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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내레터

[이달의 노동운동] 1992년 10월 전해투 결성, 목숨을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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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1,484회 작성일 23-10-10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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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자 죽기로 싸운 전사들 

 

이황미(노동자역사 한내 기획국장)

 


그런 이들이 있었다. 투쟁에 나서면 일당백이었다. 물러서지 않았다. 모든 투쟁에 목숨을 걸었다. “! 전해투다!” 그들이 투쟁 전선에 바짝 다가서 우뚝 서면 아군은 믿었고, 적군은 혼비백산했다. 분명히! 그때는 그랬다.

그들은 왜 전사가 되었는가. 까닭은 해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해고는 살인이라고 울부짖는다. ‘노동자의 기본적인 권리를 되찾겠다고 마음먹었다는 이유로, ‘노동조합을 통해 조직적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그들은 살인과 동의어인 해고를 당했다. 그들은 살고자 했고, 그래서 죽기로싸웠다.

 

대량 해고·구속·수배, 조직적·전국적 대응 시작하다

전노협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노태우 정부가 등장한 1988년부터 1992년 말까지 3,226명의 노동자가 노조 활동을 이유로 해고됐다. 19895월 결성 직후 대량 해직 참사가 벌어진 전교조 해고자를 뺀 수치가 그렇다.¹ 1998년 노동법 개악으로 정리해고가 파도처럼 밀려오기 훨씬 전 징계 해고자의 수치가 그렇다. 1,849명이 구속되고, 수많은 노동자가 수배됐던 때다.

해고노동자 문제에 대한 전노협 차원의 조직적 대응이 필요했다. 19911110일 세종대학교에서 진행한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에서 해고자 100여 명이 모여 전국 해고노동자대회를 열었다. 투쟁이 시작됐다.

이듬해 1992, 36~7일 대전 매포수양관에서 전국 해고노동자 수련회를 했다. KBS, 서울지하철, 대우조선, 한진중공업, 대우자동차, 대우정밀, 태평양화학, 서울지역의료보험, 인천지역해고자협의회, 부산고무노동자협의회 등 10개 노조와 단체에서 23명이 참석했다. 공동투쟁을 결의했다. 구체적인 계획도 세웠다.

320일 서울, 인천, 부산, 거제, 포항 5개 지역 16개 노조에서 140여 명이 조직적인 출근투쟁을 전개했다. 51일 노동절 대회에서 해고자 문제를 알렸다. 613일 전국의 해고노동자 20여 명이 고용안정 보장! 해고자 원직 복직을 촉구하며 국회에 항의 방문했다. 이 투쟁에 구미 양우화학, 서울 중원전자, 원진레이온, 백산전자, 마창 대한광학 등 고용문제 발생사업장과 전국노동단체연합(전국노련),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국노운협)가 함께 했다.

1992930‘9차 전국 해고노동자 회의에서 현대자동차 구속·수배·해고노동자 84명이 전해투를 구성하자고 연명으로 제안했다. 마침내 108‘10차 전국 해고노동자 회의에서 전국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 투쟁위원회(전해투)’ 구성²을 결정했다. 전해투 출범과 함께 1015일에는 현대자동차, 대우자동차, 현대중공업, 대우정밀, 풍산금속, 한진중공업 등에서 힘찬 출근투쟁을 펼쳤다. 전해투는 28개 해고자협의회, 해고자 150여 명이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농성투쟁을 전개하고 이어 118일 전국노동자대회에 조직적으로 참가했다.

1993문민정부가 들어섰다. 김영삼 정권은 군사정권의 잔재 청산대화합이라는 명목으로 36건국 이래 최대라는 떠들썩한 사면을 단행했다. 그러나 당시 125명이던 구속노동자 중 석방된 사람은 단 15명이었다. 노동부 장관이 해고자 복직지침을 발표했지만 구체적인 후속 조치는 없었다. 군사정권이 노동자들에게 남발한 구속·수배를 정당화시켜준 셈이다. 김영삼 정권의 개혁 조치는 전시효과를 노린 일회성 선언일 뿐이었다.

전해투는 331일 노태우 정권 때 해고된 3,226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그리고 현대자동차 등 전국 10개 사업장 18,838명의 조합원 서명을 첨부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구속노동자 석방, 해고노동자 복직, 수배노동자 해제를 요구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차 투쟁, 집단 단식으로 해고문제 사회화

끝내 전해투는 목숨 건 투쟁에 나섰다.

