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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오늘] 광고, 시장점유를 노리는 하나의 상품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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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869회 작성일 23-12-05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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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원 (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  

 


광고 정치

 

광고는 자본주의 상품생산과 함께 등장했다. 대량생산 체제가 형성되면서 그 중요성은 커졌다. 상품에 대한 정보가 소비자에게 닿도록 하는 게 광고의 목적이니까. 광고대행사도 이때쯤 생겼다.

한국 광고의 시작으로 보는 건 1886년 한성주보에 장티푸스 치료약인 [금계랍] 광고라고 한다. 이후 글씨 위주에서 그림으로, 더 나가 예술적 감각을 뽐내며 기법이 발전했다. 물건만 파는 게 아니었다. 공익광고, 정치광고 등 광고는 그 범위를 넓혔다. 때로는 윤리실천 기준 등을 이유로 광고가 금지되는 시기도 있었고, 정론을 실천하는 언론사 탄압 수단으로 광고 철회 압력이 동원되기도 했다. 이러한 부침을 겪으며 오늘날 광고는 상품과 정치를 보여주며 그 시장을 확장해가고 있다.

일제강점기 신문에 등장하던 상품 광고는 해방 후 한동안 실종되었다. 물건을 팔 기업도 살 사람도 여력이 없던 시절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게다. 이 시기 등장한 것이 정치광고다. 1945년 해방부터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의 격동의 정치가 광고에 반영되었다.

19485.10총선거를 앞두고 진정한 교육자의 입후보를 지지하자라는 제목으로 조선교육연합회가 정치광고를 내거나, “백인제 박사 지지 결의라는 영락교회면려청년회광고가 등장했다.(동아일보 1948.5.8.) 광고카피나 이미지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제목 아래 이름을 실어놓거나 지지 호소를 간단히 적은 정도였다. 비록 글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 작대기 수로 정당과 후보자를 표시하던 시절의 선거였지만 처음으로 치르는 직접 선거의 장에 후보를 부각하기 위해 광고가 등장했던 것이다.

 

 

최고의 카피가 상품을 만든다

 

광고는 정치와 결합하며 완전히 상품화했지만 마냥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첫째, 1970년대까지 사람들은 옥외 유세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후보들이 소달구지를 타고 다니며 홍보를 하거나, 한강 백사장, 부산역 광장, 장충공원 등에서 유세를 하면 수만의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지금과는 다른 풍경이다. 둘째, 박정희 정권기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가 있기는 했지만 대중을 사로잡기 위한 기법에 신경을 써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선거법과 관계없이 행정력과 관권에 대한 규제 없이는 선거다운 선거를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까(동아일보 1971.4.30.). 이에 정치광고는 학력과 경력, 공약 제시, 상대방 비방 정도로 머물렀다.

그나마 1963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황소를 그려넣은 현수막을 동화백화점 앞에 걸어 자신의 이미지를 부각한 것, “이순신을 택할 것인가, 원균을 택할 것인가.”라며 이순신 장군을 등장시켜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경향신문, 1968.09.13.), 19717대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후보가 대중 시대의 문을 열자며 이름을 따 자신을 어필했던 것 정도가 눈에 들어오는 수준이다.

하지만 이정도 정치광고도 유신 선포 이후에 아예 금지되었다. 후보자 성명 게시, 신문 광고, 현수막, 후보자 연설회, 정당의 지원 유세 방송, 방송 이용 및 기호 배포 등 모두가 금지됐다. 말은 조용한 선거를 위한 것이었다. 국회의원 219명 중 선거구에서 146명을 선출하고, 대통령이 추천해 통일주체국민회의가 73명을 선출하도록 법을 바꿨으니 정치광고 허용 여부가 그리 큰 변수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건 1987년 대투쟁 이후 대통령 선거부터였다. 사회민주화 투쟁을 경험한 이들에게 단순한 정보를 제공하고 일방통행식 주장을 하는 광고는 통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정치광고는 전문 광고인과 손을 잡는다. 제일기획, 대홍기획 등 내로라하는 광고 전문회사들이 정치 시장에 발을 들여놓았고 그 시장은 해를 거듭할수록 커졌다.(경향신문, 1990.12.29.) 기업의 광고 기법이 선거에 동원되기 시작해 기발한 아이디어와 카피 개발로 정치에 대한 환상을 불어넣었다.

 

그럼에도 최고의 정치광고 카피는 1956년에 이미 나왔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대통령 선거 때 민주당이 내건 선거 구호는 사람들 뇌리에 박혔다. 자유당은 이에 대항해 갈아봐야 별 수 없다.”로 응수했다. (당시 선거엔 이승만, 신익희, 조봉암이 후보 등록했다. 민심은 이승만과 자유당의 패악에 등을 돌렸고 이승만은 정치적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최고 인기였던 신익희 후보는 유세를 가던 호남선 열차 안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선거 결과 이승만 504만여 표, 조봉암 216만여 표, 무효표 185만여 표로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무효표는 추모표였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선거 구호는 이후로도 썩은 정치 갈아보자” “정말 못 살겠다. 이번에는 갈아보자등 조금씩 바뀌어 활용되었다.

 

 

시장점유를 노리는 정치

 

202311월 정치 현수막 게재를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조례 개정안이 전남도의회 상임위원회 심사를 통과했다. 202212월 옥외광고물법을 개정해 정당 현수막 규제를 없애고 나서 동네마다 현수막이 넘쳐나고 있으니 이런 조례를 제정하기 이른 것이다.

선거 때마다 곳곳에 현수막이 넘쳐난다.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와 예비선거,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심지어 농협 조합장 선거까지 얼굴 알리기 현수막 홍수다.

 

필립 코틀러라는 경영학자는 정치 후보는 시장점유를 노리는 하나의 상품이라 했다. “마케팅처럼 상표 이미지(자신의 인품)를 부각시켜야 하고 조직, 회사(정당)의 지지와 찬성을 얻어야 하며 시장테스트(예비선거)를 거쳐야 함은 물론, 활발한 광고활동(선거운동)을 전개해 시장점유(당선)를 달성한 뒤에 반복판매(그 자리를 지키도록)에 온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1985.2.9.)

 

정치는 마케팅이 필요하고, 마케팅의 필수는 광고다. 반복적이고 현란한 광고는 필요와 이성을 넘어서 욕망을 자극한다. 자본과 정치 호구는 그 속에서 만들어진다. “바늘만 한 체격을 몽둥이만 하게 보이려하거나, “물이 없어도 다리를 놓아준다고 말하는정치인을 부각하는 데 상상 이미지를 통해 환상을 만드는 정치광고가 한몫을 하는 것이다. 광고는 많은데 정책은 없고, 정보는 넘쳐나는데 정치는 왜소하다정당의 정책을 확인하고 후보자를 검증할 정보를 획득하는 정치광고의 순기능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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