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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목격한 사회] 갑을고시원 체류기 - 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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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723회 작성일 23-12-12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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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조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갑을고시원

 

살다보면 여러 종류의 봄을 맞이하기도 하겠지만, 정말이지 그런 봄은 처음이었다. 우선 봄이 오기 전 겨울에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를 맞았다. 집안 곳곳에 차압딱지가 붙고, 빚쟁이들이 들이닥쳤다. 막대한 규모의 사기성 부도에다 지독한 사기를 친 주인공은 아버지의 친동생이었다. 물론 삼촌이란 얘기지만, 그런 인간을 삼촌이라 부를 수는 없는 거겠지. 집은 사라지고 가족들은 흩어졌다. 부모님은 시골을, 형은 막노동판을, 나는 나대로 친구의 집을 전전하게 되었다. 한순간의 일이었다.

 

아무튼 1997년은 - 일용직 노무자들이나 유흥업소의 종업원들이 갓 고시원을 숙소로 쓰기 시작한 무렵이자, 그런 고시원에서 아직도 고시공부를 하는 사람이 남아 있던 마지막 시기였다. 그러니까 그곳을 찾는 사람에게도, <고시원>으로서도 조금은 쑥스럽고 애매한 시기였던 셈이다.

 

주인공인 는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를 맞고 가족들과 헤어지게 된다. 부모님은 시골로, 형은 막노동판으로, ‘는 친구집을 전전하다가 형에게 돈을 얻어 학교 근처 고시원에서 가장 싼 값의 방을 얻게 된다. ‘에게 고시원은 월 9만 원에 식사까지 제공해주는 소중한 공간이지만, 그곳은 이라기 보다는 에 가까운 최소한의 생명유지를 위한 간이 호흡기 같은 곳이다. 그 시절 그리고 오늘날 어느 곳에나 있을 것 같은 갑을고시원에서의 기록이다.

 

 

(Disease)

 

불과 2~30년 전쯤의 이야기지만 한국의 주거환경과 복지제도, 나아가 오늘날까지 인민의 전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일대 사건으로 거론되는 IMF 외환위기는 그 총체성만큼이나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김대중 정권 이래로 채택된 적극적인 신자유주의 정책 노선은 시장을 확대(금융개방)하고 상품의 유동성(노동유연화)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한국의 초고속 성장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성장의 부품으로 추락한 보통 사람들(갑을)의 삶은 오늘날의 사회적 병증을 논증하는 예시로서 자주 이야기된다.

 

어떤 병은 치료에 성공하더라도 평생을 따라다니며 그 사람을 괴롭히기도 한다. 병은 엄밀한 의미로 염증의 비율이다. 예컨대 암은 염증의 진행도를 표현하는 다른 이름이고, 치매 또한 그렇다. 현대의학은 염증의 농도를 표현하기 위해 인간의 병증에 다양한 이름을 붙였다. 사회도 병에 걸릴까. 한국 사회는 어떤 병을 앓아 온걸까.

 


신자유주의적 징후

 

여기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왠지 생각에 잠겨보지도 않은 채 덜컥 이런 곳에서 산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는 말투였다. 듣는 사람에 따라, 또 새겨듣기에 따라 화가 나거나 서운하거나 서러움이 북받치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감정에 사로잡혔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화가 나거나 서운하거나 서럽지 않고, 대신 외로웠다.

 

결국 나는 소리가 나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 어느 순간인가 저절로 그런 능력이 몸에 배게 된 것이다. 발뒤꿈치를 들고 걷는 게 생활화되었고, 코를 푸는 게 아니라 눌러서 조용히 짜는 습관이 생겼으며, 가스를 배출할 땐 옆으로 돌아누운 다음- 손으로 둔부의 한쪽을 힘껏 잡아당겨, 거의 소리를 내지 않는 기술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사실과, 이 세상은 혼자만 사는 게 아니란 사실을 동시에,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모순 같은 말이지만 지금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 어쩌면 인간은 혼자서 세상을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혼자인 게 아닐까.

 

IMF 위기가 있은 지 10년쯤 지났을까. 이명박 전 대통령은 실업문제와 관련하여 여러분들이 눈을 조금 아래로 낮추면 아직도 일자리는 많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특정한 사회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하거나 돌파할 수 있다는 강한 확신 속에서 벌어진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입장이기에 이 자체로 옳거나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의 인민들이 여전히 오래 많이 일하고, 빠르게 죽어간다는 사실이다.

 

<갑을고시원 체류기>는 신자유주의적 징후에 대한 예민한 포착이다. 사람들은 이유 모르게 점차 왜소해지고, 그들의 인격은 사물화한다. 결국 고시원에 남겨진 는 사회와는 단절된 하나의 물건이 되어간다. ‘는 물건이 되어가는 사람들을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게 지켜보지만, 마침내 그것을 삶의 자산이자 원동력으로 여길 수 있을 만큼의 소박한 마음을 갖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 시절의 정체 모를 고독은 없어지지 않고 현현하다. 왜일까.

 

 

보통의 회복

 

그리고 나는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했다. 셋 중 어떤 일을 떠올린다 해도 간신히, 간신히, 안간힘을 다해 할 수 있었다는 생각뿐이다. 과연 인생은 고시를 패스하는 것보다 힘들었고, 그나마 나는 운이 좋았다는 생각뿐이다. 오로지? 오로지. 그리고 그사이, 역시나 간신히 나는 작은 임대아파트 하나를 마련할 수 있었다. 비록 작고 초라한 곳이지만 입주를 하던 날 나는 울었다. 아마 당신이라도, 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치 꿈처럼 나는 두 발을 뻗고 자고, 아주 자주, 내 몫의 계란후라이를 먹으며 살고 있다. 그리고 간혹, 아주 가끔 나는 그 고시원의 작은 밀실을 떠올리곤 한다. (중략) 어쩌면 나는 여전히 그 밀실 속에서 살고 있다는 기분이다.

 

2023년 서울에서 밥과 국을 제공하는 고시원에 살기 위해서는 보증금 없이 월 50만원 정도를 지불해야 한다. 최저임금으로 계산했을 때 노동자 1명의 월 급여는 약 200만원, 전체 노동자의 중위임금은 약 240만원 정도이다. 다시 말해 보통 사람이 저 고시원에 지내기 위해서는 자기 임금의 20% 이상을 지불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여기에 생활비는 포함되지 않는다. 1인이 고시원이 아닌 다른 주거 형태를 선택했을 때, 저 비율은 더욱 가파르게 올라간다.

 

평균의 함정이라는 말이 있다. 분포의 최대 구간과 최소 구간의 격차가 심할수록 그 평균값은 보통 수치로서의 신뢰성을 잃는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점차 평균의 의미가 상실되어 가고 있다. 이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가늠하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시원처럼 고립된 밀실은 늘어가고, 보통의 사람들은 점차 시야에서 사라진다. 한국은 어쩌면 보통이 사라지는 병을 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보통의 회복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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