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한내레터

[이달의 노동운동] 1988년 첫 전국노동자대회 - 피로 쓴 ‘노/동/해/방’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959회 작성일 23-11-11 11:16

본문

a7f87133113e8f66ad654aac48fcbca7_1699668698_579.jpg

  

이황미(노동자역사 한내 기획국장)

 


단결과 연대의 상징노동자가 만들어낸 전통

 

“1113! 전국의 노동형제¹들이 밤새 속속 도착하여 1만 명으로 불어난 대오가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일천만 노동자의 고난과 치욕의 상징인 현행 노동 악법을 완전 철폐할 것을 선언하였다. 대회에 이어 독재정권과 독점자본의 그 어떤 방해 책동에도 굴함 없이 기필코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진군할 것을 다짐하는 선봉대장의 선서와 30여 노동형제의 혈서로 막이 오른 평화대행진은 2시간여에 걸쳐 타도 민정당’ ‘해체 전경련’ ‘노동 악법 즉각 철폐’ ‘구속 전두환 처단 노태우라는 구호와 함께 단결된 전국 노동자의 일사불란한 모습을 마음껏 과시했다. 이어 5만 명으로 불어난 대오는 경찰의 비열한 방해 책동을 분쇄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진격하여 망국 민정당과 전국경제인연합을 규탄하는 노동자의 투쟁 결의로 독점재벌과 독재의 아성 여의도를 뒤흔들어놓았다.” (‘전국 노동법개정 투쟁 경과 보고문² 중에서)

 

19881112일 밤부터 연세대학교는 노동자의 대열과 함성으로 가득했다. 교정은 온통 노동자들의 깃발로 덮였고, 노천극장은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그곳에 선 노동자들의 가슴은 요동쳤다. 터질 듯한 열기는 다음날 거리로 퍼져나갔다. 노동자들은 목청껏 구호를 외치며 여의도까지 행진했다.

전국노동자대회는 1988년 노동법개정 투쟁을 계기로 처음 시작됐다. 그로부터 매년 11월 전태일 열사 기일에 즈음해 1년 투쟁을 집약하는 전국노동자대회를 노동자 스스로 전통으로 만들어냈다. 전국노동자대회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투쟁 목표로 명확히 내세우고 조직적으로도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로 삼는, 단결과 연대의 상징이다. 전국노동자대회는 노동자들의 축제였으며, 투쟁의 장이었다.


 

1987년 개정법, 노동자 단결·투쟁 제한 심각


1987년을 거친 노동자들은 7·8·9월 대투쟁의 힘을 1988년 임금인상 투쟁과 노동법개정 투쟁으로 이어가고자 했다. 노조들은 일상적 교류를 강화하고 연대를 통해 지역노조협의회(지노협)을 건설하며 노조 탄압저지 투쟁을 벌여 나갔다.

1988년 상반기 임금인상 투쟁이 중반을 넘어서며 노동법개정 투쟁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51일 연세대에서 열린 세계노동자의 날 기념 노동3권 쟁취 수도권 노동자대회는 그 시작이었다.

198711월에 개정된 노동법은 7~8월 대투쟁의 영향으로 노조설립이나 노동쟁의의 조건을 다소 완화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을 심각하게 제한했다. 실제 1988년 들어 1018일까지 발생한 노동쟁의 1,657건의 81.1%에 달하는 1,343건이 법을 지킬 수 없는 쟁의로 진행됐다.

노동자들은 3~4월 임금인상 투쟁 초기에는 법적 절차를 의식했지만, 자본가들과 힘겨루기가 치열해지고 투쟁이 확산하면서 법을 지킨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에 따라 5월로 넘어서며 경고장 발급, 연행·구속 등 노동자 탄압이 급증했다. 마침내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노조 탄압 등 당면의 직접적인 문제를 내건 투쟁을 넘어서서 탄압의 수단이 되는 노동법개정 투쟁으로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동법개정 투쟁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전국투본 구성해 노동법개정 투쟁 본격화


1988106일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전국투본)가 구성됐다. 대전에서 열린 노동법개정 전국노동조합특별위원회와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의 노동법개정 특별위원회가 참여한 ‘3차 노동법개정 전국대표자회의전국투본 구성과 함께 ‘1113일 서울에서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노동 악법 개정 전국 노동자대회 개최를 결정한다. 그밖에도 노동법개정을 위해 109일부터 전국적 서명운동 등반대회·웅변대회·결의대회 등 집회 정기국회 중 야 3당 총재와 연석회의 주최 제반 반민주악법 개폐 투쟁을 위한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추진 등을 결정했다.

