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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내레터 다시읽기] 부른 사람들이 다시 만든 노래 *노래로 보는 노동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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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704회 작성일 23-11-28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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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른 사람들이 다시 만든 노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최도은 (민중가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투쟁속에 동지 모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동지의 손 맞잡고

가로 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주자

해 떨어져 어두운 길을 서로 일으켜 주고

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 됨을 위하여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김남주 시, 변계원 곡, 1988

 


국악과 학생이 만든 노래

 

이 노래는 1988년에 서울대 민중가요 노래패 메아리에서 활동하던 변계원씨가 만들었습니다. 변계원씨는 서울대 국악과(87학번)에서 작곡을 공부한 학생으로 엘리트 음악을 공부하는 음악학도로서는 흔치 않게 민중가요 노래패 활동을 했습니다. 변계원씨 말에 따르면 대학에 입학한 후 노래가 좋아서 노래써클을 찾고 있었는데, 당시 서울대에는 노래동아리가 메아리밖에 없어서 메아리에 가입했다고 합니다. 변계원씨가 2학년이던 1988년 광주에서 진행된 전국대학생노래한마당에서 서울대를 대표해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부르게 되었고, 이후 이 노래가 사람들 입을 통해 전국으로 퍼졌다고 합니다.

 

당시 변계원씨는 좋은 노래를 만들고 싶은 생각에 몇 곡의 노래를 습작 형태로 작곡하곤 했는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졸업 후 변계원씨는 영국으로 유학가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귀국하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답니다.

 

이 노래를 만든지 20년 세월이 훌쩍 지난 2008년 여름, 변계원씨는 가족과 함께 정동극장에서 진행된 노래를 찾는 사람들공연을 보고 광우병쇠고기 수입반대촛불집회에 참석했다가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부르는 것을 보고 창작자로서 너무 놀랍기도 하고, 가슴 속으로 뿌듯함을 느끼는 감동을 받았다 합니다. 한 음악가가 만든 노래가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의미있게 불린다는 것 자체로 큰 축복인데, 변계원씨는 이 노래는 자신이 만들었지만 부른 사람들에 의해서 이 노래가 다시 만들어진 거라며 겸손한 말씀도 남기셨습니다. 변계원씨는 지금은 감수성도 많이 변했고, 현실에 쫓겨 살다보니 창작활동은 엄두도 못내고 있지만, 내년 쯤 다시 좋은 노래를 만들고 싶다 하셨습니다. 아마도 촛불집회의 힘인 것 같습니다. 저도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새해에는 변계원씨가 만든 좋은 노래가 경제난으로 이중삼중 고통을 겪고 있는 많은 민중들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었으면 합니다.

 


혁명시인 김남주

 

다음은 이 노래의 중심을 이루는 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지은 시인 김남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한국민족문학을 대표하는 저항시인 김남주는 1970부터 1990년대까지 우리 사회 저항을 조직한 대표적인 혁명시인이었고, 혁명전사였습니다.

 

“80년대초 형님이 감옥에서 우유팩에 못으로 눌러쓴 일련의 시가 밖으로 전해졌다. 나는 타자로 쳐 유인물화 된 시집으로 형님을 대면 할 수 있었다. 그 때 형님의 시가 내게 준 충격은 지금까지의 만남에서 가장 큰 울림이었다. 전두환과 노태우 학살 정권이 폭압과 기만으로 안정을 구가하고 모두가 침묵할 때 그는 감옥에서 몽당연필 하나 없이 분노와 적개심 그리고 내일의 각오로 가득찬 통렬한 절규를 기록하고 있었다. 형님의 시는 절망과 일상에 매몰 돼 가는 나를 섬뜩하게 긴장 시켰다.” - 김선출, <내가 만난 김남주> 62

 

1946년 전남 해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김남주는 법관의 꿈을 안고 전남대에 진학합니다. 1969년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 박정희의 3선 개헌으로 학교는 연일 휴교령이 내려져 고향에 내려가 혼자 한국사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김남주는 1972년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선포하자 더 이상의 침묵으로는 안 된다며 저항만이 인간으로서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는 결단을 내리며 유신에 반대하는 최초의 지하신문 <함성>을 제작, 배포 합니다.

