은 억울하다.

 

 

[사진 ] 인민군가 작곡 정율성 일생, 동아일보, 199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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