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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시의 독서] 케테 콜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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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742회 작성일 23-11-21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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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돌규 (노동자역사 한내 운영위원) 


돌아온 열전의 시대와 케테 콜비츠 - 『케테 콜비츠』, 카테리네 크라머, 이순예 옮김, 이온서가, 2023 



2개의 전쟁


우크라이나의 포성이 아직 멎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오늘이다전쟁의 시간은 2년을 채워가고 있다한국이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수십만 발 지원했다 하고북한은 러시아에 컨테이너 3천 개 분량의 무기를 지원했다 한다우크라이나는 한반도와도 이어져 있는 셈이다.

그러던 와중에 얼마 전 이스라엘에 대한 팔레스타인 하마스의 미사일 공격이 있었고 그에 이은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이 이어졌다가자지구의 희생자는 1만 2천여 명이 넘었다 한다그중 어린이는 5천여 명에 이른다.

 

세계는 이처럼 2개의 전쟁이 진행중에 있다미국은 1990년대 두 지역에서의 동시 전쟁을 모두 승리로 가져가겠다는 -윈 전략을 공식화한 적이 있었다그런데 세 번째 전쟁이 벌어진다면중국의 시진핑이 대만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세 번째 전쟁설이 솔솔 흘러나오기도 한다또한 북한 역시 행동을 개시할 지 모른다는 네 번째 전쟁설도 돈다며칠 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APEC 행사에서 시진핑은 대만을 공격할 계획이 없다고 발언했다고, ‘바이든이 말했다바이든의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에 대한 시진핑의 확인은 물론 없었다하지만 중국-대만의 양안관계가 바이든의 바람처럼 얼마간은 별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긴장이 고조되는 것은 한반도일 거다그러면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차라리 대만에서 전쟁이 일어나길 바래야 하는 것일까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 죽기를 바래야 하는 것일까그게 답일까?

 

2차 세계대전 이후 강대국 간의 세계 질서에 대한 합의 틀인 이른바 얄타체제의 붕괴 담론이 회자되고 있다강대국들에 의해 관리가 되고 있지 못하다는 얘기인데그렇다면 새로운 체제의 등장 없이는 당분간’(이라 쓰고 얼마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이라 읽는전쟁의 세기가 올 수도아니 이미 온 것일지도 모른다그리고 한국전쟁이 아직 휴전중이라는 엄연한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스산한 현실감으로 다가온다.

 

그 시점에 전쟁과 누구보다 가깝게 있었던 예술가 한 사람을 소개하는 오래된 책이 다시 돌아왔길래 책장에서 빼들었다독일의 예술가 케테 콜비츠(Kethe Kollwitz, 1867~1945)의 평전이다.

 

 

작가 케테 콜비츠의 일생과 예술

 

케테 콜비츠는 1867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그의 아버지는 사회주의자였고 그래서 그녀가 화가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지원했다그녀는 베를린과 뮌헨에서 여자예술학교를 다녔다그즈음 그녀의 오빠는 의사 카를을 동생에게 소개했고 이후 그녀는 1891년 남편과 결혼해 베를린에 신접살림을 꾸렸다남편은 의료보험공단에 속한 의사로 무료진료소에서 평생을 일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았고 사민당 시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케테는 <직조공 봉기연작(1893~1898)을 만든 이후 베를린 여자예술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또 뒤이어 <농민전쟁연작(1903~1908) 작업을 끝낸 후 파리에 체류하면서 미술 수업을 듣기도 했다이때는 파리에서 로댕 작업실을 방문하기도 하고 여러 인사들과 교류하기도 했다그래서 1910년 처음으로 조각 작업을 시작했다.

 

케테 콜비츠는 흔히 판화가로 알려져 있는데 그녀는 판화 작업을 가장 많이 하기는 했다그녀의 작품을 소개하거나 구입하기도 했던 중국 루쉰(魯迅, 1881~1936)의 영향으로 1930년대 중국에서 목판화 운동이 벌어졌었다그리고 그 흐름이 검열과 탄압으로 입이 막혀 있던 1980년대 한국의 민중미술로 이어지기도 했다케테 콜비츠의 작업에는 목판도 있지만 석판화동판화도 있었다그렇지만 그녀는 또 드로잉 작품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시인 최영미의 말처럼 그녀는 데생을 정말 잘했다그 소묘 실력이 동판화석판화 같은 세밀한 작업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또 그녀는 앞서 말한 것처럼 파리 생활을 거친 이후 조각 작품도 많이 만들었다.