 

19732차로 지하신문 <고발>을 제작하던 중 경찰에 발각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김남주는 국보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13개월여의 감옥생활을 한 후 고향에 내려가 고문 과정에서 겪은 잔혹상을 담은 시 진혼가1974창작과 비평여름호를 통해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합니다. 유신독재가 판을 치던 70년대 많은 시인들이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자기 검열을 하며 유신의 탄압을 피할 당시 김남주는 대담한 화법으로 국가보안법의 서슬이 퍼런 시대 상황 속에서도 고문의 고통을 시로 써나갑니다.

 

김남주는 1975긴급조치 9가 발동되자 돌멩이를 든 데모대로는 한국사회 지배계급의 벽을 깰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철의 조직의 결성이 중요하다는 생각합니다. 광주지역의 사회과학서점인 카프카를 만들어 지역의 사회문화운동 공간으로 만들려 했으나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문을 닫은 후 1977년 고향 해남으로 내려가 지역의 농민들을 결집하여 해남농민회를 결성하였으며, 소설가 황석영을 비롯한 광주지역의 활동가들을 묶어 민중문화연구소를 만듭니다.

 

1978민중문화연구소에서 <파리콤뮨> 일어 강독을 진행하다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의 급습으로 인해 도피 생활을 하게 된 후 서울로 올라와 1976년에 결성된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 가입하여 유신체제를 끝장내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한 철의조직으로 38선 이남에서의 게릴라전을 구체화 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활동하게 됩니다. 서울 잠실의 한 아파트를 아지트 삼아 79811‘YH여성노동자들의 농성장을 살인 진압한 박정희정권 폭력을 고발하는 선언문’ 2만장을 뿌린 후 1979104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발각되어 김남주를 비롯한 남민전 회원 84명이 연행되는 남민전사건이 발생합니다. 아지트에서 발견된 M1소총 한 자루와 짝도 맞지 않는 칼빈 탄피 그리고 유신독재를 철폐하고 민주연합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전개하자는 남민전의 강령은 독재정권의 계급 지배 이데올로기의 선전도구로 십분 활용되었습니다. ‘남민전회원들에 대한 고문은 상상을 할 수 없을 만큼 가혹했는데, 1980521심 재판 당시 김남주를 비롯한 남민전 회원들은 의식도 차리지 못하는 상태로 들것에 실려와 판결을 언도 받았습니다.

 

무기징역을 언도 받고 광주교도소 정치범특별사동에 수감 된 김남주는 이후 19801223일 대법에서 15년의 형으로 감형되었지만, 남민전 회원들은 간첩으로 분류되어 민주화 운동집단으로부터도 외면을 당해 실질적인 구명운동을 전개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무자비한 고문에 의한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남민전 회원들은 광주의 소식을 접하고는 5.18진압에 항의 하며 옥중단식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남민전 대표 이재문씨는 감옥에서 병마를 얻어 19811121일 숨을 거두게 됩니다. 당시 이재문씨는 중앙정보부에 연행되는 과정에서 할복을 해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중정에서는 악질에게는 치료가 필요 없다며 치료를 해 주지 않았고, 심지어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 의해 고문 피해를 당하기도 하였으며, 옥중 단식으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을 때 담당 형사들은 약물병에 약이 아닌 맹물을 집어넣어 투여 했다는 진술도 밝혀집니다. - 민주화심의위원회, 2006

 

또 다른 남민전 중앙위원 신향식씨도 독재자들에 의해 198210월 사형이 집행되어 형장의 이슬로 살아지는 그 기나긴 죽음의 터널 속에서 저항의 울부짖음으로 김남주는 다시 시를 쓰기 시작 합니다. 뭘 쓴다는 걸 상상할 수 없는 정치범의 사동에서 김남주는 우유팩을 분해하여 그 속에 들어 있는 은박지를 펼쳐 칫솔이나 뾰족한 물체들을 이용해 빠르게 한자 한자 시를 써내려 갔습니다. 이 시들은 출옥을 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시인의 애인인 박광숙씨에게 전달 해 주었고, 1982년부터 복사물의 형태로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1984년 첫시집 [진혼가]는 이렇게 세상에 알려졌고, <전사>를 통해 남민전대표 이재문을 추도 하는 시를 발표합니다.