결정에 따라 19881093개 권역에서 노동법개정 투쟁을 위한 전국 노동자 등반대회를 진행했다. 1만여 명의 노동자가 수도권은 북한산, 영남권은 화왕산, 중부호남권은 대둔산에 올랐다. 오전 등반에 이어 오후 2, 3개 권역에서 동시에 노동법개정을 위한 전국 노동자 결의대회서명운동 출정식을 잇달아 열어 대회의 통일성을 높였다. 당시 등반대회 홍보를 위해 포스터 3,500, 스티커와 전단 각 1만 장을 전국에 배포했고, 지역별로 현수막을 만들어 내걸었다.

정상에서 외친 노동 악법 개정’ ‘노동3권 쟁취함성은 전국으로 메아리쳤다. 등반대회는 권역을 단위로 해서 전국의 투쟁을 묶어 세우는 역할을 해냈다. 이날부터 전국적인 서명운동에 돌입, 노동법개정을 위한 대중투쟁이 시작됐다. 서명운동은 1113일 전국노동자대회와 21일에 집중해 10만 명 서명을 돌파하는 놀라운 성과를 일궈냈다.

 


대중투쟁 서막 오르다전국노동자대회 개최키로


등반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전국투본은 노동법개정을 목표로 전국노동자대회 조직화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1020일에는 노동 악법 개폐 투쟁을 전체 민주세력의 요구인 국가보안법·집시법 등 제반 반민주악법 철폐 투쟁과 결합해서 전 민중적 투쟁 전선을 만들어내고자 반민주악법 개폐 투쟁을 위한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열어 성명을 채택하고 실무팀을 구성했다.

전국투본은 1028일 서울에서 대표자회의를 열어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와 본대회 일정을 확정했다. 1113일 이후의 투쟁방침과 관련해 노동법개정에 반대하는 정당·의원에 대한 집중 대책, 사업장별 총회, 집단조퇴 등 준법투쟁, 시한부 파업 등의 방향을 열띠게 토론하고, 지역 단위 논의를 이어나갔다.

1029일과 30일에 전개한 노동법개정과 노동운동 탄압분쇄 투쟁³에는 전국적으로 5천여 명이 참여했다.

112일 오후 630분에는 노동 악법 개정, 노조 탄압저지 촉구대회를 한 서노협 소속노조 대표자 60여 명이 야 3당인 평화민주당(평민당·총재 김대중), 통일민주당(민주당·총재 김영삼), 신민주공화당(공화당·총재 김종필) 당사를 돌며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다음날 인노협 소속노조 대표자 12명이 농성에 합류했다. 그리고 114일 농성을 해제하며 조합원 2,500여 명과 함께한 행진과 집회는 여의도의 밤을 노동자의 구호와 노래로 뒤흔들었다.

 


전야제, 새벽까지 전국에서 참가행렬 이어져


1988년 전국노동자대회는 1112일 밤 연세대에서 전야제로 포문을 열었다. 저녁 8전태일 노동상’ 1회 수상자는 권용목이었으나, 현대엔진 투쟁으로 구속 중이었기 때문에 그의 부친 권처홍이 대신 수상했다. 11시에서는 조합원 2천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노동 악법 개정 전국 노동자 웅변대회가 열려 서울, 인천, 부산, 울산, 부천, 전북 등 전국에서 선발된 9명의 연사가 참여한 가운데 인천 일용노조 소속 허재호가 1노동해방상을 받았다.