전해투는 종로 5가에 있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긴급 대표자 회의를 열어 투쟁을 위한 실무체계를 구성하고 결단식을 했다. 이어 곧바로 전국 각지의 수배·해고노동자 70명이 199347일 오후 2시부터 서울 기독교회관 7층에서 무기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³ 28개 노조 단식자 37, 동조 농성자 32명은 구속노동자 석방 수배 해제 6공에서 해고된 노동자 복직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조치를 요구했다. 또 사용자들에게도 해고노동자의 복직 조치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이튿날 25개 언론사가 참여한 가운데 1차 기자회견을 열어 단식투쟁의 의의와 요구를 천명했다. 9일에는 농성자들이 6개 조로 나누어 서울 전역에 대국민 홍보물 1만 부를 배포했다. 정부와 정당, 사용자단체 등에 면담 요청 공문도 발송했다.

단식투쟁 4일째인 10일 오전 730분에는 전해투가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 조찬보고회를 열었다. 김근태, 김말룡 등 각계에서 참석한 인사 30여 명은 그 자리에서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 지원대책위원회’(지대위)를 구성했다. 지대위 공동대표는 김승훈, 김찬국, 문익환, 박형규, 송건호, 이돈명, 이소선, 이효재, 한상범, 홍우가 맡았다. 19941월에 계훈제, 김금수, 김진균, 백기완, 조화순도 공동대표로 결합했다.

전해투는 12일 이기택 민주당 총재, 김종필 민자당 대표, 노동부 장관, 법무부 장관에게 면담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한국노총과 경총에도 복직 촉구 공문을 발송했다. 13일에는 대우그룹 항의방문과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여기서 52명이 연행됐다. 14일에는 이기택 대표와 청와대 김정남 수석과 면담했다. 이기택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김정남은 급하게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했다. 이날 의료진이 단식자들의 상태를 점검했다. 모두 나빠지고 있었다.

15일에는 지대위가 탑골공원에서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 촉구대회를 열고 명동성당까지 행진하며 가두 홍보를 벌였다. 이날 집회에는 울산·마산·창원·거제·부산·경주·포항·인천·부천·경기남부·서울 등 여러 지역의 구속·수배·해고노동자와 가족, 노동자들을 비롯해 노동·정치·종교계 인사들과 재야원로, 시민 등 500여 명이 참가했다. 시민들은 모처럼 열린 시위를 보고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즉석에서 모금한 188,430원을 전해투에 전달하기도 했다.

1차 농성투쟁은 지역 해고노동자들의 높은 관심과 동참 속에 전개됐다. 울산에서는 현대자동차 박상철, 김영균이 정문 앞 바리케이드에 쇠사슬을 묶고 무기한 단식에 돌입해 결사 의지를 전국의 해고노동자들에게 전파했다. 거제 대우조선노조 최은석 위원장은 412일부터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 414일부터 창원 민주당사에서 마창지역 8개 사업장 해고자들이 무기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인천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은 49일부터 출근투쟁을 전개하며 투쟁의 불씨를 지폈다. 5년 역사를 자랑하는 인천지역해고자협의회415일 노동청을 항의 방문했다. 서울에서는 대우그룹 해고노동자들의 본사 항의투쟁이 다른 사업장으로도 확산해 서울지역해고자협의회을 결성하고 투쟁을 결의했다. 광주지역 해고노동자 5명이 중앙 농성투쟁에 결합했고, 이를 계기로 광주지역해고자협의회을 결성했다. 부산지역은 419일부터 사업장마다 동시 출근투쟁을 하고 해고자협의회 대표자 10여 명(대우정밀·한진중공업·고무노협)이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경기남부지역에서는 412일 해고자 총회를 열어 경기남부지역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 투쟁위원회를 결성, 중앙 농성투쟁에 적극 결합했다. 대구에서도 415일 해고노동자들이 노동청을 항의 방문했다.

마침내 단식 17일째인 23, 이인제 노동부 장관이 경제 5단체장의 공동선언을 통해 해고노동자의 복직을 적극 주선하겠다고 발표했다. 단식농성이 18일째에 접어들면서 육체적인 한계에 부딪혔고, 정부의 전향적 자세를 확인한 전해투는 24일 지역과 단위사업장 차원에서 복직을 현실화하기로 결의하면서 단식농성을 해산했다.

