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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내레터 다시읽기] 아리랑목동에서 파업가로 *노래로 보는 노동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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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내
댓글 0건 조회 559회 작성일 24-01-16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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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목동에서 파업가로  



최도은 (민중가수)

 

 

아리랑목동과 노동자대투쟁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이 땅의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우리사회 민주주의의 지표를 새로이 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노동자 대투쟁으로부터 시작한 폭발적인 파업투쟁은 전국 곳곳에서 어용노조를 갈아엎고 새로이 자주적 민주노동조합이 결성되는 계기였고, 대기업, 중소기업 할 것 없이 전 산업에 걸쳐 노동조합 건설로부터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이 시작된다는 깨우침과 사명의식으로 전국이 들끓었습니다.

 

노동부 집계에 따르면 1987년 들어 발생한 노동쟁의는 3,749건으로 80년대 들어 가장 많은 쟁의가 일어났다. 1980407건의 무려 9배에 달하는 폭발적인 투쟁이 전개되었다. 특히 19873,749건의 쟁의 중 3,341건이 6.29 이후 7·8·9월에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이는 하루 평균 44건의 쟁의가 발생한 것으로 1986년의 하루 0.76건에 비해 무려 58배가 증가한 것이다.” - 전노협 백서 1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시원인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현장에서 불린 노래는 재미있게도 꽃바구니 옆에 끼고 나물 캐는 아가씨야"로 시작하는 운동장 응원가요의 최고봉인 대중가요 <아리랑 목동>이었습니다. 울산지역 뿐만이 아니라, 인천, 마산·창원 등 노동자들의 대대적인 투쟁이 폭발했던 현장에서도 대부분 대중가요와 군가가 불렸고 심지어는 애사심을 강조하는 회사 사가도 불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설마 하겠지만, 그땐 그랬습니다.

 

그때는 극소수의 움직임이었고 노동자대중과 호흡하기에는 시대적 문화적으로 거리감이 많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시간을 빌어 지금처럼 노동가요를 부르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는 것도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열어 놓은 공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87년 이전에 이름을 드러내놓고 노동가요를 부르고 만들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문예활동가

 

1987년 대투쟁이 지난 후 노래운동에도 새로운 변화가 생겨납니다.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전국적으로 많은 수의 문예활동가 군이 생긴 것입니다. 쉽게 말해 젊은 피들이 공단지역으로 몰려 온 것입니다. 인천의 산하안양의 새힘마창의 들불부산의 노나라등 대학에서 노래서클활동을 하던 젊은이들이 공단지역으로 찾아 들었고, 노동자 문화운동가를 자처하면서 노동운동에 결합합니다. 그들에 의해 많은 수의 노동가요가 창작·보급 되었고, 이들의 활발한 현장 공연활동 및 현장 문화패, 문선대 조직사업은 노동운동에 문화적 힘을 결합시켜 노동자의 투쟁과 농성에 생동감을 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문화운동가들의 일상은 매일 매일이 노동자의 투쟁과 노래로, 토론과 해방춤, 그리고 빠지지 않고 함께 한 연대의 술잔으로 밤이 깊은 줄 몰랐습니다. 그러다 1988년 초가을에 접어들어 우연히 서울에 있는 맥스테크, 녹십자 등과 함께 위장폐업 분쇄 연대투쟁을 전개하던 세창물산(인천) 조합원들의 서울상경 집회에 따라갔다가 흩어지면 죽는다로 시작되는 노래를 듣고 모두가 이 노래에 완전 감전되었습니다.

 

상경투쟁에 함께 했던 세창조합원들도 한결 같이 경인선 전철을 타고 주안으로 내려오는 동안 몇 번이고 수첩에 받아 적은 <파업가>의 구절을 따라 부르며 눈을 마주치고, 입모양을 맞추며 소곤소곤 흩어지면 죽는다를 부르며 이 노래를 인천에 가서 퍼뜨릴 생각으로 음정을 까먹지 않으려 애를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파업가>처럼 큰 위력을 발휘하는 노래는 처음 정말 처음이었습니다.

 

이후 인천지역에선 <파업가>가 노동자 노래의 대표곡으로 우뚝 섰고,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부를 만큼 농성장의 주제곡이 되었습니다. 1988년 가을을 거쳐 마치 들판에 들불이 타 번지듯이 전국에 퍼진 노래 <파업가>는 가사도 가락도 한 번 들으면 팍 박히는 노래로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어서 농성과 투쟁이 있는 현장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되었고, 이 노래가 갖고 있는 가사의 절박함과 가락의 간결함 때문에 싸울 때 부르기 좋은 투쟁가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김호철의 파업가

 

<파업가>19885.1일 메이데이를 준비하면서 서노협에서 활동하던 김호철님이 집회장인 연세대 학생회관 로비 한구석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은 노래라 합니다. 80년대 후반 노동가요 제조 자판기로 불리며 노동가요 창작의 대부 역할을 한 김호철님은 1980년 한국체대에서 학생회활동을 하다 계엄법 위반으로 군에 끌려가 모진 매질을 당합니다. 김호철님은 어려서부터 운동(태권도)으로 다져진 체력이었지만 계엄군의 매질은 견디기 힘들었다합니다. 반강제로 끌려간 군에서 군악대 활동, 제대 후에는 밤무대에서 트럼펫을 불며 생계를 꾸린 자칭타칭 딴따라 김호철님은 이후 현장에 취업했다 해고되어 서노련활동과 돗자리라는 공간에서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기타반강사활동을 하다 이후 서노협 문화국에서 활동을 하면서 <파업가>를 비롯하여 <전노협 진군가> <총단결총투쟁> <노동조합가> <총파업가> <단결투쟁가> 등 다수의 노래를 창작 보급하여 노동운동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공로로 전노협에서 공로패를 받습니다.

 

노동자의 삶 속에서 노래 파업가는 노동자들을 묶어내는 단결의 구심이었고, 민주노조를 지켜내는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전국 어느 곳에서나 파업가를 배우는 것으로부터 투쟁을 시작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흩어지면 죽는다의 노래정신은 삼십여 년의 세월동안 공장을 넘어 지역을 넘어 연대하고 실천하며 생존권을 지키려 노동해방 세상을 만들려 자신의 일신도 돌보지 않고 힘든 투쟁의 중심에 섰던 그때 그 시절 투사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노래입니다.

 

중소 영세 사업장에서 민주노조를 지키려다 직장을 잃고 공단으로부터 밀려나 지금은 그 안부조차 알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들의 투쟁이 있어 공돌이, 공순이의 이름표를 떼었습니다. 옛말에 권불십년이라했는데, 노동자 민주주의를 실천하려 뛰어 왔던 지난시절을 돌아보며 삼십여년 전 굴종과 억압을 뚫어내기 위해 공단에 울려 퍼졌던 노래 흩어지면 죽는다<파업가>를 이달의 노래로 정해봅니다. (2008.10.7. 한내 뉴스레터)

 

 

[사진] 윤석열 대통령이 국무회를 주재하는 모습. 광주 서구 기아 오토랜드 광주공장 남문 앞에서 화물연대 광주지역본부 총력투쟁 결의대회가 진행되는 모습. 연합뉴스 200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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