이튿날 새벽 2시에는 선봉대 발대식이 진행됐다. 지방에서 상경한 대오는 계속해서 도착하고 있었다. 새벽 3시경에는 마산·창원지역에서 올라온 800여 명, 아침 7시경에는 현대중공업 조합원 600여 명 등 전국 각지에서 노동자·학생들이 연세대로 속속 집결했다.

한편 밤 11시부터 전국 노동조합 대표자회의를 진행, 전국 100여 개 사업장 노조위원장들과 20여 명의 노동운동단체 대표가 참여해서 1113일 대회 전술과 투쟁방침을 확정지었다.

 


본대회, 5만여 명 한목소리 악법철폐


1130일 오전 10, 밤을 꼬박 새웠거나 새벽에 도착한 5천여 명의 조합원은 지친 기색 없이 사전 결의대회로 열린 노조탄압분쇄 전국노동자대회에 함께했다.

오후 1시부터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노동 악법 개정 전국 노동자대회본대회가 시작됐다. 입장식에만 한 시간 이상 걸렸을 정도로 많은 참가자가 연세대 노천극장을 완전히 메웠다. 4만 명의 조합원들은 일사불란하게 노동 악법 철폐하여 노동해방 앞당기자등의 구호를 외치며 2시간에 걸친 집회를 이어갔다. 집회를 마치자 노동해방이라고 쓴 혈서를 앞에 들고 여의도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오후 330분부터 시작된 행진은 민주 쟁취” “노동운동 탄압하는 군부독재 끝장내자” “구속 전두환, 퇴진 노태우” “해체 전경련, 타도 민정당등의 구호를 외치며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2시간 동안 계속됐다. 오후 6시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망국 민정당 규탄 및 노동 악법 개정 촉구대회에는 대오가 더욱 불어나 5만 명을 웃돌았다.

오후 8시에는 전경련 앞에서 대오별로 노동 악법 개정 반대하는 독점재벌 규탄대회가 열렸다. 엄청난 규모에 압도당해 대회 내내 달리 손쓰지 못하던 경찰은 귀가하던 노동자들의 뒤통수를 공격했다. 백골단의 폭행에 노동자들은 영등포역 앞에서 격렬한 가두 투쟁으로 맞섰다.

 


5백여 명 민주당사 농성투쟁


1988년 전국노동자대회는 노동자들에게 확실한 자신감과 투쟁 열기를 불어넣었다. 전국노동자대회를 마친 직후 여세를 몰아 마산·창원·진주 등 영남권 노조위원장을 중심으로 24명이 민주당사 농성에 돌입했다. 1115일 전국투본은 긴급대표자회의를 열어 야 3당에 타협 없이 노동법개정안을 관철하라라고 촉구했다. 22일에는 전국의 노동조합·노동운동단체 대표자 50여 명이 모여 전국선봉대 500명 민주당사 농성 121~3일 사업장별 총회 거쳐 준법투쟁 123일 전국 동시다발 보고대회 123일 이후 노동법개정 투쟁 평가와 토론회 광범하게 조직 등을 결의했다.

실제 1128, 500여 명으로 구성된 전국 노동법개정 투쟁선봉대를 비롯 지노협과 전국노운협 대표가 농성에 합류했다. 이들은 다음날 오전 7시부터 당무 완전 봉쇄 총재 면담 기자회견 당사 앞에서 연좌 농성과 대시민 홍보 수행을 결정했다. 이어 다음날 기자회견에서 노동법개정에 대한 민주당의 확실한 당론을 재차 요구했다.

민주당은 폭력으로 답했다. 1129일 청년당원들의 폭력이 자행되자, 대표자들은 당 총재의 공식 사과와 폭력당사자 처벌을 요구했다. 폭력은 다음날에도 이어져 청년당원들은 농성장에 두 차례나 난입해 폭력을 행사했다.