막 치솟아 오르던 지역 투쟁의 열기가 전해투의 중앙 농성 대오라는 상징적 구심이 없어지자 사그라든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18일간의 단식투쟁은 침체된 임금인상 투쟁 전선 강화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 문제 사회 쟁점화 지역·그룹별로 해고자조직 건설 2차 투쟁 발판 마련 등의 성과를 남겼다. 무엇보다 문민정부에 대한 환상을 깨고 본질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김영삼 정권 출범 후 찾아보기 힘든 강력한 투쟁이었다.

 

2차 투쟁, 중앙 농성 끌어가며 장기 전망 수립

전해투 해고자들은 1차 단식농성을 해산한 뒤 지역에서 결사투쟁을 전개했다. 마창 해고자들의 18일 단식, 울산 해고자들의 18일 단식, 경주 포항지역 해고노동자들의 형산강로터리 35일 천막농성, 대구지역 해고노동자들의 민주당 점거 농성, 대전지역 해고노동자들의 10일 단식, 기아그룹 해고노동자들의 10일 집단 단식, 그리고 지역마다 노동부 집단 항의투쟁, 수많은 해고 발생사업장에서 출근투쟁 등을 벌였다.

그러나 423일 노동부 장관이 약속했던 조치는 전혀 이행되지 않았다. 사업장마다 복직의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대화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고노동자들은 사업장과 지역에서 벌이는 산발적인 투쟁으로는 복직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2차 중앙 집중투쟁이 필요했다. 1차 단식투쟁을 거치며 결성된 지역·그룹별 해고자협의회의 대표자들로 구성한 전해투 지역대표자회의는 ‘2차 중앙 집중투쟁을 결의했다.

1993531일 정부 과천청사에서 2백여 명의 해고노동자들이 집회와 함께 항의농성을 시작했다. 경제 5단체 항의방문, 해고 발생 그룹 타격투쟁, 대시민 홍보, 여러 집회에서 선전할동을 6월 말까지 이어갔다.

그러나 해고자 복직 투쟁은 정부의 생색내기식 발표와 자본가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난항을 겪었다. 19936월 말부터 전해투는 투쟁 기조에 관해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절박한 상황에서 전국의 해고자들은 73일 결집투쟁을 결정했다. 72일 전해투 지역대표자회의에서는 구속수배해고노동자의 원상회복은 단기적 투쟁이 아닌 끈질기고 완강하게 그리고 대중적인 투쟁으로 자본과 정권을 압박할 때 가능하다. 전해투는 9월 정기국회를 겨냥해 투쟁하며 대규모 결사투쟁으로 천만 노동자의 사활이 걸린 노동법개정 투쟁과 결합해 이를 촉발시킨다. 9월까지는 가을투쟁 대오를 조직하고 투쟁기금을 마련하며 제 민주단체, 학생 등이 투쟁에 결합할 수 있도록 조직한다고 결정했다. 이러한 내용을 73일 해고노동자 결의대회에서 대중적으로 결의했다. 집회가 끝난 뒤 참가자들은 서울역, 시청, 광화문, 탑골공원으로 행진하며 대국민 선전전을 벌였다. 74일부터는 각 지역에서 2~3명씩 중앙에 파견해 농성을 유지하면서 가을 투쟁을 준비했다.

해고노동자들의 열망을 모아 나갔던 2차 농성투쟁은 중앙 집중투쟁을 힘있게 전개할 수 있는 대오를 갖추지는 못했다. 경제 5단체 항의방문 투쟁 이후에는 중앙 농성 자체를 유지하기도 버거웠다. 그러나 1차 투쟁과는 달리 장기적 전망을 세웠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지역의 해고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전해투의 조직적 기반을 튼튼히 하는 계기도 됐다. 가시적 효과로 대기업 몇 곳에서 복직이 실현되기도 했다. 전해투의 투쟁이 자본과 정권을 압박한 결과다. 정권은 해고자 복직문제 자체를 교섭 의제로조차 거론하지 못하게 했던 지침을 철회했다.

 

병역특례해고자, ·소금으로만 38일 단식

그러나 하반기에 접어들어서도 정부의 복직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다. 희망을 잃어가던 즈음, 대우정밀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이 상경했다.