 

 

민중의 피에타

 

전쟁을 정치가의 시선으로 또는 강대국의 시선으로지정학에 입각해 유불리를 따져 보는 경우들이 있다또 많은 경우 조국의 승리를 염원하는 뜨거운 열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그러나 케테 콜비츠는 전쟁에 참가했다가 숨진 장병의 어머니의 시선으로 전쟁을 바라보았다그것은 그녀의 생애사적 이유와도 관련이 있다그녀의 둘째 아들 페터는 콜비츠 부부에게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카를은 설득하기 위해 애썼지만 결국 아들의 결심을 꺾지 못했다그 다음날 자신이 허락한 것을 못견뎌한 케테는 다시 설득하고 싶어했지만 역시 아들의 결심을 바꾸지 못했다그녀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 어린 것들이 다시 살아 돌아올 가능성은 없었다공연한 걱정이 아니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고조용히 듣고만 있는 소년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는 말은 없었다그래서 결국 어제처럼 일어서고 말았다저녁에는 나와 카를둘뿐이었다울고울고또 울었다.”

 

그리고 1914년 10월 30일 일기는 이렇게 적었다.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자식을 먼저 앞세운 부모의 비탄이것은 케테 콜비츠가 아들 페터를 잃기 훨씬 전부터 작업했던 주제이기도 했다그런데 이제 그녀 자신의 삶에도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30여 년 후 1942년 그는 아들과 같은 이름을 가진 손자 페터를 2차 세계대전 때 또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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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 케테 콜비츠, 1903


베를린에 가면 노이에 바헤(Neue Wache)라는 왕실 경비대를 위해 지어진 건물이 있다지금은 그곳의 공식 명칭은 잔악 행위와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를 위한 독일연방공화국의 중앙기념관이다그곳에 케테 콜비츠가 1938년에 죽은 아들 페터를 생각하며 만든 작은 동상을 1.6m 크기로 확대 제작한 <피에타>가 1993년 설치되었다천정에 둥근 구멍이 있는 이 건물에 눈이라도 내릴라 치면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미의 머리와 어깨에는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이지만 아들의 얼굴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다.

 

이 책 <케테 콜비츠>의 옮긴이는 그 노이에 바헤에 있는 <피에타>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문명의 파국을 겪고 나서일면 식상한 측면이 있는 피에타를 모티프 삼아 그 파국의 주동자 격인 독일에서 애도 문화가 보편 형식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끔 한 결정적 계기는 콜비츠가 제공했다콜비츠의 예술 역량이다.” (이순예,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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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 바헤의 <피에타>, 하랄트 하케가 케테 콜비츠의 작품을 확대 제작 설치, 1993


 

다시 돌아온 전쟁의 시대

 

케테 콜비츠의 작품 중 이 시대에 다시금 불려올 작품이 있다면 바로 1924년작 전쟁 반대 포스터이다이 포스터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중부 독일 사회주의 노동운동 청소년대회를 위해 대형 석판화로 만들어진 것으로 <전쟁은 이제 그만>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는 1차 대전 10주년이 되던 해였다그리고 1~2차 대전 당시에는 정부와 각 정당들이 너도 나도 참전을 독려하는 포스터를 제작해 여기 저기에 붙이곤 했다독일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미국일본영국프랑스러시아 등 세계대전에 참전한 강대국들은 모두 각종 인쇄물을 통해 전쟁을 홍보하고 참전을 독려했으며 조국을 설파했다.

 

그런 시대에 이같은 전쟁을 반대하는 포스터 한 장이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하지만 사회주의자들까지도 자국의 전쟁 승리를 위해 정부에 협조를 아끼지 않던 시절독일 사민당의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홀로 전쟁 반대를 주장하고 이 전쟁 국면을 혁명으로 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러다가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그때 죽었던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자국의 노동자들에게 조국을 위해서 총을 들라고 하는 사회주의의 파탄이었고2인터내셔널이라는 사회주의의 국제주의적 이상마저도 파괴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주장하는 흐름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가 죽기 바라는 것을 옳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2개의 전쟁이든, 4개의 전쟁이든 그 모든 전쟁을 종식시키고 전쟁의 세기를 전변시킬 체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전쟁을 온 생을 바쳐 살아냈던 한 예술가의 눈을 빌어 그 고민의 단초를 발견해 보자민중의 피에타는 그저 한 아들의 죽음과 어머니의 비탄으로 끝나지 않아야 한다성모가 안고 있던 죽은 아들 예수가 부활할 수 있었다면민중의 피에타 역시 다시금 어떤 꿈의 부활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그 꿈은 아마도 전쟁과 단절하는 새로운 체제에 대한 열망일 것이며그 열망을 모아가는 시작에 다같이 외쳐 보자. “전쟁은이제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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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이제 그만>, 1924, 케테 콜비츠 미술관, 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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