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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의 역사] 익산과 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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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1,316회 작성일 23-09-12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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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png

 

김미화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만들어진 이리, 수탈과 저항의 공간

 

지금 익산역의 옛 이름이 이리역이다. 이리는 1900년대 초까지 솜리 즉 안쪽마을로 불렸다. 지명을 한자로 바꾸다 보니 이리(속 리, 마을 리)가 됐다. 1912년 조선총독부는 주택이 10여 채 있던 한적한 솜리에 이리역을 건설하고 호남선과 군산선, 전라선이 교차하는 교통 거점도시를 만들었다. 군산과 전주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철도역 유치 갈등을 해소하고 토지배상금도 절감하기 위해 한산하고 땅값이 싼 이리를 신도시로 결정했다고 한다. 호남선이 지나는 큰 역이 생기면서 전라북도의 중심은 전주, 군산에서 이리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면리(面里) 통폐합 후 친일인사 박영철을 익산군수로 앉혔다. 박영철과 이리의 일본인들은 익산군청, 이리면청 등을 유치하고 동양척식회사 전북지점을 김제에서 이전해 이리역 중심으로 재편했다. 이리역은 전주, 김제, 익산 너른 평야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군산항을 거쳐 일본으로 수탈해 가는 중심지가 됐다.

이곳에서 노동운동 역시 성장했다. 191910월 철도 노동자들은 이리자성조합을 결성해 무산계급투쟁을 목표로 활동을 시작했다. 1924년에 조합은 전면 투쟁에 나선다. 운송업주 측에 임금인상을 요구했으나 묵묵부답이었으니 일손을 놓은 것이다. 경찰이 파업 주동자 6명을 잡아 가두자 분노한 조합원들은 구속조합원을 석방하라며 경찰서 마당에서 밤을 새웠다. 다음날 오전까지도 파업이 계속되는 사이 이리역 앞 광장에는 쌀과 화물이 산처럼 쌓여갔다. 그날 이리 시내에서 마차, 달구지, 지게꾼을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들도 파업하는 노동자들과 연대를 위해 일손을 멈춘 것이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연대투쟁의 힘으로 관철되었다. 파업 기간 일을 일절 문제 삼지 않기로 합의해 구속 동지들도 석방됐다.

이 투쟁 이후 1926년 이리 우마차조합 파업, 1929년 제사공장 여공들의 임금인상과 시간 단축 동맹파업 등 크고 작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리를 중심으로 계속됐다. 사회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전북민중운동자동맹과 노동단체 등이 설립됐다당시 활동한 인물은 임종환을 비롯해 임혁근, 임영택, 배헌, 김철 등이 있다. 임혁근은 3차 조선공산당 전북도당 책임비서다. 이러한 활동가들은 서울파 조선공산당 당원들로 이리와 익산지역 출신이었다.

이 지역은 도시 형성과 함께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한 곳이다. 1925년에는 러시아혁명 기념식을 거행하기도 하고, 사회주의 선전과 보급을 위해 기관지 <민중운동>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52월 전북민중운동자동맹 사건으로 70여 명이 구속되는 등 집중 탄압을 받게 된다. 이후 전북공산당 사건의 영향으로 이 지역의 활동도 크게 위축됐다.

 

 

지워진 이리, 망각의 공간

 

이리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름이다. 그런데도 197711월 이리역 폭발사고는 회자된다.

당시 인천을 출발해 광주로 향하던 한국화약의 화물열차가 다이너마이트와 전기 뇌관 등 고성능 폭발물 40톤을 싣고 이리역에서 정차 중 폭발했다. 이 대형사고로 59명이 사망하고 1,343명이 부상했고 이재민 1,647세대 7,800여 명이 발생했다.

폭약과 뇌관은 함께 운송할 수 없음에도 한국화약은 정식 안전요원조차 배치하지 않고 운송을 강행했다. 게다가 철도 직원들이 급행료라는 명목으로 뇌물을 받는 게 관행이었는데 급행료를 주지 않는다고 화물열차를 역 구내에 40시간 강제로 대기시켰다. 당시 철도법 61조에 의하면 화약류 등 위험물은 역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바로 통과시켜야 했다. 화약을 실은 기차 내부에는 호송원조차 탑승할 수 없고 화약류 취급 면허가 있어야 하며 흡연자, 음주자를 고용할 수 없는데 이 모든 규칙이 무시됐다. 호송원 신모씨가 술을 마시고 촛불을 켜고 잠이 들면서 다이너마이트 상자에 불이 옮겨 폭발하게 됐다.

노동자들은 도시에, 물자가 모이는 곳에 모여 살았다. 이리역 주변에 늘어섰던 판자촌들이 이 폭발로 전부 날아가 버렸다.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고 삶의 터전을 잃었다뇌물을 요구한 철도직원 두 명은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고 호송원 신씨는 징역 10년을 복역했다. 그러나 함께 기소된 한국화약 간부들은 전부 무혐의처리로 풀려났다. 박정희 정권은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1119새이리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 따라 주공아파트가 건설됐고 도로도 정비됐다. 이듬해 새 이리역이 사고난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새로 지어졌다. 1995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익산군과 이리시는 익산시가 되었고 이리역은 지금의 익산역이 됐다.² 도시를 새로 세우는 것은 그 도시에 축적된 모습을 지운다. 이리역 부근의 반듯한 대로, 새로운 건물과 아파트는 한국화약, 정권의 민심무마용 대책, 관행 이 모든 것을 지워갔다. 함께 죽어간 노동자 도시빈민도 잊혀지고 있다.

  

1) 당시 활동한 인물은 임종환을 비롯해 임혁근, 임영택, 배헌, 김철 등이 있다. 임혁근은 3차 조선공산당 전북도당 책임비서다. 이러한 활동가들은 서울파 조선공산당 당원들로 이리와 익산지역 출신이었다. 

2) 1995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익산군과 이리시는 익산시가 되었고 이리역은 지금의 익산역이 됐다.

 

 

[사진] 일제 강점기 근대식 건물 형태로 지어진 이리역, 디지털익산문화대전

 

[참고자료]

이명진·원도연, 1920년대 익산지역의 사회주의자와 그 활동, 지방사와 지방문화, 역사문화학회, 2019

디지털익산문화대전

김경남, 제국의 식민지 교통 통제 정책과 이리 식민도시 건설, 지역과 역사, 부경역사연구소, 2018

김민영·김양규 공저, 철도, 지역의 근대성 수용과 사회경제적 변용-군산선과 장항선, 선인, 2005

오대록, 1920년대 전북민중운동자동맹 연구, 한국근현대사 연구, 한국근현대사학회, 2007 

이명진, 식민도시 이리의 개발과 재조일본인 사회의 동향, 전북학연구, 전북연구원 전북학연구센터,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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