앞서 1991년 여름, 자본과 정권은 부산지역 노조를 와해시키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정권은 박창수 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을 살해했다. 대우정밀은 폭력 경찰을 앞세워 조합원들을 공장에서 쫓아내고 무더기로 해고했다. 사측이 대우정밀노조의 중심 대오인 병역특례자들을 제물 삼아 임단협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술책이다. 정권은 병역특례자들을 해고해 민주노조 운동의 확산을 막으려 했다. 이러한 정경유착을 통해 회사가 해고하면 병무청은 곧바로 징집영장을 발부했다. ‘조국 근대화의 기수’ ‘산업역군이라는 허울 속에 뼈 빠지게 5년 가까이 일한 대가는 해고와 구속, 수배였다.

199163일 공장에 공권력이 투입된 이후 대우정밀노조 지도부는 부산대학교 안에 임시 상황실을 설치하고 조합원 임시총회를 열면서 조직을 정비해 나갔다. 65일 부산대 본관에서 연 공권력 침탈 규탄대회에는 조합원 800여 명이 함께했다. 지도부가 대량 구속수배되고, 공장 안에는 경찰이 상주하고 있어서 지도 집행력을 외부에 둘 수밖에 없었다. 조합원들의 패배의식 극복과 내부조직 정비, 구속자 면회투쟁이 주요 사업이었다. 그렇지만 200여 명에 이르는 대량 징계로 조직력 회복은 매우 힘든 상태에 이르렀다.

618일 해고 후, 715일 첫 상경투쟁을 전개했다. 대우정밀·현대중공업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은 715일부터 강제징집 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소속 대학생 40여 명과 함께 신민당 농성에 돌입하고 병무청 항의방문과 대국민 선전전을 전개했다. 16일에는 신민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해고 무효확인 소송 계류 중인 노동자는 최종 판결 때까지 징집 연기 해고로 징집될 경우 특례복무 기간 인정 병역악법 개정 녹화사업과 조직사건 즉각 중단 등을 요구했다. 이들의 상경투쟁으로 전노협을 비롯한 민주노조 진영은 노동악법 철폐투쟁과 함께 방위산업체에서 민주노조 구심을 튼튼히 하기 위한 병역악법 개정투쟁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은 영장 발부 전인 8월 초순에 해고 무효확인 소송을 부산지법 울산지청에 제기했다. 부산고법에 입영 정지 가처분신청도 제기했지만 이틀 만에 기각됐다. 대우정밀 병역특례해고자 8명의 기나긴 수배 생활이 시작됐다.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은 이후 1995년 말 조수원 열사 장례투쟁으로 원직 복직에 합의할 때까지 48개월 동안 한 치도 흔들림 없이 대오를 유지했다.

풍산금속과 대우정밀 등 영남지역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은 1991127일부터 10일까지 부산대학교 문창회관에서 강제징집 철폐병역악법 개정을 위한 단식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때 부산지역노동조합총연합, 민주주의민족통일부산연합 등 7개 단체로 강제징집 철폐를 위한 영남지역 공동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1991년 하반기 단식투쟁은 69명에 이르는 영남지역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이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했다는 점과 병역특례 제도의 문제점을 폭로하고 병역악법 철폐투쟁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당시는 병역특례 사업장이 70여 개에서 3,200개로, 대상자는 15,000명 이상으로 늘어난 시점이다. 대우정밀 병역특례 해고노동자 8명은 19918월부터 19938월까지 부산대학교 내 대우정밀 해고자 복직실천협의회’(대정해협) 사무실에 상주하면서 출근투쟁, 대의원 선거 등 주로 노동조합 조직력 강화사업에 주력했다. 출근투쟁을 전개하던 1992513, 노무팀이 윤명원 위원장을 비롯한 해고자 6명을 집단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회사가 특별채용한 특전사 출신 노무팀은 다음날 또다시 출근투쟁을 벌이던 해고자를 폭행했다. 대정해협은 부산지역 단체들과 함께 15일부터 철야농성과 항의방문을 전개하며 회사의 폭압적인 노무관리에 맞서 지속적인 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마침내 19939월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은 2년간의 부산지역 투쟁을 정리하면서 상경투쟁을 결행했다. 지역 투쟁의 한계를 느끼고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고발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로 했다. 911일 병역특례 해고노동자 8명은 서울역에서 열린 ‘4차 전국해고노동자대회에 참가, 삭발하고 단식투쟁을 결의했다. 이들은 물과 소금만 섭취하면서 서울 마포 민주당사에서 1018일까지 무려 38일간 목숨 건 단식투쟁을 전개했다.