 

김남주의 시는 시가 아니었습니다. 동지들의 죽음과 고문, 독재자에 의해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고 인권이 유린되고, 목숨이 강탈 되고, 인간의 양심마저 지킬 수 없는 상황에서 광주항쟁으로 옥살이를 하는 후배들을 만나면서 혁명전사로서 시를 써나갔고, 그의 시는 광주항쟁의 패배감으로 좌절에 빠져 있는 광주의 활동가들을 깨우는 힘이 되었습니다. 1985년 광주지역의 젊은이들은 비밀리에 광주항쟁을 추모하는 노래테잎을 만들었습니다. 이 테잎은 전국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번져나가 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 시켜내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너무도 잔혹한 죽음의 시간을 지나 19876월 항쟁의 물결이 일어났고, 전두환을 끌어내린 이후 수년 간 김남주 시인의 구명운동을 주도한 문인들의 석방 탄원과 88올림픽을 앞두고 세계 곳곳의 문인들이 김남주 시인 석방촉구 서한을 노태우 정부에 발송한 노력 등에 의해 시인은 1988 1221, 형집행정지로 '남민전'사건 투옥 이후 만 93개월만에 전주교도소에서 석방 됩니다.

 

10여년이라는 긴 시간을 감옥 속에서 보내야 했던 시인은 출소이후 오랜 감옥생활로 얻은 지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지만,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등을 맡아 활동하시며 민족문화 운동에 힘을 쏟다가 1994213일 췌장암으로 마흔 아홉의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야만의 세월을 저항하며 올곧게 살다가 가신 김남주 시인은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잠들어 계십니다.

 

김남주 시인의 시는 대부분 남민전사건과 관련해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던 감옥 안에서 쓰였습니다. 앞서도 인용하였듯이 집필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은 당시의 감옥에서 시인은 머릿속에 시를 써두었다 가 우유팩을 해체하여 발견한 은박지에 칫솔을 날카롭게 갈아 꼭꼭 눌러 시를 새겨 1984년 첫시집 [진혼가]를 발표했으며 이후에는 시인에게 갱지로 된 화장지와 볼펜을 넣어준 교도관의 도움으로 1987[나의 칼 나의 피]1988[조국은 하나] 등 두 권의 옥중시집을 발표 하였습니다. 출감이후 발표한 1989년 시선집 [사랑의 무기][솔직히 말하자], 1991[사상의 거처]와 시선집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산문집 [시와 혁명] 1992[이 좋은 세상에]와 옥중 시선집 [저 창살에 햇살이1.2] 그리고 1995년 유고 시집 [나와 함께 모든 노래 가 사라진다면] 등의 많은 시를 창작 발표 하였습니다.

 

20063, 남민전 사건 관련자 29명이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되어 생활지원금을 보상받고 계시고 현재까지 33명의 명예가 회복 되었지만, 남민전 중앙위원인 이혜경 선생을 비롯한 4분에 대한 심의는 보류되고 있으며, 한나라당에서는 빨갱이에게 보상을 했다며 반대 데모를 하고 있어 현재 지난 시기 독재정권에 의해 고문 조작된 간첩 남민전사건 구속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은 쉽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남민전피해자로는 오랜 시간 프랑스에서 유배 생활을 하셨던 홍세화님과 글로 올리기에도 부끄러운 한나라당 최고위원 이재오도 있습니다. 사람이 들고 난 자리가 분명 해야 한다는데 노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살펴보는 짧은 시간에도 우리 시대가 안고 지식인들의 양태를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처신이 중요하다 하는데 오늘의 모습은 처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되집게 합니다. 모쪼록 다가오는 새해에는 침묵의 벽 이기주의의 벽을 넘어 함께 나누며 살기 위한 실천의 광장이 더욱 열리길 바라기 위해 다들 건투를 했으면 합니다. 그 길만이 이 야만을 끊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 김남주 시인 (1945~1994)


[출처] 2008.11.28, 한내 뉴스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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