굳건하게 농성투쟁을 이어간 결과 농성 5일째인 121일에 김영삼 총재와 면담이 이루어졌다. 김영삼이 폭력행위에 사과 및 피해보상 노동조합법 35호 완전삭제’ ‘상급단체 복수노조 허용당론 제시 125일까지 법안 상정 등을 약속함에 따라 농성자들은 해단식을 진행했다.

 


자신감 얻은 노동계급, 전국적 결집 시작


이때까지 노동운동 내에서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노동운동의 발전을 억압해 온 노동법을 개정하려는 노력은 무수히 전개됐지만, 대부분 국회 청원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해 제도개선 운동 차원에 머물렀다. 그러나 전국노동자대회를 정점으로 줄기차게 진행한 1988년 노동법개정 투쟁은 여러 면에서 이전과 달랐다.

1988년 노동법개정 투쟁은 비록 법 조항 개정에는 실패했지만, 의식·조직적 측면에서 많은 성과를 남겼다.

1113일 전국노동자대회를 통해 전국의 노동자는 하나라는 노동자의식과 연대투쟁의 중요성을 확실하게 인식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로써 전국의 노동자는 이후 투쟁을 이어나갈 자신감을 얻었고, 공동요구인 노동법개정 투쟁을 통해 단결된 힘의 위대함을 깨달은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전국노동자대회는 매년 같은 시기에 1년 투쟁을 집약하는 노동자들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의식적인 성과와 더불어 조직적으로는 전국의 모든 노동자 조직이 총집결된 전국투본을 세움으로써 노동자 계급투쟁의 조직적 중심을 이루어내는 성과를 일궈냈다. 민주노조운동은 조직적 차원에서 시작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으며, 그것은 단결된 힘으로 투쟁할 때 가능하다는 점을 스스로 증명했다. 이러한 조직적 각성은 이후 전노협 건설로 이어졌다.

 

 

[참고자료] 전국노동조합협의회백서발간위원회, 전노협백서 1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1987~1988)(2003)

 

[사진​노동해방 혈서를 앞세워 연세대학교에서 여의도로 행진하는 노동자, 노동자역사 한내

 

[각주]

1 노동형제라는 표현은 1980~1990년대에 통상적으로 사용했으나, 이후 노동운동이 확장·발전하면서 여성노동자를 배제하는 용어라는 제기가 공감을 얻어 최근에는 대체로 쓰지 않는다.

2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 1988123.

3 서울 1029전태일 정신 계승과 노동 악법 개정을 위한 전진 서노협 가을문화제’(한양대, 연인원 2천여 명)에 이어 1030일 집회투쟁 광주 1029우리데이타 위장폐업분쇄 결의대회후 가두 투쟁(7백여 명) 인천 1030노동법개정을 위한 웅변결의대회, 위장폐업분쇄 및 노동법개정 출정대회2시간 동안 가두 투쟁(1천여 명) 안산 1029노동법개정을 위한 안산노동자 전진대회’(3백여 명) 부산 1030노동법개정 투쟁을 위한 부산지역 노래 및 웅변대회’(4백여 명) 울산 1029노동 악법 개정 웅변대회’(2백여 명).

4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1988529일 출범.

5 인천지역노조협의회, 1988618일 출범.

6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상징이자 현대그룹 노동운동의 핵심적 인물로 민주노총 초대 사무총장(199511~19972)을 지냈으나 2000년대 우익으로 전향, 뉴라이트신노동연합 상임대표를 맡고 200717대 대선에서 정몽준과 이명박을 지지했다. 그는 <민주노총 충격보고서> 집필 후 2009213일 심장마비로 사망(향년 52)했다. 그의 부친 권처홍은 옥중에 갇힌 아들의 뜻을 이어 전국 각지의 노동자 집회를 비롯한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국민연합 울산본부 공동의장, 민주시민회 고문, 민가협 의장, 전노협 고문 등을 역임했고, 2022120일 운명했다.

7 민주정의당. 1981년 전두환 등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창당, 5공화국과 노태우 정부 초기의 집권 여당으로 1990년 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과 이른바 ‘3당 합당해 민주자유당(민자당)으로 개편됐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