단식투쟁 26일 째부터 해고노동자들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황철이(대우정밀)는 무릎관절 악화로 다리 전체가 마비되다가 기력상실로 실신했다. 황용범(대우정밀)B형 간염 증세를 보였고 체내 저항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조수원은 탈진으로 쓰러졌다. 신이철, 염성호는 몸무게가 45kg 아래로 내려가고 혈압이 40 이하로 떨어져 생명이 위독한 상태에 이르렀다. 단식투쟁이 30일을 넘어서 황용범의 목에서는 피가 올라왔다. 끝내 3명이 실신해 병원으로 급히 후송됐다. 하지만 이들은 깨어나자마자 입원 치료를 거부하고 곧바로 단식에 재합류했다. 강제징집 철폐와 원직 복직 그날까지 결코 단식을 풀지 않겠다고 했다.

문익환 공동의장 등 지대위 40여 명이 108일 저녁 대책을 논의하고 무기한 철야농성을 결의했다. 부산지역에서도 지원투쟁이 이어졌다. 대정해협 10명은 913일부터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고 대우정밀노조는 조합원 서명운동을 벌였다. ‘부산·양산 노동법개정 공동투쟁본부14일 노동자대회를 열어 연대투쟁 결의했다. 집회를 마친 뒤 대우정밀노조 투쟁 지원을 위한 범시민대책회의’(대표 박순보 부산연합 상임의장)15일 기자회견, 18일 부산지방병무청 항의방문, 22일 대우정밀 회사 앞 범시민대회 등을 열었다.

1018, 마지막까지 남은 박정수마저 실신해 병원으로 이송됨에 따라 단식투쟁은 38일 만에 일단락됐다. 전해투는 정부 과천청사에서 이인제 노동부 장관을 만나 대우정밀과 풍산금속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의 수배 해제와 원상회복을 요구했다. 이인제는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은 군 복무를 하고 난 뒤 복직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 모든 투쟁을 함께 했던 해고노동자 조수원(28)19951215일 전해투가 농성을 벌이던 민주당 서울시지부 당사 비상계단에서 목숨을 끊었다. 19861월 대우정밀에 병역특례로 입사해 56개월 일한 조수원은 병역특례자로 편입된 지 46개월째에 해고돼 의무복무 기간 만료를 6개월 남기고 병역특례자 신분을 박탈당했다. 5년의 노동과 5년의 투쟁으로도 변하지 않는 세상이 그에게서 실낱만큼 남아있던 한 줌의 희망마저 빼앗아가 버린 것일까. 전해투 산하 수많은 해고자, 지대위, 민주노총 등 노동계는 조수원이 숨을 거둔 당일 시신이 안치된 서울대병원 영안실로 집결해 곧바로 조수원열사장례대책위를 구성하고 투쟁에 돌입했다. 마침내 199613일 병역특례해고자 전원 복직, 조수원 열사 명예 회복, 민형사상 면책 등을 쟁취했다. 조수원열사장례대책위는 199615일과 6일 서울과 부산에서 각각 장례식을 거행했다. 조수원 열사는 양산 솥발산 공원묘지에 잠들었다.

 

3차 투쟁, 한 달 반 전국 순회로 복직 교섭 성사

다시 1993, 노동부 장관과 교섭이 실망스럽게 끝나고 구사할 수 있는 전술 폭도 제한되면서 전해투는 노동법개정 투쟁을 앞둔 시점에서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를 두고 심각한 논의를 이어갔다. 전국노동자대회를 앞두고 전국 노동자들이 심각성을 인식하도록 점거 등의 방법으로 선동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토론 끝에 이인제 장관의 약속을 물고 늘어지며 전국의 해고 발생사업장들 순회투쟁을 벌이자고 결정했다. 전해투가 전국의 해고노동자들과 긴밀히 결합해 해고자 복직의 필요성을 대중적으로 부각하자는 취지다.

