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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의 역사] 지평선의 고을 - 김제시 광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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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845회 작성일 23-11-07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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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화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김제만경평야(징게 맹갱 외에밋들)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 끝없이 펼쳐지는 넓은 들의 끝과 끝은 눈길이 닿지 않아 마치 하늘이 그대로 내려앉은 듯한 곳. 그 벌판이 징게 맹갱 외에밋들이라 불리는 김제만경평야다.

김제만경평야가 곡창지대이다 보니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강점하기 이전부터 군산을 강압적으로 개항하게 하고 김제 지역 땅을 매입해 쌀 수탈의 거점으로 삼았다. 1916년 전북에서 일본인 소유경지면적이 30% 이상인 지역을 보면 김제, 옥구, 익산 세 개 군이다. 이들의 총면적이 전북 전체 일본인 소유 경지의 70%를 차지한다. 일본인은 주로 서부 평야지역 토지를 사들였다이로써 징게 맹갱 외에밋들은 일제 강점기 군산항의 배후지로서 최대의 쌀 수탈지로 전락했다.

 

 

드넓어서 광활면이 되다


광활면은 1949년 새로 만들어진 면이다. 얼마나 넓었으면 광활면이라는 이름을 지었을까. 1925년 일본인 자본가 아베 후사지로가 동진농업주식회사(이하 동진회사)를 세우고 진봉면 은파리 학당에서 동진강 하구를 따라 거전까지 10km에 이르는 제방을 쌓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간척사업이 전개됐다. 7년 동안 바닷물을 막고 갯벌 위에 흙을 쌓은 결과 1931년 지도에는 없던 32(96십만 평)에 이르는 광활한 평야가 조성됐다. 간척지로 이루어진 전체 농지는 그 넓이가 국제축구장 2,500개 넓이로 1,800여 정보였다. 이 간척지로 인해 광활면이 신설됐다. 동진회사는 1929년부터 1937년까지 1가구당 약 6,000평의 땅과 초가집 한 채씩을 주고 676가구의 이주민을 정착시켰다.

 

 

맨손과 지게로 간척사업

 

해안을 따라 제방을 쌓아 간석지(개펄)를 농토로 만드는 작업은 무엇보다 제방을 튼튼하게 쌓는 것이 관건이다. 동진회사는 전국에서 노동자를 모집해 간척사업에 투입했다. 노동자 대다수는 조선인이었고 중국인 노동자들도 일부 있었다. 이들은 간척사업이 완료되면 소작권을 주고 정착할 수 있게 해준다는 약속을 믿고 전국에서 이곳까지 왔다. 그러나 사업이 완성되어도 회사 측은 간척 공사 관련 임금을 제때 지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약속한 소작권도 제대로 확정하지 않아 노동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이주 초기 소작인들은 수확량의 70%를 소작료로 빼앗겼으며 나락 한 톨만 훑어내도 쫓겨나는 핍박을 당했다. 회사 측은 이주민들이 처음 정착할 때 1인당 50원씩 적립금을 받았으면서도 이주민들이 간척지에서 나가려 할 때는 집과 땅은 물론 적립금도 내주지 않았다. 사실상 소작인들이 광활면을 떠날 수 없게 만들었다. 당시 간척지에 정착한 이주 농민들의 삶과 수탈의 역사를 임영춘은 갯들에 이렇게 적었다.

 

제방이 막아질 때의 이얘기였다. 마지막 작업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 것이다. 빈 지게만 남아 있었으니 필시 그 주인이 있어야 할 것이었다. 한창 사람의 떼로 쩌눌렸을 때 꾀약은 사람은 바쁘고 정신 못 차릴 새에 빈 지게만 짊어지고 왔다갔다 해도 십장들이 흙짐을 쳐다보지도 않고 만보를 주어 돈을 많이 번 인부도 있다는 것이다. 그 대신 나약한 사람은 깔려 죽었을 것이란다. 이 말을 듣고 종해는 새로 갯벌에 가로 놓인 둑을 쳐다본다. 몸이 약한 아버지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아무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때로는 울적하면 제방에 가서 거닐어 본다. 아버지가 일했을 자리를 상상해 본다.”²

 

 

해방됐으나 여전히 소작농

 

19459838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은 군정을 실시했다. 1945126일 법령 33호를 만들어 일본인 재산을 적산으로 규정해 모두 군정청 재산으로 귀속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이 소유한 토지는 미군정이 세운 신한공사가 관리하게 되었다. 농민은 다시 신한공사 소작농이 되었다. 미군정은 신한공사의 13억 원이 넘는 소작료를 미군정 경비로 사용했다. 동진회사도 이와 같은 과정을 겪으며 해방과 미군정 시기를 지나갔다. 이후 소작인들은 15년간의 농지대 상환을 통해 자작농으로 전환됐다.

드넓은 김제만경평야는 바다를 육지로 만든 힘든 간척사업의 결과물로 1,700여 명의 노동자와 농민의 착취와 수탈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인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참고자료]

1. 소순열,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일본인 소유 농장,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농촌 수탈의 흔적,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2021. 

2. 임영춘(1981), 갯들, 현암사, 86. 임영춘은 광활면 소작농의 삶을 갯들, 들판, 대지의 유언등에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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