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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의 역사]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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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629회 작성일 23-12-26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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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화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는 생김새가 마치 고슴도치처럼 생겼다 해서 고슴도치 위()’를 써 위도(蝟島)라 한다. 부안 격포항에서 서쪽으로 14km 떨어진 위도는 배로 50분 정도 가면 도착하는 가까운 섬이다. 고운 모래로 유명한 위도해수욕장은 관광객들의 피서지로 인기가 많다. 부안군은 위도를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에 나오는 이상향 율도국의 실제 모델이라고 선전하기도 한다.

이렇게 아름답고 작은 섬 위도에 난데없이 핵폐기장이 들어선다는 발표가 있었다. 2003724일 산업자원부는 방사성폐기물처리장 부지선정위원회 회의를 열어 위도를 방폐물 처리장 부지로 확정한다고 밝혔다. (“위도 핵폐기장 확정 2006년 착공”, 조선일보, 2003.7.25.)

부안군수가 전국 최초로 핵폐기물 유치신청서를 제출하면서 정부가 추진하는 핵폐기장 유치 문제는 급물살을 타게 됐다. 그러나 부안군수의 핵폐기물 유치신청은 부안군 의회와 지역 주민의 의사와는 완전히 거꾸로 가는 행동이었다.

 

 

핵폐기장 유치와 여론의 움직임

 

역대 정부는 핵폐기장 건설을 위해 1980년대 후반부터 부지 선정을 추진해왔으나 번번이 해당 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겪었다. 1990년 충남 태안군 안면도, 1995년 인천 옹진군 덕적도 등이 그랬다.

이에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20036월 울진, 영덕, 장흥, 영광, 고창, 부안 7개 지역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면서 핵폐기장 부지 선정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고창은 의회에서, 장흥은 군수가 핵폐기장 유치신청을 거부했다. 뒤늦게 군산시가 핵폐기장 유치를 철회하자 전북도지사가 부안군수를 방문했고, 다음날인 711일 부안군수가 핵폐기장 유치선언을 했다.

군수의 유치선언 이후 부안군은 핵폐기장 유치와 관련한 주민들의 의견이 찬반으로 갈라졌다. 아울러 정부는 71821천억원 규모의 부안군 지원 특별법을 제정한다고 밝혔다. 이미 유치신청 전부터 한수원이 위도 주민들을 상대로 핵폐기장을 유치하면 3천억 원의 개발자금이 유입되고 그러면 한 가구당 5억원 이상 현금 보상받을 거라며 떠들고 다닌 터였다.

위도 주민들은 새만금 방조제 건설과 전남 영광 원자력발전소에서 배출되는 오염수로 인해 어획량이 급감해 생계가 어려운 사정이었다. 거기에 산더미 같은 부채를 줄일 특별한 방법도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현실은 현금 보상금과 지역개발 선전은 위도 주민 90% 이상을 찬성으로 몰고 가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현금 보상은 없다는 정부의 재빠른 언론 발표로 상황이 반전되며 주민들의 의견은 유치 반대로 기울어갔다. 부안 주민들은 핵폐기물이 지역과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민 의견 수렴 한번 없이 핵폐기장 건설을 결정한 것은 문제라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부안사태의 원인을 지역 이기주의로 몰아갈 수는 없다.

 

 

부안 주민들의 투쟁

 

부안군 34개 시민사회단체는 핵폐기장 백지화 핵발전소 추방 범부안군민대책위원회(부안대책위)’를 구성했다. 부안대책위는 읍내 수협 앞 반핵광장에서 매일 오후 2시면 집회를 열었고 저녁마다 촛불 시위가 이어졌다.

위도 핵폐기장 부지 확정 무효 및 노무현 정권 퇴진 군민 결의대회에는 1만명 이상의 주민들이 모여 정부를 규탄했다. 이 과정에서 전국에서 차출된 전경들의 과잉 진압으로 100여 명의 부상자와 50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다. 공권력 탄압에 분노한 부안 주민들은 상경 시위와 해상 시위, 서해안 고속 도로 점거, 학생들의 등교 거부 등으로 맞서며 위도 사태는 전국적 쟁점으로 발전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안군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모든 치안과 어려움은 정부가 감당하겠다며 밀어붙이자, 부안 군민들은 핵폐기장 백지화를 위해 더욱 완강한 대정부 투쟁을 벌였다.

투쟁기금으로 사용하라며 소 한 마리를 판 주민은 우리가 권력을 줬제, 목숨을 준 건 아니야. 한 나라 임금이라면 백성의 생명을 보존할 줄 알아야지. 노무현이도, 도지사도, 군수도 다 마찬가지야. 그래서 눈알 뒤집어졌어.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은 이렇게 죽갔구나 싶어서.”라며 분노했다. 민주주의라면 절차라도 지켜야 하는 거 아니냐는 목소리도 커졌다.

핵폐기장 그렇게 좋은 거라면 널리 알려야 할 거 아니야. 좋은 것이 있어 가져오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주민들한테 물으면 주민들이 잘했다. 군수도 가져오느라 애썼다. 그렇게 되어야 마땅하지.” 반대 집회에 참석한 주민은 독단적으로 추진하는 군수와 정부에 이렇게 따져 물었다.

부안 주민의 반대 여론이 점점 높아지자 김두관 당시 행정자치부 장관은 8월 주민투표를 제안했고, 부안대책위는 11월 주민투표를 수용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정부와 부안군수는 주민투표 실시를 외면했다.

 

 

민주주의와 산업 전환

 

결국 부안 주민들은 자체적인 주민투표를 결의하고 주민투표관리위원회를 구성했다. 2004214일 위도 핵폐기장 건립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묻는 주민투표가 진행됐다. 투표율은 72.01%를 기록했다. 투표결과 반대표가 91.83%로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주민투표법이 20047월 이후에나 발효돼서 당장 법적 효력은 없었지만 부안 주민들의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는 점에서 정치적 효력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핵폐기장 반대투쟁은 6만 부안 주민들의 싸움으로 핵 산업의 문제점을 사회적으로 알리고 참여민주주의와 지방자치를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

핵폐기장 확보는 신규 핵발전소 건설의 전초 작업이다. 그러나 지구상의 어떤 나라도 사용후핵연료를 오랫동안 완벽하게 처리할 기술을 갖추지 못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2023년 핵폐기물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환경 의제로 남아있다. 게다가 윤석열 정부는 노후 핵발전소 수명연장과 신규 핵발전소 증설을 추진하고 있기에 사용후핵연료문제는 더욱 심각한 실정이다.

핵분열과 핵융합을 설계한 오펜하이머는 인류의 에너지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자가 되고자 나섰지만, 그 위험성을 깨닫고 난 이후에는 스스로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고 자백했다. 지금의 세대에게 미래의 에너지를 당겨쓸 권한은 없다. 핵발전은 환경은 물론 민주주의까지 파괴해왔다. 경제개발 논리에서 생명과 자연을 지키는 반핵 운동의 핵심은 핵폐기장의 건설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운동이다. 나아가 재생 가능한 대체에너지를 활용하는 산업 전환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민주적인 산업 전환만이 에너지 정책의 올바른 길이다.

 

 

[사진] 부안시외버스터미널 인근 국민은행 옆(부안읍 석정로 224). 2004년 건립한 비석 아래에는 핵폐기장 반대투쟁일지, 반핵 티셔츠, 머리끈, 유인물 등과 기록을 담은 타임캡슐이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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