1022일부터 대우, 금호, 풍산금속, 대우전자, 럭키금성, 조선내화, 효성그룹, 삼미그룹, 한진그룹, 태평양, 포항제철, 기아그룹, 소예산업, 삼성시계, 이천전기, 효성바스프, 유공, 태광산업, 한진중공업, 동양나이론, 조선내화, 동밀철강, 풍산금속, 세신실업, 효성중공업, 대림자동차, 코리아타코마, 금호타이어, 금성알프스, 동화기계, 대우전자, 대우캐리어, 남선물산, 동산의료원, 동원금속, 대동공업, 대우기전 등 해고 발생사업장을 돌았다. 성남, 안산, 인천, 울산, 부산, 광주 등 지방노동청과 병무청 앞에서 싸웠다. 그리고 틈틈이 여러 투쟁사업장에 연대하며 전국 순회투쟁을 마치고 124일 서울 농성장으로 복귀했다.

전국 순회투쟁을 벌이는 해고노동자들에게 사측은 청원경찰과 관리자를 대거 동원해 대화조차 거부함으로써 수많은 사업장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풍산금속, 대림자동차, 효성중공업 등에서는 그들의 폭력으로 다수가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도 전해투는 피맺힌 투쟁을 이어나갔다. 그 결과 44개 사업장에서 교섭을 성사시켰고, 42개 사업장에서 해고자와 사용자 간의 교섭 통로를 확보하는 성과를 남겼다. 또 순회투쟁을 계기로 전해투 투쟁이 전국으로 확산했다. 해고자들 투쟁의 위력을 자본과 정권에게 과시함으로써 전해투 위상도 확고하게 다졌다. 그들은 그렇게 전사가 되어 갔다.

 


[참고자료] 전노협백서발간위원회, 전노협백서 6총단결 총투쟁(1993(2003)

 

[사진]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은 1993911일부터 1018일까지 마포 민주당사에서 목숨을 건 38일 단식투쟁을 벌였다.

 

[각주]

1 1989817일 현재 전교조 해직자 파면 154, 해임 348, 직권면직 231명으로 총 733명이었다. 또 직위해제 등으로 1,906명이 징계를 당했고 구속자만 40명에 달했다.

2 서울지역해고노동자협의회(대한교육보험, 한국야쿠르트, 서울대병원, 서울지역의보, 태평양화학, 나우정밀, 한양대병원, 대우자동차판매주식회사, 한국일보, 대림엔지니어링, 경희대, 해태유통, 서울지하철 등의 해고자), 현대그룹해고자협의회(현대자동차해고자협의회, 현대중공업해고자협의회, 현대종합목재해고자 등 현대 계열사 해고자), 한국방송공사해고자, 문화방송해고자, 한국공항해고자, 기아자동차해고자협의회, 대우자동차해고자협의회, 인천지역해고자협의회, 한국타이어해고자협의회, 청주일터되찾기모임, 금호타이어해고자협의회, 대우조선부당징계해고자대책협의회, 대림자동차해고자협의회, 기아기공해고자협의회, 세일중공업해고자협의회, 코리아타코마해고자협의회, 세신실업해고자협의회, 창원금성사해고자협의회 등으로 구성됐다.

3 199347일 현재 전국 주요사업장 해고노동자 현황 현대자동차 17, 서울지하철 11, 현대중공업 20, 대한교육보험 9, 대우조선 27, 대우자동차판매 42, 대우정밀 43, 서울대병원 16, 기아기공 12, 태평양화학 2, 세신실업 5, 한국야쿠르트 21, 세일중공업 22, 서울지역의보 9, 대림자동차 19, 의보총련 32, 동경전파 2, 한국일보 33, 한양대병원 1, 풍산금속 안강 3.

4 경제5단체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한국무역협회, 대한상공회의소, 중소기업중앙회.

5. 1993년 당시 병역특례법 특례보충역은 해당 전문분야에서 3년간 종사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입사한 지 치소 1~3년이 지나야 병역특례로 등록 의무종사 기간 중 성실히 종사하겠다는 서약서 제출 의무, 서약을 어기면 특례보충역 편입 취소할 수 있어 부당해고 소지 다분 의무종사 기간 중 해고·퇴직 등 통보받은 때 특례보충역 편입 취소 등 무수한 독소조항을 담고 있다. 그동안 병역특례로 근무하다 해고돼 군 기피로 수배 중인 노동자들 대부분이 5년 이상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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